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경계없는 삶이란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요? 세계의 전통문화 속에 내려오는 풍습을 통해 서로를 위하며 더불어 함께하는 미래문화의 가능성을 살펴봅니다.

벌써 ‘김장’ ‘김장물가’에 관한 뉴스가 나오고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1인 가구가 늘고 생활환경이 변화하면서 김치를 사서 먹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한국인에게 겨울철을 앞두고 김장김치를 함께 담그는 일은 하나의 연례행사처럼 오랜 세월 이어왔다.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김치를 담고 나누는 김장 문화'. 요즘은 대규모로 개인이 김장을 하는 경우는 드물고 함께 모여 김장을 담가 홀로 사는 어르신이나 저소득층 이웃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 문화재청]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김치를 담고 나누는 김장 문화'. 요즘은 대규모로 개인이 김장을 하는 경우는 드물고 함께 모여 김장을 담가 홀로 사는 어르신이나 저소득층 이웃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 문화재청]

농촌은 물론 도심에서도 집집마다 100포기 이상 김장을 하던 때가 있었다. 당시에는 곳곳에 별도의 김장시장이 열렸고, 회사에서는 의례 ‘김장보너스’를 지급하곤 했다.

그런 김장 날의 아침은 매우 부산스러웠다. 소금에 절여둔 배추를 씻고 김치소를 준비해 이웃들과 둘러앉아 왁자지껄 떠들썩하니 웃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그 많은 양의 김장이 완성되었다.

봄동, 깍두기, 물김치, 열무김치, 얼갈이김치, 갓김치, 고들빼기김치 등 사시사철 다양한 김치를 먹지만 겨우내 우리 밥상의 양식이 되는 김장김치는 특별했다. 좀 더 깊은 맛을 내는 풍성한 재료가 들어간다. 저마다 익숙한 고향의 방식대로 젓갈도 다르고, 청각이나 조기, 갈치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했다.

(위) 20세기 중반 도심 곳곳에 열린 김장시장. [사진 뮤지엄 김치간]
(위) 20세기 후반 도심 곳곳에 열린 김장시장. (아래) 1930년대 가정집의 김장 담그는 날 [사진 뮤지엄 김치간, 강나리 기자]

이렇게 담은 김장김치는 멀리 타지에 사는 가족이나 친척에게 보내고, 그릇에 한가득 담아 이웃과 나눴다. 전국 팔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는 김장철이면 제각기 다른 맛이 나는 김치를 실컷 먹을 수 있었다.

한편, 김장을 마치면 수육과 같은 곁들임 음식과 함께 갓 담은 김장김치를 모두가 그 자리에서 맛보는 흥겹고 배부른 잔치가 열렸다. 그래서 김장 날 아이들은 또 하나의 명절 마냥 설렜다.

2013년 우리나라의 ‘김장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Kimjang: Making and Sharing kimchi)는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멕시코 전통요리, 프랑스의 미식(美食)문화, 터키의 전통 의식 요리-케슈케크, 고대 조지아의 전통 크베브리 와인 양조법, 지중해식 식문화, 일본의 신년 축하를 위한 전통 식문화-와쇼쿠(和食), 아르메니아의 전통 발효빵-라바쉬, 벨기에 맥주문화와 함께 지금까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10대 요리문화이다.

동절기에 대비한 한국인들의 나눔과 공동체 문화를 상징하며, 사회구성원들 간 결속과 연대감 강화를 통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김장은 어느 특정 국가 또는 민족의 유산을 떠나 인류가 공동으로 보호해야 할 가치 있는 중요한 유산임을 증명한 것이다.

김장은 춥고 긴 겨울을 나기 위해 많은 양의 김치를 담그는 것으로, 오랫동안 상하지 않게 장독에 보관하는 과정까지 많은 사람이 해야 하는 노동이기에 품앗이로 이루어졌다. [사진 Pixabay 이미지]
김장은 춥고 긴 겨울을 나기 위해 많은 양의 김치를 담그는 것으로, 오랫동안 상하지 않게 장독에 보관하는 과정까지 많은 사람이 해야 하는 노동이기에 품앗이로 이루어졌다. [사진 Pixabay 이미지]

김장은 한민족의 고유한 공동체 문화 중 하나인 ’품앗이‘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여기서 ‘품’은 노동력을 뜻하고 ‘앗이’는 갚는 것을 뜻한다. 베풂과 받은 베풂을 보상하는 것인데 단순한 노동력의 교환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정서의 연대라는 성격이 컸다.

품앗이를 하던 선조들의 정서를 잘 나타낸 노래가 있다.

“오늘은 자네 콩밭 호미로 김매고 / 내일은 우리 밭을 김매자! /오늘은 자네 수수를 베고, / 내일은 우리 오이를 따자! / 오늘 내 부지런히 일했으니/ 내일 자네도 게으름 피지 말게나. / 자네 밭이 황폐하니 먼저 함이 옳고 우리 싹이 어리니 조금 늦게 하자. / 묻노라! 한양사는 놈들 / 무슨 일로 밤낮 싸움이나 하는지.”

조선 후기 정조 때 실학자 이송이 농촌에서 널리 불리던 품앗이 노동요를 적은 것으로, 서로 일거리를 주고받고 양보하며 상부상조하던 풍속을 엿볼 수 있다.

품앗이는 친척, 이웃 등 가까운 사람끼리 소소하게 끼리끼리 하며, 모내기, 밭매기, 벼 베기, 초가지붕 잇기, 김장, 방아 찧기 등 다양한 일거리에 대해 일시적‧임의적으로 이루어졌고, 품을 곧바로 반드시 갚아야 하는 의무 관계가 아니었다.

반면, 한국 공동체 문화의 상징인 ‘두레’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덤벼서 하는 일로,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주로 논농사를 공동으로 지어주는 공동노동 조직이었다. 품앗이보다 규모가 크고 전체적이며 의무적인 성격이 강했다.

신라 유리이사금(서기 57년 경)시기 두레길쌈이 이미 일반화했다고 하니 역사가 오래되었다. 두레의 가장 큰 특징은 풍물굿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농기와 영기를 앞세우고 꽹과리, 징, 북, 장고, 소고 등을 든 두레패들이 흥을 돋우었다. 일과 놀이가 어우러져 신명을 통해 강도 높은 노동의 고통을 극복하고 능률을 극대화했다. 또한, ‘들밥’이라고 하여 논두렁에서 함께 식사하며 피로를 풀고 일과 휴식을 조절했다.

이처럼 각자가 감당하기 어렵거나 고단하고 힘겨운 노동을 즐겁게 하면서 삶을 윤택하게 하는 풍요로움을 얻어 함께 나누는 우리 선조의 지혜가 두레이고 품앗이이었다.

(위) 우리 선조는 두레를 할 때 반드시 두레패의 풍물굿으로 흥을 돋우어 일과 휴식을 조절했다. (아래) 들밥. 숲그늘에서 들밥을 먹는 모습. [사진 두레, 농민의 역사]
(위) 우리 선조는 두레를 할 때 반드시 두레패의 풍물굿으로 흥을 돋우어 일과 휴식을 조절했다. (아래) 들밥. 숲그늘에서 들밥을 먹는 모습. [사진 두레, 농민의 역사]

우리가 사는 현재, 21세에는 저마다 생산기반도 다르고 먹고사는 일도 세분화되어 있으며, 셈법도 달라졌다. 다른 이의 노동력을 얻으려면 합당한 대가, 즉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면 두레나 품앗이가 설 자리가 있을까?

혼자나 소수, 한 국가만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미래학자들은 끊임없는 밀려오는 코로나19 파도처럼 수많은 신종감염병이 계속 인류를 덮칠 것이라고 예고한다.

우리가 경험했듯 국경과 도시를 폐쇄하고 시민들을 거리에 나서지 못하도록 했어도 바이러스는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서둘러 백신을 개발하고 한 국가의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면역체계를 갖춰도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국가까지 해결되지 않으면 계속되는 변이로 인해 그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계적 대유행 혼란과 공포 속에서도 자가격리 중인 이웃에 식료품과 생필품을 나누고, 적지만 자신이 가진 마스크와 손 소독제를 나누는 소소하고 따뜻한 뉴스에 사람들은 기꺼이 동참하고자 선한 의지를 냈고, 그것이 희망이 되었다.

21세기 신종감염병 침공의 근본적인 원인인 생태계 파괴와 지구환경 오염을 막지 못한다면 인류는 유일한 생존 터전인 지구를 지켜내지 못할 수도 있다. 함께 한다면, 연대한다면 인류는 예견된 재앙을 막아내고 분열과 대립으로 끊임없이 진보와 후퇴를 반복하는 굴레에서 벗어나 인류의 역사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