국학은 한 나라의 문명을 가늠하는 척도이자 국력이다. 국학이 성할 때 나라는 흥한다. 그래서 국학 사랑은 나라 사랑이고, 국학 선양은 국민의 할 바 도리이다. 학자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학문 일반이 그러하듯이 국학에도 지켜야 할 요량과 분수가 있다. 요량 없이 분수를 뛰어 넘으면 이미 ‘학(學)’이 아니다. 작금 ‘제 것만을 제일’이라고 하는 국수(國粹)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 무척 안타깝다. 국수는 결코 자긍이 아니고 자학이며, 실재가 아니고 허무다.

지난 봄 몇 분이 함께 옮긴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란 책 한 권을 구입했다. 머리글 속에 “동서고금의 여행기 가운데 오직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또한 <열하일기>를 들 것이다”라는 글귀가 있어 역자들은 <열하일가>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여행기로 단정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러한 단정이 과연 적중할까 ?

필자는 지난 8월 초 연암의 연행(燕行) 길을 밟아 봤다. 연암은 18세기 후반 사행단의 일원으로 경마잡이를 앞세우고 여섯 달 동안 어림잡아 2,400km(약 6,000리)의 노정을 다녀왔다. 그 기록인 <열하일기>가 출중한 여행기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랑스러운 우리네 고전임에도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에 수백 년, 지어 근 천년 앞서, 주인공들이 3대륙의 수만 내지 십여만 킬로미터를 문자 그대로 승위섭험(乘危涉險)하면서 남겨놓은 여행기들, 즉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오도릭의 <동유기(東游記)>, 이븐 바투타의 <이븐 바투타 여행기> 등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 여행기들을 다 제치고 그 위에 수석으로 군림할 수가 있을까. 언필칭 그것들을 뛰어넘는 ‘최고’라고 가리사니(우리말 고어, 사물을 판단하는 지각)할 수 있을까. 이들 여행기 가운데 일부를 역주하였고, 또 주인공들의 족적을 나름대로 추적한 바 있는 필자로서는 도시 그런 과단에 믿음이 안 간다. 그것이 제 것만을 제일로 여기고 남을 업신여기는 그러한 터무니없는 국수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또 한 권의 눈에 거슬리는 책이 있다. <유럽 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평전>이란 책이다. 책 저자는 고선지 연구가로서 내용은 충실한 편이다. 전후시말이야 어떻든 이 책이 이상야릇한 이름으로 인해 실추된 점이 없지 않으리라고 사료된다. ‘유럽 문명’은 언제이고, 그 ‘아버지’ 고선지는 어느 때 사람인데 이렇게 견강부회할 수가 있는가.

필자 역시 고선지 장군의 다섯 차례에 걸친 서역원정 현장들을 두루 돌아봤다. 특히 그를 ‘유럽 문명의 아버지’로 띄운 ‘근거’로 삼은 탈라스 전쟁과 그 결과인 종이의 서구 전달과정을 현지에서 몇 차례 살펴봤다. 물론, 11세기 이후 종이의 유럽 전파가 유럽의 개명화에 이바지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유럽 문명의 시원이 될 만큼의 파천황적(破天荒的) 사변은 아니었다.

무언가 너무 지나칠 때 ‘그래도 유분수지’란 말이 튀어나온다. 요량도 없고 분수도 없는 국수는 남들의 웃음걸이가 되기 일쑤다. 예술 같은 데서 과장법이란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근거 없는 무한 과장이나 확대는 있을 수 없다. 학문은 방랑이 아니다. 학문에는 엄한 절제가 있다. 우리는 종종 이와 비슷한 사례들과 맞다들곤 한다. 문제는 왜 그러할까 이다. 예외 없이 자기 맹신에서 오는 착각이다. 남에 대한 착각은 단층(單層) 착각이고, 자신에 대한 착각은 중층(重層) 착각이다. 자신에 대한 착각은 남에 대한 착각마저도 일으키게 하기 때문에 중층적으로 더 심각하다. 착각은 환각을 불러일으키며 급기야 사물에 대한 변별 능력을 잃게 한다. 하나가 둘로 보이는 착시가 바로 이러한 현상이다.

학문에서도 겸손과 허심은 미덕이고 학덕이다. 왜냐 하면 쓸 데 없는 자만과 허풍을 걷어내고 모자람을 채워주는 힘과 슬기를 북돋아주기 때문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볼 수 있는 세상은 고작 우물 속 세상뿐이다. 굴절된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흘겨보지 말고 현미경으로 샅샅이 훑어보고 망원경으로 멀리 그리고 널리 조망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리를 알고도 남음이 있는 멀쩡한 사람들이 "아닌 보살"하고 국수의 내숭을 떠는 이유는 과연 무얼까. 명예욕과 더불어 상혼이 한 몫 하는 성싶다. 일단 상혼에 휘말려 찌들게 되면 양식은 괴멸되고 학문은 퇴물이 되고 만다. 심신 모두가 찌그러지게 마련이다. 많은 외국 사람들, 특히 한국을 연구하는 지한파들은 허와 실, 웃음걸이와 예찬걸이를 오롯이 가려내면서 우리의 국학을 지켜보고 있다. 옹골찬 국학을 기대하고 있다. 국학과 국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