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춥지도 덥지도 않고 습하지도 않으며 곡식이 익기만 기다리면 되는 여유있는 절기에 맞이하는 추석. 음력 8월 보름을 추석(秋夕) 또는 가윗날, 한가위, 중추절이라고 한다. 설날과 한식, 단오와 함께 우리 민족의 4대 명절, 설날과 함께 2대 명절로 손꼽힌다.

한가위는 한민족의 고유명절로, 보름달이 잘 보여야 그 다음 해 농사가 풍작을 이룬다고 한다. [사진 Pixabay 이미지]
한가위는 한민족의 고유명절로, 보름달이 잘 보여야 그 다음 해 농사가 풍작을 이룬다고 한다. [사진 Pixabay 이미지]

우리 선조들은 언제부터 추석을 명절로 즐겼을까? 우리나라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3대 유리왕(儒理王)조에 나타난다.

“왕은 육부(六部)를 정한 후에 이를 두 패로 나누고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여, 7월 보름부터 매일 큰 부의 뜰에 모여 베를 짜게 하여, 을야(乙夜, 밤 10시)에 이르러서야 헤어지곤 하였다.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많고 적음을 가려 진 편에서는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에 사례를 했다. 모두 노래와 춤·놀이 등을 즐겼는데, 이를 가배(嘉俳)라 한다. 이 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서 춤을 추면서 탄식하되 '회소 회소'라고 하니, 그 소리가 애처롭고 아름다웠으므로 윗사람들이 그 소리를 따라 노래를 지어 회소곡(會蘇曲)이라 이름하였다.”

이 일화는 유리왕 9년(서기전 32)의 일이니 한민족에게 한가위는 2천 년 이전부터 즐겨온 명절인 셈이다.

신종원 한국학연구원 명예교수는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서 〈문화의 시대, 한중문화충돌〉에서 “풍속 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신라 개국 이전부터 내려온 명절이 사회가 변화‧발전함에 따라 형식과 내용 면에서 충실해졌다고 본다”라며 그 기원이 더 오래된 것으로 추정했다. 유물로는 전남 광주시 신창동 유적에서 기원전 1세기 전후의 길쌈을 할 때 쓰는 실감개와 바디 등 베틀 일체가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한민족은 한가위에 햇곡식과 햇과일로 술을 빚고 떡을 만들어 토란국에 오색 과일로 제사상을 차려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고 성묘를 해왔다. 새옷을 짓거나 입던 옷을 깨끗이 손질해 추석빔을 차려 입고 술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노래와 춤, 갖가지 놀이로 흥겹게 보냈다. 낮에는 길쌈놀이, 궁정의 활쏘기 등 겨루기를 하다 밤이 되면 즐거운 향연을 펼쳤다.

절기 음식으로는 《동국세시기》에서 송편과 시루떡, 인절미, 밤단자를 꼽았다. 그중 송편은 꿀송편, 밤송편, 깨송편, 콩송편, 대추송편, 쑥송편, 치자송편, 호박송편, 사과송편, 녹차송편 등 다양한데 강원도 감자송편을 비롯해 강릉의 무송편처럼 지역마다 특색있는 송편도 많다.

명절의 대표적인 특징으로는 첫째 해마다 일정한 날짜가 정해져 있고, 둘째 신분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모두 참여하며, 셋째 승패를 겨루는 경기가 있고, 넷째 이날 즐겨먹는 음식이 있으며, 다섯째, 이날을 부르는 고유한 이름이 있어야 한다. 한가위는 2천 년 넘는 한민족의 명절로서 다섯 가지 요소를 두루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정사(正史)도 신라의 한가위를 기록했다. 636년 《수서(隋書)》에는 “8월 15일 풍악을 울리고 관리들에게 활을 쏘게 하고 상으로 옷감이나 말을 주었다”고 기록했고, 659년 《북사(北史)》에도 같은 내용을 담았다. 10세기 《구당서(舊唐書)》에는 “8월 15일을 중시하여 풍악을 울리고 잔치를 베풀어 관리들을 위로하고 궁궐 마당에서 활을 쏜다”라고 했고, 11세기 《신당서(新唐書)》에는 “8월 보름에는 큰 잔치를 베풀고 관리들에게 활을 쏘게 한다”라고 기록했다. 그들이 보기에 추석은 가장 신라다운 명절이었다.

또한, 일본승려 엔닌(圓仁)는 당나라 순례를 갔다가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당나라에 머물던 신라인들의 8월 보름 풍속을 보고 ‘다른 나라에는 없고 신라에만 있는 풍습’이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중국 학자들 간에 추석의 기원에 대해 서로 논박을 하고 있다. 처음 중추절의 기원을 언급한 학자는 슝페이(熊飛)로, 1996년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인용해 당나라 중기이래 중국 시문에 8월 15일이 등장하는 것을 신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했다. 2003년 류더쩡(劉德增)은 “재당신라인들의 8월 15일 명절은 호속(胡俗)을 좋아하는 당나라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반면, 양린(楊琳)은 “당나라같이 세계적 강국이 소국 신라의 명절을 수용했을 리가 없다”며, 중국의 오랜 전통인 ‘추분제월(秋分祭月)’의 날짜를 8월 15일로 고정시켜 발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황타오(黃濤)는 슝페이와 류더쩡을 비판하며 직접 기원은 당나라 초기 달맞이 풍속에서 비롯되었고, 원래 한나라 때 달을 숭배하는 의례는 황실만의 특권이었다가 당대에 이르러 극소수 평민이 행사에 참여하면서 늘어났다는 것이다. 모든 문화는 중국에서 만들어 전파하였기 때문에 문화발명권은 중국에 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실제 중국의 중추절은 북송대에 와서야 보이고, 달을 완상(玩賞, 즐겨 구경함)하는 풍류가 거의 전부였다가 명대에 와서는 월병을 선물하는 풍습이 가미되었다. 신종원 명예교수는 “신라 추석은 국왕부터 서민이 모두 즐기는 명절로, 신라시대 명실상부한 2대 명절의 하나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명절이자 축제”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한가위 풍습과 중국의 중추절 풍습은 오랜 시간을 거쳐 각 민족이 서로 다른 기억과 문화, 풍습을 담아 오늘에 남긴 세시풍속이다. 기원과 원조 논란을 일으킬 것이 아니라 서로 닮음과 다름을 즐길 줄 아는 포용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