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해례본의 창제 이론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일목요연하게 기술되어 있음을 볼 때 연구를 거듭하면 할수록 한 개인이 일관성 있게 추진한 단독 작품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세종 때 만든 해시계를 비롯한 30여 종이나 되는 발명품에는 하나같이 그것을 제작한 실무자의 이름과 연유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훈민정음만 유일하게 실무자의 이름이 없이 세종 혼자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이 눈병이 나서 요양을 떠나면서도 훈민정음 자료를 챙겨 떠난 사실을 보더라도 얼마나 한글 창제에 몰두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연구물이 아니고는 가질 수 없는 애착이다. 저서나 논문을 써본 사람이라면 그 심정을 공감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 훈민정음 창제가 세종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바로 <세종실록> 103권과 <훈민정음 해례본> 65쪽의 정인지 서문에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했다(자방고전字倣古篆)’라는 문구 때문이다. 그동안 ‘고전’을 한자의 옛 서체나 범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필자는 여기에 나오는 ‘전문篆文’이나 ‘고전古篆’이나 최만리가 말한 ‘전자篆字’가 모두 단군 때의 ‘가림다’를 일컫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토착吐着’이라는 문구 때문이다.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가 출가한 <죽산 안씨 족보>의 ‘정의공주유사’에 “세종이 방언이 문자와 서로 통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을 여러 대군에게 풀어보게 하였으나 아무도 풀지 못하였다.

세종대왕은 제3대 가륵단군때의 가림토를 많이 참고 한 듯 보인다

그래서 출가한 정의공주에게 보냈는데 곧 풀어 바쳤다. 이에 세종이 크게 기뻐하면서 칭찬하고 큰 상을 내렸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변음’과 ‘토착’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변음은 ‘이음異音’으로 사투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토착은 무엇일까. 그 당시 대군들은 아무도 ‘토착’을 풀지 못하였는데 오직 공주만 홀로 ‘토착’을 풀어 바쳤다는 내용으로 보아 아마도 단군 때의 ‘가림다’가 그때까지 여인네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토착吐着의 ‘토吐’는 분명 가림다나 가림토加臨吐의 ‘토吐’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정의공주로부터 가림다문의 이치를 알았기 때문에 토착 즉 ‘가림토’를 ‘전자篆字’로 보아 해례본에도 ‘옛 전자를 모방했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단군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3세 가륵 단군 때 삼랑 을보륵이 만든 가림다문을 보면 가운데 소리 11자는 훈민정음 가운데소리 11자와 똑같다. 따라서 세종은 단군 때의 가림토를 많이 참고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에는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 없이 자연에서 이루었다(무소조술無所祖述 성어자연成於自然,)’라고 했는데 이 내용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앞의 ’자방고전‘의 뜻과 서로 반대되는 말이다.

이에 필자는 앞의 ‘자방고전’이라는 뜻은 글자의 꼴을 가림다문에서 많이 취한 것이라는 의미로 보며 ‘무소조술 성어자연’이라는 문구는 글자의 모양 이외에 한글의 천 인 지, 초 중 종성의 조합방법이라든지 발성기관을 형상화한 것, 글자의 가획방법, 그리고 동양천문도의 28별자리에 이론적인 바탕을 두고 만든 것 등은 모두 세종의 독창적인 이론이라는 뜻으로 풀어 아무런 무리가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자방고전’이라는 문구 하나로 인하여 세종의 창제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자방고전’이라는 말은 단군 때의 가림다문의 맥을 이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는 말이며 ‘무소조술 성어자연’이라는 말은 글자꼴외의 창제원리는 세종의 독창적인 연구물이었다고 풀이하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창제원리를 세밀히 들여다보면 서로 혼란을 일으킬 문구가 아님을 알 수 있는데도 훈민정음 전체를 깊이 연구하지 않고 하나의 문구해석에만 집착하다 보니 일반인들에게 자꾸 혼란을 주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