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경계없는 삶이란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요? 세계의 전통 문화 속에 내려오는 풍습을 통해 서로를 위하며 더불어 함께하는 미래문화의 가능성을 살펴봅니다.

강원도 춘천 퇴계동의 한 교차로에서 6월 29일 좌회전하던 화물차의 오른쪽 화물칸 문이 열리면서 맥주병 2000여 개가 쏟아져 나왔다. 이를 본 시민 10여 명이 도로에 뛰어들어 빗자루로 유리 파편을 쓸고 맥주 박스를 정리하는 등 30여 분만에 도로가 깨끗해졌다. 청소를 마친 시민들은 이어 각자 흩어져갔다. 미국 abc NEWS가 이를 보도해 큰 화제가 되었다. abc NEWS는 깨진 병을 치운 시민들을 가리켜 ‘선한 사마리아인들’(Good Samaritans)이라고 했다.

abc NEWS에서 보듯이 서구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이들을 일러 흔히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이라고 한다. 사마리안인은 어떻게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되었을까?

먼저 사마리아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사마리아인은 옛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주위에 앗시리아인이 이주시킨 외국인 정착인들의 자손이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 5세가 사마리아에 쳐들어가 포위할 당시 B.C. 722년경 그의 동생 사르곤 2세가 왕위를 빼앗아 앗수르의 새 왕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마리아 성을 함락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앗수르는 사마리아를 함락한 후 그곳 사마리아인 2만 7천 명을 강제 이주시켜 민족 혼합 정책을 폈다. 이렇게 하여 사마리아인은 주위의 이방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순수 혈통을 유지해온 유대인은 이들 사마리아인을 천대하고 멸시하였다.

또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을 때 사마리아인들이 돕고자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거절했다. 이에 사마리아인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몹시 적대시하게 되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적대 관계는 성서에도 언급되어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 프란체스코 바사노 1575년 작. [사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선한 사마리아인. 프란체스코 바사노 1575년 작. [사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예수가 활동할 때에도 여전히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멸시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듯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 강도들을 만나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그를 피해 지나갔으나 오직 사마리아인만이 그를 불쌍히 여겨 상처를 치료해주고 주막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고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고 돌보아 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돈이 더 들면 돌아와서 갚겠다고 덧붙였다.

예수는 이 세 사람, 즉 제사장, 레위 사람, 사마리아인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묻고 너희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명한다.

오늘날 서구에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면 곤경에 처한 낯선 사람을 도와주거나 구해주는 사람을 뜻한다. 넓게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많은 사회일수록 사람들이 서로 도와 살기 좋은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선한 사마리아인법’을 제정하여 강제로라도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게 하려고 한다. 타인이 응급사항이나 위험에 처한 것을 알았을 때 이를 본 사람이 크게 위험하지 않을 경우에는 타인을 위험으로부터 구조해 줄 의무를 부여한 법률 조항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선한 사마리아인법’이 2008년 ‘응급 의료에 관한 법률’(응급의료법)의 일부 개정에 의해 간접 도입되었다.

인류는 어느 때보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필요하다. 특히 2019년 겨울부터 시작된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은 국가와 인종, 종교와 이념을 떠나서 우리 모두 다른 사람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코로나19는 국가를 불문하고 전파되었으며, 인종과 종교, 이념과는 아무 상관없이 인간을 위험에 빠지게 한 것을 인류는 지난 2년간 생생하게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에서 인류가 배워야 할 하나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