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회옥 지음 《한 번은 불러보았다》(위즈덤하우스, 2022)는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우리의 민낯을 보여준다. 다소 생소할 ‘인종주의자’의 모습이다.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 대한민국”이라고 믿었다면 그건 최면에 빠졌기 때문이다.‘인종차별 없는 대한민국’이라는 집단 최면을 깨뜨리기 위해, 저자는 그 뿌리 깊은 역사를 파헤친다. 

정회옥 지음 "한 번은 불러보았다"  [사진 정유철 기자]
정회옥 지음 "한 번은 불러보았다" [사진 정유철 기자]

우리는 어쩌다 인종주의자가 되어버렸을까? 저자 정회옥(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은 《한 번은 불러보았다》에서 개화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 경제성장기, 세계화 시대, K의 시대 등 근현대사의 주요 분기를 거치며 한국만의 ‘특별한’ 인종주의가 만들어져 왔음을 밝힌다.

“한국인에게 ‘인종’관념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은 1876년 개항 이후다. 당시 조선 사회는 백인 중심적이고 비非백인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서구의 위계적 인종 관념을 진지한 성찰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한국식 인종주의의 첫 단추였다. 어쩌면 우리는 첫 단추를 너무 서둘러서 끼우느라 옷매무새가 틀어진 탓에 인종차별적인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저자는《독립신문》 같은 근대 초기의 신문부터 박정희, 김영삼 등의 대통령 훈화 말씀 그리고 최근의 유튜브 국뽕 채널까지 다양한 문헌과 매체, 인터뷰와 통계를 분석해, ‘한국식 인종주의’의 형성 과정을 추적한다.

이 땅에서 인종주의는 식민주의, 민족주의, 순혈주의, 반공주의, 발전주의, 우월주의 등 시대별 지배 담론과 얽히고설키며 끈질기게 생명을 연장해 왔다. ‘흑형’, ‘짱깨’, ‘튀기’, ‘똥남아’, ‘개슬람’ 등 우리 모두가 한 번은 불러보았을, 또 들어보았을 수많은 멸칭이 탄생한 배경이다.

저자는 ‘짱깨’를 지배당하는 자의 열등감이 촉발한 중국인 혐오라고 설명한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은 ‘야만 인종론’ ‘망국민론’을 교육받으며 식민주의를 내면화했다. 한국인의 민족주의는 이에 대한 ‘저항 심리’이자, (일본처럼)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다는 ‘모방 심리’로서 탄생했는데 그 대상으로 눈에 띈 것이 중국인이었다.

계기는 1931년 만주에서 한국인과 중국인 소작농들이 충돌한 ‘완바오산 사건’이었다. 이것이 ‘중국인이 한국인을 핍박한다’는 식으로 와전되어 전해지자, 곧 “갓난아이부터 노인까지 당시 조선에 살던 많은 중국인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하는 유례없는 제노사이드(집단 학살)가 벌어졌다.” 그 결과 200여 명의 중국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차이나타운이 없는 유일한 나라’로 불릴 정도로, 한국은 법과 제도를 동원해 체계적으로 중국인을 차별해 왔다.

그러한 역사 속에서 탄생한 멸칭이 ‘짱깨’로, 이는 ‘국민음식’임을 자부하는 짜장면의 별칭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와 수천 년간 관계 맺은 이웃 민족(중국인)이자, 심지어 동포(조선족)인데도 차별하는 이중성을 잘 반영한다. 인종적으로 차이가 없고 역사를 공유하지만, 민족적·문화적 차이와 상충하는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는 것. 이는 ‘인종 없는 인종주의’라는 한국식 인종주의의 또 다른 특징이다.

정회옥 지음 "한 번은 불러보았다" [사진 정유철 기자]
정회옥 지음 "한 번은 불러보았다" [사진 정유철 기자]

혼혈인 혐오는 ‘튀기’라는 용어로 대표된다. 튀기는 ‘종이 다른 두 동물 사이에서 난 새끼’라는 뜻이니 지독하다. 혼혈인 혐오가 오늘날 다문화 가족 혐오, 결혼 이주자 혐오 등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피 한 방울의 다름조차 인정하지 않는 한국식 인종주의의 특징이 엿보인다.

비슷한 멸칭으로 ‘똥남아’가 있다. 가난한 동남아시아인은 더럽기까지 하다는 뜻으로, 차별의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베트남 현지에서 유행하는 한국어 교재 내용을 보면 “함부로 때리면 안 돼요” 등의 표현이 담겨 있다. 경제력으로 인종의 귀천을 가르는 한국식 인종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비슷한 내용의 한국어 교재가 더욱 많아질 것이다.

“우리나라는 저임금 노동과 수출 지향적인 산업화 정책으로 불과 몇십 년 만에 기적과 같은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그리고 오늘날 K-컬쳐와 K-방역 등의 성공으로 ‘선진국’이 되었다는 자부심이 전례 없이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그간의 설움을 보상받고 싶고, 오늘날의 성취를 인정받고 싶은 과잉된 욕망이 ‘후진국’ 출신 사람들에 대한 선민의식과 우월감을 낳고 많았다. 사실 각 민족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쳤는지의 문제일 뿐, 우열을 가릴 문제가 아닌데도 말이다.”

한국식 인종주의는 피부색과 민족, 경제력과 신앙 등 다양한 차별 기재를 능숙하게, 또 섬세하게 다룬다. 지난 150년의 근현대사를 지나며 이는 ‘마음의 습관’이라 할 정도로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저자는 이를 ‘혐오의 회로판’이라고 설명하는데, 어떤 상황에서든 그에 ‘알맞은’ 인종주의가 자동적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150여 년 전부터 지독한 인종주의자였다. 식민 지배의 경험을 통해 ‘민족’이라는 전통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관용’과 ‘환대’의 전통을 만들 차례이다. 타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다행히 “타자를 더욱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식 인종주의가 형성된 연원을 살펴보면, 그것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별다른 노력 없이 스며들었다. 바꿔 말하면 인종주의를 우리 땅에서 없애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이 책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이 타자에게 당한 차별의 역사를 다시 한번 돌아봄으로써, 현재 우리 안의 타자들을 다른 시각에게 바라볼 계기가 되고자 한다. 즉 우리 역사의 아픈 기억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왜 인종주의자가 되었는지, 또는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시도는 현재의 우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인 동시에 상대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뿌리 깊은 한국식 인종주의의 역사를 뛰어넘기 위해 저자는 ‘시민적 민족주의’를 제시한다. 혈통이나 문화적 유사성, 경제력 등을 기준으로 ‘순수한’ 한국인을 골라낸다면, 과연 몇 명이나 해당될까. 그보다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며 역사와 경험을 공유하는 일 자체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누구든지 이곳에서 함께 살며 같은 경험과 역사를 공유한다면 모두 우리 민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정말로 우리는 모두 다 사람”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명제에서 인종주의 논의는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