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주 지음 "종이 위의 산책자" 앞 표지  [사진 구름의 시간]
양철주 지음 "종이 위의 산책자" 앞 표지 [사진 구름의 시간]

 

 

​양철주 저자의《종이 위의 산책자》(구름의 시간, 2022)는 ‘필사’에 바치는 사랑가, 필사 예찬송’이다. 저자가 수년간 필사하며 깨달은 필사의 힘을 생생하게 소개한다. 여기서 필사는 좋은 문장이나 마음에 드는 문장을 드문드문 배껴쓰는 것이 아니다. 책 전체를 죄다 공책에 적는다. 저자의 필사 방식은.

양철주 작가는 2015년 7월 18일 우연히 필사를 시작하여 이제 7년이 되었다. 그 동안 그가 필사한 책은 열 권이 넘는다. 필사에 도전한 첫 작품은 릴케의 《말테의 수기》(서울대출판부). 40일 만에 필사를 마쳤다.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까치), 몽테뉴, 《몽테뉴의 인생 에세이》(을유문화사), 보들레르, 《벌거벗은 내 마음》(문학과지성사),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민음사),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소와다리), 장 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에 관하여》(청하), 카뮈, 《결혼·여름》(책세상),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8》(민음사), 허먼 멤빌, 《모비 딕》(작가정신),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 시집》(문예출판사).

그가 필사한 책들이다. 이뿐만 아니라 “황동규와 허수경, 기형도와 나희덕을, 그리고 수많은 우리 시인들의 작품”을 연필로 필사했다. 그는 이를 “나의 필사는 편파와 편애의 한국현대시선집이 될 것이다”고 소개했다. 그가 필사하는 한 편의 시는 단순히 오래되기만 한 작품이 아니다. 가시밭길보다 거칠고 남극점보다 더 차갑고 냉혹한 시간을 헤치고 별빛처럼 그에게 온 것이다. “필사하는 사람은 자기만을 위한 것 같지만, 아무도 모르는 자기만의 골방에서 시작되고 끝날 뿐인 것 같지만, 더 큰 맥락에서는 한 작품의 불멸에 간여하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필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건 “필사는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는 필사를 통해 문장과, 작가의 정신과 사랑을 나눈다고 믿는다. 작가에게 나를 어떤 방식으로 사랑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내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어서 좋다는 것이다.

양철주 지음 "종이 위의 산책자" 앞 표지  [사진 구름의 시간]
양철주 지음 "종이 위의 산책자" 앞 표지 [사진 구름의 시간]

 

그는 날마다 필사를 하지만 쫓기지 않는다. 왜? 필사의 동기도, 추동력도 자신에게서 나오고, 마감 시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15분 정도의 여유만 있어도 카페로 들어가 자리잡고 필사 노트를 펼친다. 필사를 하다 그는 작품을 쓰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 적도 있었다.

이러니 필사가 주는 즐거움도 적지 않다. 저자는 필사가 즐거운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필사가 즐거운 이유는 아름답고 힘이 되는 문장을 내것으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만족감을 자주 느낄 수 있다면 축복이다. 이 정신적인 즐거움과 견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책이 나만을 위해만들어진 것 아니고, 문장이 나만을 위해 쓰인 것 아니고, 책이 한 권뿐인 것도 아니지만 그 문장이 내게 기쁨을 주는 순간 문장을 발견한 사람도 나 하나 읽은 사람도 나 하나, 기쁨을 느끼는 사람도 나 하나인 듯 행복감에 젖는다. 이 책은 오롯이 내 것이다. 나만을 위한 침묵, 나만을 위한 세계다.”

수년 간 여러 책을 필사하여 그런지 저자의 글은 참 아름답다. 이 글을 필사하고 싶어진다. 그러는 동안 저자가 느낀 바를 느껴보고 싶다. 이런 것 말이다.

“필사는 때로 기도하는 마음과 포개진다. 필사의 텍스트가 바이블일 때 필사는 하나의 자세가 된다. 필사와 산티아고의 순례길을 걷는 것이 완전히 같은 것일 수 없지만 필사하는 마음이 순례자의 마음과 다르다고 할 수는 없다. 멀리서 들려오던 말씀이, 그 음성이 더욱 가까워져 귓가에 속삭이는 듯 느껴질 수도 있다.”

외롭다고 느낄 때, 혼자라고 생각될 때 필사가 도움이 된다.

“필사하는 글에는 내 등을 쓸어 주는 따스한 손, 나를 응원해 주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한 응원에 힘을 얻으며 스스로 어려움에 맞설 마음을 가질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텍스트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된다. 내 진심은 무엇인지, 또 어떤 마음인지 스스로 돌아볼 수 있다. 이러면서 문제를 분명히 바라보고 맞서는 힘이 조금씩 생겨나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