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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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대한민국은 주권을 되찾게 되었고 우리는 이를 광복절, 빛을 되찾은 날로 기념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광복절을 떠올리라면 수많은 인파들이 만세를 외치고 양손을 올리며 기뻐하는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밝고 희망적이기만 한 광복의 이미지 이면에 이제는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될 민족의 비극이 서려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암살이라는 영화에서 이정재가 배역을 맡은 염석진이 마지막 한 말은 그 시절의 실상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데 있어 이 이상 정확한 말은 없을 것이다. 아무도 8월 15일 광복을 맞게 될 거라는 것을 몰랐다. 심지어 우리의 주권을 훼손한 일본인들조차 일제의 결말이 이렇게 빠르고 허무하게 끝날 것이라는 것은 직전까지도 예상하지 못했다.

자국의 수많은 인명을 없앤 테러리스트들의 단죄와 이를 비호했던 탈레반 정부대신 민주적인 정권의 수립을 위해 20년간 주둔했던 미국이 동맹국과의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철군을 선언하자 아프가니스탄에는 대혼란이 일어났으며 이는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35년간 직접 통치를 한 일제가 하루아침에 연합군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한 당시의 상황은 그 이상의 혼돈 그 자체였을 것이다. 아무도 준비되지 않았으며 그 누구도 민족의 온전한 단합을 가져다 줄 명분이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광복 이후 자연스럽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권력을 이양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에 없었고 비밀 지하 독립운동단체의 리더였던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선생이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당시의 치안과 평화적인 권력이양을 담당했다. 결국 건국준비위원회는 한국으로의 복귀를 서두르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생각을 달리하여 분리되었고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지만 당시 백범 김구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의 견해 차이와 미군의 승인 거부로 해체되었고 3년 후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주권을 되찾았지만 주권으로 뭘 할지 몰랐던 혼돈의 시대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의 대립, 기존 기득권층의 생존을 위한 발버둥,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를 35년간 축적된 민중의 분노는 광복을 통해 문화강국으로 비상하고자 하는 민족 지도자들의 열망에 좌절을 안겨다 주었으며 길거리는 치안의 부재로 암살과 서로 다른 계파들 간의 폭력이 끊이지 않았다. 정부의 무력함, 무능함은 폭력, 범죄단체들의 난립을 가져왔으며 전쟁 이후까지도 조직폭력배들의 근절을 가져오지 못했다. 또한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이 시대의 혼란이 현재에도 극복하기 어려운 수많은 갈등의 씨앗을 뿌렸다는 것이다.

독립 직후 하나의 일화가 있다. 여운형 선생은 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었던 엔도 류사쿠와 해방에 대한 교섭을 논의한 후 8월 16일 조국의 해방에 대해 연설을 한다. 당시 그는 이전의 비극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마음으로 조국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만들며 세계 문화발전에 단결된 민족의 힘을 보탤 것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연설 도중 누군가가 소련군이 서울역에 온다고 소리를 쳤고 이로 인해 그의 연설은 중단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이는 사람들의 습격을 두려워한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전향자들을 동원해 벌인 공작이었다는 것이다.

글로벌 여론조사기관인 IPSOS에서 글로벌 28개국 2만 3천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사회갈등이 가장 심한 국가에 대한 결과에서 충격적인 데이터가 나왔다. 문화갈등, 민족갈등, 이정치 이념 갈등, 종교 갈등 등에서 한국은 많은 국가를 제치고 1등이나 2등을 기록했다. 심지어 종교 문제로 빈번하게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나라보다 종교 갈등이 심하며 최근 이민자 문제가 사회, 정치 이슈가 되고 있는 유럽의 많은 국가들보다 이민자 갈등이 심하다. 남녀갈등의 경우 페미니즘의 원조인 미국보다도 압도적으로 갈등이 심각하다는 결과가 나온다.

이러한 갈등은 사회적 구조의 모순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광복 이후 제대로 공동체 의식을 세우기 어려웠던 시대적 배경에서 나왔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인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혼란과 분열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집단이 존재해 왔었고 이를 위한 시도가 끊임없이 발생해 왔다는 것도 이제는 직시해야 한다.

현재 우리는 위태롭지만 세계사에서 주역으로서의 중요한 위치에 서있다. 근대 아시아의 역사에서 주목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유럽 식민주의 시대에서의 일본의 부상이었다. 우리에게는 비극이었지만 식민지배의 대상이었던 아시아에서 유럽과 견줄 정도의 근대화를 이루고 국제정세에 영향력을 행사한 일본의 성과는 냉철하게 보면 기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러한 일본도 국제질서와 문화권 형성에 대한 서양의 주도권에 어떠한 변화도 줄 수 없었다. 전후 제2위 경제 강국이 되며 소프트파워에 막대한 투자를 했던 80년대조차도 일본의 문화는 오리엔탈이라는 유럽 제국주의가 아시아에 각인한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두 번째의 근대 아시아 역사에서 주목할 일은 문화강국으로서의 한국의 부상이다. BTS, 오징어 게임뿐만 아니라 웹툰, 영화, 음반, 음식 등 수많은 범위에서 한류는 인터넷 강국으로서의 이점을 활용하여 SNS시대에서 그 어떤 아시아 국가도 얻지 못했던 소프트파워를 가지게 되었다. 이 현상에서 일본과 비교되는 가장 큰 변화는 전 세계가 우리의 문화를 그저 호기심에서 신기한 것을 보듯 거리를 두면서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같이 공감하고 감동하며 참여하는 성과를 이룩한 것이다. 우리는 근대사회에서 아시아 최초로 세계의 문화를 선도하며 변화를 이끄는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쾌거는 현재와 같은 사회적 갈등 속에서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이 하나의 공동체로서 상생과 공생의 문화를 형성하고 홍익을 위시한 한국 고유의 전통적 가치들이 그 누구보다도 우리 국민들에게 공감되고 실천되지 않는다면 한류는 80년대 홍콩의 영화산업이 그러했듯 단순히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 갈등 속에 수많은 강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다시금 분열과 갈등으로 20세기의 비극을 21세기에서도 재현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 누구도 한국에 큰 기회가 왔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광복과 함께 국민들에게 갈등과 반목을 가져온 혼돈의 망령에서 벗어날 때이다. 이번 광복절이 해방의 기쁨만이 아닌 우리의 분열의 뿌리를 돌아보며 그 허상을 직시하고 극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