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훈섭 교수 | 경기대 경영학과 교수

해방 후 동족상잔으로 가장 못사는 나라에서 경제 대국 10위를 넘보고, 성공한 국가순위에서 25위를 한 대한민국! 여러 난관을 감안하면 굉장한 발전이다. 두뇌강국에 걸맞게 평균 지능지수(I.Q)도 세계 최고로 우수하다. 그럼에도, 현실은 서양문화가 훨씬 우월하다는 생각에 그 문화를 따라 하기 바쁘다.

물론 필자도 서양 경영학으로 일찍이 박사학위를 땄지만, 우리 학문에 식민주의·사대주의가 만연하다는 것을 자각했다. 이에 우리 전통문화와 전통경영의 흔적을 향약(鄕約)의 ‘영가제인(營家濟人)’이란 글에서 근거를 찾아 전통(동이)경영학을 정립할 수 있었다. 서양경영학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경제운영이 목적이다. 이윤목적이 아닌, 가정이나 교회 등의 경영은 하위개념에 넣고 있다.

반면, 우리 전통경영은 실로 개인으로부터 가정, 집단, 국가, 우주까지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경영학이라 할 수 있다. 그 뿌리는 우리의 고유한 정신체계에서 나온다. 우리 사회에서 나는‘我(아)’란 씨앗에 호흡을 주고 생명을 부여한 부모와 가족이란 울타리의 가정, 그 가정들이 모인 국가, 국가들이 모인 세계, 세계가 모인 우주가 있어 ‘나’란 존재는 우주와 뗄 수 없는 관계인‘소우주’라고도 한다. 따라서 그 소우주에는 대대손손 압축된 모든 것이 존재한, 우주의 분신으로 인식한다.

그렇게 존귀한 나(我), 진정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바로 전통이다.‘경영’은 경제운영을 줄인 말로 ‘경제’는 벌어서 쓰기,‘운영’은 살기 즉 경영이란 잘 벌어서 잘 쓰고 잘 사는 삶이다.

1518년에 김한구 선생이‘經營’의 뜻을 한글로 ‘이르살      이를 도     며~’라고 설명해 놓았다. 지금 말로 하면 ‘살림을 이루다’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미 경영학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밥상 앞에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일러주신 까닭이다. 수신(修身)은 나를 경영하는 것이고 가정은 집안 살림살이(齊家)이고 국가나 민족은 나라 살림(治國), 전 세계는 두루두루 잘 지내면(平天下)되고 우주는 서로 잘 통하면(通 宇宙)되는 것으로 구분된다. 더 세분하면 나와 가정사이에 마음경영이나 가정과 국가사이의 사회에서 직업경영도 있다. 여기에서 修와 齊, 治, 平은 모두 ‘경영하다’란 의미이니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경영학이다.

서양학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영리 경제의 경영 실체는 당연히 상인(商人)이다. 상(商)은 言+內(門+人)로서 생산자나 소비자의 속마음을 헤아린다는 의미다. 속마음을 헤아려 풍찬노숙(風餐露宿)과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는 괴로움을 감당하면서도 좋은 품질과 가격의 제품을 공급하고 경제 흐름의 교량역할을 수행했다.

그럼에도,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지배계층이 무사(武士)고 상인을 최 하층민으로 폄하했던 일본인의 인식이 식민통치 때 오염된 때문이다. 조선의 사농공상(士農工商)은 신분의 귀천이 아니라 백성의 직업을  단순히 구분한 명칭으로 율곡, 다산 등 많은 학자가 고증하고 있다. 다만, 농 공 상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독서삼매에 쉽게 적응하기 어려워 선비를 예우한 것일 뿐, 산업발생순서에 따른 것이다.

상인을 이르는 ‘보부상(褓負商)’도 원래는‘부보상’이었다. 일제 때 비밀 연락책을 맡은 상인들이 가장 골치 아픈 존재라서 일본인들이 사농공상 개념을 둔갑시키고‘부보상’명칭도 거꾸로 불렀다.

당시 서울의 주요 전통상인은 천하지도 무식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근대화기업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익승(金益昇)은 판사출신이다. 1889년부터 해운업, 기선회사, 철도건설회사, 건축업, 해산물운수업 등 경제계의 팔방미인으로 불렸다. 한약 건재약방에서 일하다 15세의 나이에 청심보명단(淸心保命丹)을 개발해 거부가 된 이경봉(李庚鳳), 구두쇠지만 누명을 쓴 청나라 사형수에게 어진 덕을 베풀어 큰 부자가 된 이덕유(李德裕), 1906년에 한국 최초의 민간은행인 한일은행을  설립한 조병택(趙秉澤)도 청일전쟁 때 일본군을 상대로 수십만 장자가 되어 가능했다. 무일푼의 광산기사에서 총명한 상술로 입신한 최남(崔楠)은 3.1운동 당시 국산품애용 운동에 편승, 철저한 정찰제(定札制)로 성공해 서울 종로에 최초로 동아백화점을 개점했다. 변화에 능숙한 상업계의 총명한 개척자였다.

이 같은 상인들의 공통점은 돈보다 먼저 사람을 생각했고 거부가 되었어도 분수를 차렸다. 그들의 바탕에는‘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삶의 살이(살림살이)를 잘하는 홍익정신이 있었다.

해방 후 동족상잔으로 가장 못사는 나라에서 경제 대국 10위를 넘보고, 성공한 국가순위에서 25위를 한 대한민국! 여러 난관을 감안하면 굉장한 발전이다. 두뇌강국에 걸맞게 평균 지능지수(I.Q)도 세계 최고로 우수하다. 그럼에도, 현실은 서양문화가 훨씬 우월하다는 생각에 그 문화를 따라 하기 바쁘다. 물론 필자도 서양 경영학으로 일찍이 박사학위를 땄지만, 우리 학문에 식민주의·사대주의가 만연하다는 것을 자각했다. 이에 우리 전통문화와 전통경영의 흔적을 향약(鄕約)의 ‘영가제인(營家濟人)’이란 글에서 근거를 찾아 전통(동이)경영학을 정립할 수 있었다. 서양경영학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경제운영이 목적이다. 이윤목적이 아닌, 가정이나 교회 등의 경영은 하위개념에 넣고 있다. 반면, 우리 전통경영은 실로 개인으로부터 가정, 집단, 국가, 우주까지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경영학이라 할 수 있다. 그 뿌리는 우리의 고유한 정신체계에서 나온다. 우리 사회에서 나는‘我(아)’란 씨앗에 호흡을 주고 생명을 부여한 부모와 가족이란 울타리의 가정, 그 가정들이 모인 국가, 국가들이 모인 세계, 세계가 모인 우주가 있어 ‘나’란 존재는 우주와 뗄 수 없는 관계인‘소우주’라고도 한다. 따라서 그 소우주에는 대대손손 압축된 모든 것이 존재한, 우주의 분신으로 인식한다. 그렇게 존귀한 나(我), 진정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바로 전통이다.‘경영’은 경제운영을 줄인 말로 ‘경제’는 벌어서 쓰기,‘운영’은 살기 즉 경영이란 잘 벌어서 잘 쓰고 잘 사는 삶이다. 1518년에 김한구 선생이‘經營’의 뜻을 한글로 ‘이르살      이를 도     며~’라고 설명해 놓았다. 지금 말로 하면 ‘살림을 이루다’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미 경영학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밥상 앞에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일러주신 까닭이다. 수신(修身)은 나를 경영하는 것이고 가정은 집안 살림살이(齊家)이고 국가나 민족은 나라 살림(治國), 전 세계는 두루두루 잘 지내면(平天下)되고 우주는 서로 잘 통하면(通 宇宙)되는 것으로 구분된다. 더 세분하면 나와 가정사이에 마음경영이나 가정과 국가사이의 사회에서 직업경영도 있다. 여기에서 修와 齊, 治, 平은 모두 ‘경영하다’란 의미이니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경영학이다.서양학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영리 경제의 경영 실체는 당연히 상인(商人)이다. 상(商)은 言+內(門+人)로서 생산자나 소비자의 속마음을 헤아린다는 의미다. 속마음을 헤아려 풍찬노숙(風餐露宿)과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는 괴로움을 감당하면서도 좋은 품질과 가격의 제품을 공급하고 경제 흐름의 교량역할을 수행했다.그럼에도,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지배계층이 무사(武士)고 상인을 최 하층민으로 폄하했던 일본인의 인식이 식민통치 때 오염된 때문이다. 조선의 사농공상(士農工商)은 신분의 귀천이 아니라 백성의 직업을  단순히 구분한 명칭으로 율곡, 다산 등 많은 학자가 고증하고 있다. 다만, 농 공 상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독서삼매에 쉽게 적응하기 어려워 선비를 예우한 것일 뿐, 산업발생순서에 따른 것이다. 상인을 이르는 ‘보부상(褓負商)’도 원래는‘부보상’이었다. 일제 때 비밀 연락책을 맡은 상인들이 가장 골치 아픈 존재라서 일본인들이 사농공상 개념을 둔갑시키고‘부보상’명칭도 거꾸로 불렀다. 당시 서울의 주요 전통상인은 천하지도 무식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근대화기업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익승(金益昇)은 판사출신이다. 1889년부터 해운업, 기선회사, 철도건설회사, 건축업, 해산물운수업 등 경제계의 팔방미인으로 불렸다. 한약 건재약방에서 일하다 15세의 나이에 청심보명단(淸心保命丹)을 개발해 거부가 된 이경봉(李庚鳳), 구두쇠지만 누명을 쓴 청나라 사형수에게 어진 덕을 베풀어 큰 부자가 된 이덕유(李德裕), 1906년에 한국 최초의 민간은행인 한일은행을  설립한 조병택(趙秉澤)도 청일전쟁 때 일본군을 상대로 수십만 장자가 되어 가능했다. 무일푼의 광산기사에서 총명한 상술로 입신한 최남(崔楠)은 3.1운동 당시 국산품애용 운동에 편승, 철저한 정찰제(定札制)로 성공해 서울 종로에 최초로 동아백화점을 개점했다. 변화에 능숙한 상업계의 총명한 개척자였다.이 같은 상인들의 공통점은 돈보다 먼저 사람을 생각했고 거부가 되었어도 분수를 차렸다. 그들의 바탕에는‘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삶의 살이(살림살이)를 잘하는 홍익정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