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경계없는 삶이란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요? 세계의 전통 문화 속에 내려오는 풍습을 통해 서로를 위하며 더불어 함께하는 미래문화의 가능성을 살펴봅니다.

천혜의 자연풍광과 선사시대 이래로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이루어 온 제주도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수많은 사람이 가고 싶고 살고 싶은 곳을 손꼽는다. 하지만, 불과 70~80년 전 만해도 이 섬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제주 사람들에게는 혹독한 환경이었다.

제주 사람들은 오랜 화산 폭발과 태풍, 풍랑 등 혹독한 자연환경과 척박한 토양을 이겨내고 독특한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제주 사람들은 오랜 화산 폭발과 태풍, 풍랑 등 혹독한 자연환경과 척박한 토양으로 인한 가난 속에서도 독특한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오랜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지역이라 제주인이 삶의 양식을 얻는데 힘겨운 노동이 요구되었다. 토양은 화산회토로 돌이 많고 물이 땅속으로 쉽게 스며들어 물이 귀했기 때문에 밭작물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토질이 척박해 생산성도 낮았다. 중산간 마을 사람들은 남녀 누구나 힘든 밭농사 일에 목축업을 겸해야 했고, 해안가 마을 사람들은 밭농사만으로 살아갈 수 없어 여자들은 해녀 일을, 남자들은 어업을 병행해야만 살 수 있었다.

아울러, 제주는 역사 속에서 수탈과 환란, 고통이 그치지 않은 절해고도였다. 옛 탐라국으로 불리던 제주는 신라 때 부속국이 되어 특산물을 바치기 시작했고, 고려 때 삼별초의 항쟁 이후에는 대략 80여 년 동안 수 차례 고려와 원나라를 번갈아 가며 귀속되면서 양국에서 이중세금과 핍박으로 시달렸다. 조선 시대 중앙정부와 먼 제주에서 탐관오리는 전횡을 일삼았고, 혹독한 징세와 수탈을 견디다 못해 남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민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시계방향으로) 제주시 조천읍 '너븐숭이 4.3 기념관', 제주 4.3 사건을 30년 만에 세상에 알린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 기념탑, '순이삼촌'의 한 대목, 너븐숭이 4.3 기념관 내에 희생자 이름들. [사진 강나리 기자]
(시계방향으로) 제주시 조천읍 '너븐숭이 4.3 기념관', 제주 4.3 사건을 30년 만에 세상에 알린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 기념탑, '순이삼촌'의 한 대목, 너븐숭이 4.3 기념관 내에 희생자 이름들. [사진 강나리 기자]

제주의 근현대사 역시 어두웠다. 일제에 의해 36년간 착취와 약탈을 겪은 후 맞은 해방이었으나 1948년 4.3항쟁으로 제주도 전 지역이 초토화되고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이러한 혹독하고 척박한 환경과 오랜 역사적 시련을 겪어내며 제주인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들은 서로 돕고 협업하는 ‘더불어 사는 삶’을 통해 치열하게 극복했다.

공동목장, 공동어장, 공동캐왓, 공동샘물을 운영하며, 큰 부자도, 매우 가난한 사람도 드물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별도 덜해 대체로 평등한 삶을 살았다. 또한, 남녀 차별보다는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를 인정하고 존중했고, 조선의 유교적인 남성 중심, 장남 중심의 가계 계승문화도 제주에서는 덜했다.

그리고 이런 생활방식을 통해 궨당과 수눌음, 삼무(三無)와 같은 제주인만의 독특한 풍속과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냈다.

제주인의 공동체 삶 속에서 궨당, 수눌음, 삼무정신이 생겨났다. [사진 강나리 기자, 우리소리박물관]
제주인의 공동체 삶 속에서 궨당, 수눌음, 삼무정신이 생겨났다. [사진 강나리 기자, 우리소리박물관]

제주 사람들은 조금만 안면이 있어도 “사돈에 팔촌으로 걸린 궨당”이라는 말을 즐겨했고, “마을 내에 매놈(완전한 남)이 없다”고 했다. 같은 촌락이나 인접 촌락 내 혼인이 중심이 되다 보니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모두가 친척이라는 의미로, 부계 친척뿐 아니라 외가 친척, 처가 친척까지 포함해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혈연 중심의 공동체를 넘어서 훨씬 느슨한 형태의 생존공동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주에는 이웃 혹은 부락 내 어른들을 ‘삼촌’이라 부르며, 힘든 일이나 큰일이 생기면 서로 나서서 자기 집안일처럼 돕는 수눌음을 했다. 궨당 풍습 중 하나를 소개하면 장례 때 돌아가신 이의 사돈이 반드시 죽을 쑤어와 상주 가족이 먹도록 했다. 일상식은 빈부 차이 없이 소박한 밥상으로, 밥은 낭푸니(큰 두레반)나 차통에 공동으로 떠먹고 국은 개인별로 먹었다. 때로 수눌어 공동노동을 한 날이나 제사, 명절 등에는 한층 더 좋은 특식을 준비했는데 이때 반드시 이웃과 나누어 먹는 공식(共食)문화, 즉 반 태움의 문화가 발달했다.

제주의 수눌음은 두레나 품앗이와 같이 서로 노동을 교환하는 일이다. 그러나 두레가 촌락공동체의 공동노동으로 마을 구성원에게 부여된 의무였다면, 수눌음은 자발성을 띄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친밀한 이웃 간 상부상조하는 비타산적인 노동 교환이란 점에서 품앗이와 수눌음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수눌음은 농사일뿐 아니라 집을 짓고 지붕 이엉을 잇거나 하는 생활문제나 마을의 힘든 일에도 노동력을 나누고, 상여계, 목장계, 잠수계 등 다양한 계를 통해 물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등 넉넉하지 못했던 제주인들에게는 합리적인 생존방식이었다.

약 4,300여년 전 제주도의 시조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삼신인(三神人)이 태어났다는 삼성혈 유적. [사진 강나리 기자]
약 4,300여년 전 제주도의 시조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삼신인(三神人)이 태어났다는 삼성혈 유적. [사진 강나리 기자]

한편, 돌하르방처럼 꿋꿋하고 강인한 제주인들이 오랜 세월 동안 겪어 온 생활 경험과 생활방식을 토대로 하여 형성된 고유한 자질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삼무(三無)정신이다.

삼무는 도무(盜無), 걸무(乞無), 문무(門無) 3가지를 말하며, 제주에 도둑과 거지, 대문이 없다는 것이다. 첫째, 도둑이 없다는 것은 노동의 댓가 없이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정직하고 순박하며, 성실하고 분수와 본분을 지키는 제주인의 품성을 가리킨다.

둘째, 거지가 없다는 것은 남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일어서려는 강인하고 자주적이며 자립적인 생활 양식이 뿌리 깊게 내려져 있다는 것이다. 근면하고 검소하며 한편으로는 포용하여 함께 살아가는 복지가 이루어진다는 뜻도 될 것이다.

셋째, 문이 없다는 것은 서로 깊은 신뢰와 여유 속에 평화롭게 살아가는 제주인의 모습을 의미한다. 아직 제주의 시골에서 때때로 대문을 대신해 정낭을 집 앞 양쪽 돌판에 만들어진 3개의 구멍에 긴 나무를 걸쳐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무 세 개가 다 걸쳐 있으면 집안에 사람이 없음을 나타내고, 하나가 내려 있으면 주인이 잠시 외출 중이라는 의미이며, 두 개가 내려 있으면 집안에 사람이 있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서로 나누며 더불어 사는 삶이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제주의 삼무는 한민족의 건국 정신, 뿌리 철학인 ‘홍익정신’이 현실 사회에서 스스로 존중하고 양심과 신뢰를 회복해 서로 돕는 공동체 문화가 실현된 구체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굴곡을 겪으며 빠르게 문화가 바뀐 육지와 달리 제주에는 우리의 옛 선도문화와 홍익정신이 더 잘 살아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