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홍천의 산(山)은 그렇게 높지 않으나 급경사를 이루고 가파른 연봉(連峯)으로 이어져 사람으로 치면 아주 까다로운 성격을 띤다. 특히 팔봉산(八峯山)은 8개의 울뚝불뚝한 주름으로 이어져 등산하기 쉽지 않다. 이 산에 구미호라는 신화적 존재를 대입하여 구성한 전시가 열린다.

9월 17일(토)부터 10월 7일(금)까지 강원도 홍천중앙시장 2층 문화공간 분홍공장 분홍별관에서 열리는 전시 《산의 소리: 성적 트릭스터로서 구미호》(이하 《구미호》전)이 그것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남수 예술감독은 “홍천의 팔봉산을 하나의 중요한 상징으로 전제하고, 여기에 구미호라는 신화적 존재를 대입하여 전시의 주요한 서사로 구성하고자 했다”고 전시의도를 밝혔다.

구미호는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라고 흔히 이야기하지만, 실은 꼬리가 하나이고 그 하나의 꼬리가 아홉 가지 변신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이다. 팔봉산과 구미호 명칭에는 각각 숫자 8과 9가 들어 있다. 이번 전시는 팔봉산 여덟 개의 봉우리를 잇는 산소리를 내서 아홉 가지의 변화를 만드는 존재로서 구미호를 상정한 것이다. 8에서 9이 되기 위해서는 산 스스로 새벽에 내는 소리, 즉 산소리가 필요하다. 여전히 태고의 구미호로서의 복합적인 성격을 산이라는 자연의 의지 속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번 전시의 구미호는 ‘성적 트릭스터’이다. ‘트릭스터’는 서구의 중세 신화나 민담에 빈번히 등장하는 도덕과 관습을 어기고 교란하는 존재로, 주인공을 유혹하거나 시련을 겪게 하거나 하여 서사를 급변시키는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구미호는 일종의 성적 트릭스터로서 남성에게 최고의 쾌락을 약속하며 호리지만, 비밀스럽고 잔혹하게 그를 배신하는 존재이다. 이를 통해 공동체의 문화를 교란해 새롭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또한 김남수 예술감독은 구미호를 약주고 병주는 파르마콘(Pharmakon)적 존재로 상정한다. ‘신선’과 ‘요괴’라는 두 가지 얼굴을 가진 ‘약이자 독’이기도 한 존재인 것이다.

최수련, 無懼, 2022. 리넨에 유채, 130x163cm. [사진 본홍공장]
최수련, 無懼, 2022. 리넨에 유채, 130x163cm. [사진 본홍공장]

《구미호》전에 참여하는 양아치, 용해숙, 임영주, 임흥순, 최수련 다섯 명의 작가는 신화적 상상력과 접목하여 읽힐 수 있는 작업들을 선보인다.

먼저, 최수련 작가는 두 점의 회화 〈狐曰〉(2022), 〈無懼〉(2022)를 통해 구미호를 사람 호리는 요괴 대신에, 태고의 여산신(女山神)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최수련 작가는 동북아시아의 고전적 이미지가 동시대에 재현되는 양상을 관심 있게 지켜보며 그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것들을 회화로 옮겨오고 있다. 이는 문자와 이미지가 하나의 그림에서 경합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또한 작가는 〈망한 나라의 음악〉 작업 등에서 회화로서는 드문, 직접적인 각성의 감각을 추구해 왔다.

최수련, 狐曰, 2022. 종이에 수채, 흑연, 잉크, 각 29.7x21.1cm(9pcs). [사진 분홍공장]
최수련, 狐曰, 2022. 종이에 수채, 흑연, 잉크, 각 29.7x21.1cm(9pcs). [사진 분홍공장]

용해숙 작가의 〈뒤집기〉(2022)는 움직이는 설치 작업에 은근한 소리를 더한 작업이다. 이는 작가의 독일 친구와 독일 조카의 소리, 그리고 인터넷상에 유령처럼 떠도는 소리를 결합한 소리로, 호랑이 울음소리를 표현한다. 설치는 돌 위를 돌아가는 꼬리털이 매만지는 형식으로, 마치 이 울음에 가까워지려는 듯 돌을 매만지는 여우 꼬리 형상의 빗질의 소리가 더해진다.

임흥순, 산기운-사진앨범 부분, 2022  [사진 분홍공장]
임흥순, 산기운-사진앨범 부분, 2022 [사진 분홍공장]

임흥순 작가는 팔봉산 등정 과정의 자연 속에 드리운 잔영(殘影)을 엿보는 사진 작업 〈팔봉산-연작〉(2022)과 사진 앨범 〈산기운〉(2022)으로 참여한다. 이는 4.3 제주민주화운동의 여파 속에서 살았던 세 여인의 초상을 그린, 임흥순의 지난 다큐멘터리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2019)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의 무의식은 물속의 달그림자가 흡사 빛의 형상인 것처럼 두 개의 그림자의 빛, 곧 흰 그늘로 나타난다. 또한 세 여인의 초상은 팔봉산에 있는 삼부인당의 삼부인이 홀연히 연결되듯 나타난다.

임영주, 요석공주 Princess Yoseok, 2018. 3채널 비디오, 스테레오 사운드, 00:43:10. [사진 분홍공장]
임영주, 요석공주 Princess Yoseok, 2018. 3채널 비디오, 스테레오 사운드, 00:43:10. [사진 분홍공장]

 임영주 작가는 3채널 영상 작업 〈요석공주〉(2018)에서 《삼국유사》 권4 원효불기(元曉不羈)에 나오는 요석 공주에 주목한다. 〈요석공주〉에 나오는 두 갈래 길과 반 발짝 앞서서 손잡고 가는 긴 머리 여자는 까맣게 빛나는 ‘흑요석 거울’의 환시(幻視)와도 같다. 원효대사는 동이 트기 전, 이 환시 속에서 자루 없는 도끼로 ‘생명나무’를 찍으며 그와 관계 맺는다. 또한 〈요석공주〉에서 주요한 자연으로 등장하는 강과 물귀신을 연관 지어볼 수 있다. 물귀신은 이 두 갈래 길이 합쳐져서 생사고비와 길흉의 예지몽을 흩어놓는 존재로, 그 물귀신이 흐릿하게 호리는 형상이 물의 아름다운 내력인 셈이다. 작가는 이야기가 비유나 상징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어떤 믿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고, 떠도는 이야기를 모으고 종합하고 그 속에 욕망을 추적한다. 고전의 설화를 인터넷에 떠도는 ‘썰’과 비교하고, 그 유사성의 뿌리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양아치 작가의 사진 설치 작업 〈뼈와 살이 타는 밤〉은 어두운 밤길의 빛 속에 떠오르는 복숭아가 등장한다. 그 복숭아는 요기스러운 ‘근육’이 있는데, 이 과육의 근육은 실룩이는 구미호의 기호이다. ‘근육’이 실룩실룩 할 때마다 홀림과 함께 딴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열린다. 또한 복숭아는 사람 머리칼이 돋아나오는 기호로, 여기에는 식물에서 동물이 나온 ‘종간 여행’이 있다. 실제 작가는 밤에 산에서 돌연한 머리칼의 존재와 마주친 경험을 작품으로 옮겼으며, 이러한 존재는 죽고 나서 구근 작물로 환생하는 소녀 ‘하이누웰레’가 나오는 남방계 하이누웰레 신화를 연상시킨다.

양아치, 뼈와 살이 타는 밤 a Night of Burning Bone and Skin, 2014. 사진, 90x135cm. [사진 분홍공장]
양아치, 뼈와 살이 타는 밤 a Night of Burning Bone and Skin, 2014. 사진, 90x135cm. [사진 분홍공장]

매체와 성격이 다른 다섯 명의 작가는 전시를 준비하며, 모두 홍천의 팔봉산에 주목해 새롭게 작업을 만들거나 자신의 이전 작업을 재구성하는 시간을 보냈다.

김남수 예술감독은 작가들에게 팔봉산에 대한 해석의 관점을 열어주기 위해 양효실 미학자, 신범순 문학평론가, 히라이 토시하루 한양여대 교수, 현지예 작가, 양진호 철학자까지 다섯 명의 강연을 마련한 바 있다.

전시가 개막하는 9월 17일 오후 6시에는 분홍별관 야외에서 철학자 양진호가 여는 디제잉 퍼포먼스가 있다. “큰땅 한바퀴 나이테 타기”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이번 퍼포먼스는 전시와 연계된 곡목들이 소개될 예정이다.

양진호 철학자는 지난 7월 3일 중앙시장 옥상에서 〈릴리트, 마조히즘, 자연의 의지〉라는 전시 연계 강연을 준비하며, 전시에 대한 리서치를 진행한 바 있다. 

'산의 소리: 성적 트릭스터로서 구미호'  포스터 [포스터 분홍공장]
'산의 소리: 성적 트릭스터로서 구미호' 포스터 [포스터 분홍공장]

 

홍천의 자연과 지역, 이야기에 집중한 이번 전시 《구미호》를 통해 다양한 작가들이 펼치는 예술이 가진 잠재력과 지역에 관한 풍부한 해석의 관점을 확인해보는 기회이다.

홍천 굴운리에 있는 문화공간 분홍공장은 2014년 설립 이후, 지역민의 문화 활성화를 위해 홍천에서 다양한 문화 활동을 기획해 왔으며, 다양한 작가들의 홍천에 관한 리서치와 작업을 지원해 왔다. 또한, 작년 강원도 트리엔날레 참여 이후 분홍별관을 주로 전시를 여는 또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 운영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