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대비운(大悲運) - 우리 선도는 7차례의 내분과 외세의 침입을 막아 쇠망의 큰 위기 극복

10년 전 지금은 고인이 된 이종학 초대 독도박물관장의 초청으로 그분의 자택에서 단군 관계 고서를 열람할 기회가 있었다. 그가 “아주 중요한 기록”이라며 책 한 권을 손수 펼쳐보여 준다. 「천부경」의 전래 경로를 면밀히 추적했던 일본강점기 비밀문서였다. 일제가 당시 또 다른 선도경전인 삼일신고와 혼동하면서 「천부경」의 발원지 묘향산을 답사해 남긴 한 장의 지도가 주목되었다. 아쉽게도 관장의 작고 뒤에 책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천부경」은 우리 역사의 시원과 함께 해왔으며, 삼라만상의 시종(始終)과 만법귀일(萬法歸一, 모든 것이 필경 한군데로 돌아감)의 철학을 설파한 한국 선도의 대표 경전이다. 일본이 캐내려 했던 ‘천부경 코드’는 무엇이었을까? 

한 말 백두산 도인들이 비밀리에 전하여 내려온 ‘오대종지서’를 보면, 우리 선도가 고대로부터 근대까지 7차례의 내분과 외세의 침입을 받아 쇠망의 큰 위기를 겪었는데 이를 ‘7회 대비운(大悲運)’이라 했다. 최초의 비운은 서기 전 1209년 단군조선 때 수도 천도 문제를 두고 삼천단부 내에 분열과 대립으로 단부의 일체감이 급속히 약화되었던 사건이다.

단군조선말에는 외래 사상과 문화가 들어와 단군의 정통이 흔들리는 두 번째 비운이 일어났다. 서기 전 232년 기자조선 말에 선도가 쇠퇴하여 서북 단부가 궤멸하고 동남 단부와 언어·풍속이 달라진 사건이 세 번째 비운이다. 네 번째 비운은 서기 전 108년 한(漢)나라의 침략으로 한사군이 설치되고 조선 영토가 유린당한 사건이다. 고구려 영류왕 이후 외래 종교가 퍼지고 보장왕 재위기에 이르러 당나라에 항거하던 뭇 사람들이 각지로 이주·해산된 사건을 다섯 번째 비운이라 했다.

이후 열국시대를 지나 발해와 신라 남북국으로 선도의 맥이 이어짐으로써 발흥기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금나라 시기 원나라의 침입으로 선도 제례가 끊기는 여섯 번째 비운을 겪었다. 또한 조선-청나라 말엽 만주에 제단 터만 황량하게 남게 된 사태를 일곱 번째 비운이라 일컫는다.

「삼일신고」는 발해 문왕 때 석함에 묻혀 천여 년간 잊혔다가, 1904년 3월 백두산 옛 제단 터에서 백봉 도인이 발굴함으로써 세상에 빛을 보았다. 고대의 「천부경」은 신라 석학 최치원을 통해 후세에 전해졌다. 한국 사람이 과학계에서 북방계와 남방계로 분류되는 것처럼, 선도 경전도 남북의 두 갈래 흐름이 있는 셈이다.

삼일신고는 근대 선도의 선각자 홍암 나철에게 전수되었고, 「천부경」은 단군교 영도자 정훈모에게 전래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1916년 평안도 사람인 계연수가 묘향산 석벽에서 「천부경」을 발견하고서 이를 탁본하여 이듬해 서울 단군교당에 보냈다. 윤효정이 이를 중국 북경 거주 사상가 전병훈에게 전하고, 그의 ‘정신철학통편’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최근 정훈모 선생의 유품에서 이미 1913년에 “천부경의 진리를 단전에 양정 수련해서 도력을 얻어 영적 감응이 통한 이에게는 특별히 신전에 고유하고 영고장을 수여 포상하겠노라.”고 써두었던 수첩도 발견되었다.

「천부경」은 우주 창조와 불멸의 원리를 81자에 담은 인류 보편 경전이다. 서지학(도서의 해제와 그 역사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문)적으로 고증되지 않는다고 단정할 것이 아니라, 오랜 시대와 축적된 사상이 응결된 것으로 이해하고 발굴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그러하기에 「천부경」에 대해 위서 운운했던 국학자 신채호도 나중에 자신의 입장을 뒤집어, 한국에는 위서가 없다고 고백하며 「천부경」을 변론했던 것이다.

일본과 중국은 자기 나라의 국학 부흥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나아가 한국 선도까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래 동북아시대를 조타하는 비밀이 「천부경」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스스로 단군과 「천부경」을 부정하여 ‘8회 비운’을 자초하지 않도록 깊이 관심을 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