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창건되어 고려 말과 조선 중기까지 왕실의 사랑을 받던 전국 최대 규모의 가람인 회암사(경기도 양주)의 사찰터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양주 회암사지 유적'(경기도 양주) 전경. [사진 문화재청]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양주 회암사지 유적'(경기도 양주) 전경. [사진 문화재청]

‘양주 회암사지 유적 (Archaeological Remains at the Hoeamsa Temple Site in Yangju City)’는 지난 2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고, 26일 세계유산센터 공식 홈페이지에 최종 게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번 등재까지 총 13건의 세계유산 잠정목록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유적은 현재 70여 동의 건물지가 확인된 중심사역과 부도, 석등, 비석 등 고승들의 기념물로 구성되어 있다. 유적의 가치와 관련해 첫째, 14세기 동아시아에 꽃핀 불교 선종 문화의 번영과 확산을 증명하는 탁월한 물적 증거인 점, 둘째, 불교 선종 수행 전통과 사원의 공간구성 체계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점이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 Universal Value)’로 제시되었다.

낮은 구릉이 있는 산간에 조영된 회암사는 명확한 창건 시기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으나 수차례 발굴조사로 고려 중기 이전에 창건되었다고 밝혀졌다. 고려 말 학자 목은 이색이 지은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 등에는 전국 최대 규모 가람으로 확장한 일화가 전한다.

1326년 3월 인도 출신의 원나라 승려 지공선사가 개경 감로사에 도착해 1328년 9월까지 전국의 사찰을 순례하다가 ‘회암사의 지형이 인도 아란타사(阿蘭陀寺)와 비슷해 가람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흥할 것’이라고 했고, 제자인 나옹이 크게 중창했다고 전한다.

나옹은 선각왕사 혜근(禪覺王師 惠勤, 1320~1376)으로 그가 회암사 전당 확장공사를 마쳤을 때 262칸의 전각이 있었다고 한다. 회암사가 크게 발전하자 유학자들은 백성이 회암사에 가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국왕에게 주청할 정도였는데 국왕은 나옹을 다른 사찰로 옮겨 주석하게 했다. 또한, 고려 왕실과 밀접한 관계인 원증국사 보우(圓證國師 普愚, 1301~1382)도 제자 무학대사와 함께 회암사를 중창했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 탑(왼쪽)과 쌍사자 석등. 회암사 중창에는 고려와 조선의 당대 최고 장인들이 동원되었다. [사진 문화재청]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 탑(왼쪽)과 쌍사자 석등. 회암사 중창에는 고려와 조선의 당대 최고 장인들이 동원되었다. [사진 문화재청]

회암사는 조선 왕실에서도 사랑받는 가람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서 물러나 스승이던 무학대사가 있는 회암사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불심이 깊던 효령대군(태종의 둘째아들)은 회암사 중창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성종실록》에는 1472년 조선 제7대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회암사를 크게 중창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또한, 승과를 실시해 불교의 중흥을 꾀했던 문정왕후(조선 11대 중종의 비)도 승려 보우(普雨)로 하여금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문정왕후 이후 불교계의 쇠퇴로 회암사도 쇠락하면서 서서히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997년 이후 발굴 조사과정에서 웅장했던 사찰의 규모와 위상을 보여주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석축이나 건물 배치 형식이 궁궐과 닮은 것으로 밝혀졌다. 당대 최고의 장인이 동원되어 조영되었음을 입증하는 유적과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한편, 양주 회암사지 유적과 함께 우리나라 세계유산 잠정목록에는 강진도요지, 설악산 천연보호구역, 남해안 일대 공룡화석지, 염전, 중부내륙산성군, 우포늪, 외암마을, 낙안읍성, 한양도성, 화순 운주사 석불석탑군, 가야고분군 등이 있다.

잠정목록은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유산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자료 축적을 통해 향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준비하는 제도로, 잠정목록에 등재된 후 최소 1년이 지나야 세계유산 등재신청 자격이 부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