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국학운동시민연합과 대구국학원은 7월 23일(토) 오후 2시 30분 국채보상운동기념관 2층에서 ‘제7회 팔공산 천제단 복원 학술대회—중악 팔공산 천제문화에서 답을 묻다’를 공동으로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천제문화의 의미 되새김질-삼도(대구, 인천, 태백) 중심으로’를 통하여 팔공산 천제문화를 강화도 마니산과 강원도 태백산의 천제문화와 비교·융합을 통해 위상을 재조명했다. 특히 마니산 참성단과 태백산 천제단의 천제 문화를 통하여 팔공산 천제 문화를 좀 더 심층적인 연구로 이끌어 전통문화로서의 의미를 조망하여 천제단 복원의 당위성을 논의했다.

대구국학운동시민연합과 대구국학원은 7월 23일(토) 오후 2시 30분 국채보상운동기념관 2층에서 ‘제7회 팔공산 천제단 복원 학술대회—중악 팔공산 천제문화에서 답을 묻다’를 공동으로 개최했다.  [사진 대구국학원]
대구국학운동시민연합과 대구국학원은 7월 23일(토) 오후 2시 30분 국채보상운동기념관 2층에서 ‘제7회 팔공산 천제단 복원 학술대회—중악 팔공산 천제문화에서 답을 묻다’를 공동으로 개최했다.  [사진 대구국학원]

이날 복기대 인하대학교 교수는 “참성단의 새로운 의미 고찰을 위하여”라는 논문에서 먼저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이 고려 초기부터 있었다”며 그 근거로 권근의 『양촌집』 기록을 들었다. 이 가운데 ‘참성(槧城)에 대한 초례의 청사’의 기록을 보면 “ 고려 초기에 이미 이곳에서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지금까지 참성단을 이해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사실로 본다. 이것은 이미 고려이전부터 이곳에서 단군을 제사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고려 태조 때 제단을 고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국가적으로 매우 중시되었던 곳으로 보인다”고 소개했다.

이어 복기대 교수는 “권근의 말처럼 늦어도 고려초기부터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 것으로 봐서는 그간의 주장, 즉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하여 단군애국주의를 만들었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또한 복기대 교수는 참성단의 기능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고려 황실의 개경 천도 이후 강화도는 배중손을 중심으로 하는 삼별초의 대몽항쟁의 의미를 갖는 지역으로 남아 당시 몽골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친원세력들로부터 좋은 인상은 주지 못하였을 것이고, 국가적인 중요 도는 크게 떨어졌을 것이다. 더구나 고려 말부터 유학자들이 득세를 하면서 단군이나 고조선에 대한 생각은 그 중요도가 점점 약화가 되었지 강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유학을 정치 이념으로 하는 조선이 건국되면서 참성단의 위상은 점점 약화되는 것이 현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 참성단의 관리를 서운관에서 하였고, 천문을 관측하기도 하면서 도교적인 초제를 지내 장소로도 쓰이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기 때문에 ‘槧城壇’에서 ‘塹星壇’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이름에 목적이 담긴 것이다. 참성단의 형태를 보면 경주 첨성대와 거의 같은 형태라고 한다.”

복기대 교수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참성단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단군에 대한 인식에도 큰 변화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군에 대한 제사를 중앙정부의 주관으로 황해도 궐산(구월산)에 있던 환인, 환웅, 단군 사당중 단군 사당을 지금의 평양으로 옮기고 기자와 같이 사당으로 지어놓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적으로 강화도 참성단이 큰 의미가 없어졌다”면서 “그런데 천문대로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천문 관측의 기준점은 지금의 경복궁인데, 경복궁에 천문 관측대를 설치하고 천문을 관측한 것이다. 그런데 경복궁 천문대는 천문관측을 하는데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경복궁 천문대에서 천문을 관측을 하는데, 그 값에 대한 보정은 강화도 참성단에 가서 해오라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또한 복기대 교수는 “왜 강화의 외딴섬에 단군의 제단을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대적으로 보면 고려 이전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왜 여기에 있을까 하는 것이다”며 “이 지역은 늦어도 3, 4세기부터는 백제의 영역이었다. 백제는 마한의 여 러 나라 중에 하나였던 ‘백제(伯濟)’가 훗날 ‘백제(百濟)’로 변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백제와 신라는 1년에 두 번씩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풍습이 이 강화도에서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을까 하는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 강화와 멀지 않은 지금의 황해도 안악에는 언제 세워졌는지 모르는 삼성사가 있는데 이 삼성사에도 단군 사당이 있었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대구국학운동시민연합과 대구국학원이 7월 23일(토) 국채보상운동기념관 2층에서 개최한  ‘제7회 팔공산 천제단 복원 학술대회—중악 팔공산 천제문화에서 답을 묻다’ 학술대회에 참석자들이 발표 내용을 경청하고 있다.  [사진 대구국학원]
대구국학운동시민연합과 대구국학원이 7월 23일(토) 국채보상운동기념관 2층에서 개최한 ‘제7회 팔공산 천제단 복원 학술대회—중악 팔공산 천제문화에서 답을 묻다’ 학술대회에 참석자들이 발표 내용을 경청하고 있다.  [사진 대구국학원]

김도현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은 “태백산 천제단과 천제(天祭)”라는 논문에서 “고대국가 단계에서부터 중요하게 모셨던 태백산신을 위한 제의는 개인 또는 마을 단위 산신 제, 고갯마루 산신제, 또는 단종을 태백산신으로 여겨 모시는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전문위원은 "조선시대에는 태백산에 설치된 제당을 ‘태백천왕당, 천왕당, 천왕사(太伯天王堂, 天王堂, 天 王祠)’라고 한 것으로 보아 태백산사(太白山祠)는 천왕당(天王堂)이고, 태백사(太白祠)는 천왕사(天王祠)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제당 명칭을 통해 태백산에서 천신 또는 산신의 감응 을 받은 ‘천왕(天王)’이라 불리는 신령을 모신 제의가 행해졌다. 조선시대에 태 백산에서 천왕을 모셨던 전통은 한말~대일항쟁기를 지나 ‘단군’을 모시는 제의와 조상신을 위하는 산멕이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김도현 위원은 신라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태백산에서 행한 제의를 고려·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인천 광역시 강화군 마리산 참성단의 제천례 일부 요소와 비교를 통해 태백산천제가 지닌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태백산에서 국가 주관 제의 과정에 모신 신령은 신라와 고려시대에 태백산신을 모셨 으며, 조선시대에 민간에서 천왕(天王)을 모셨는데, 이를 관에서 관리하는 형태였다. 마을 천 제와 개인 신당에서 천신을 모신 사례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그 전통은 초기 국가 단계에서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의 과정에서 강화도 참성단에서는 도교의 신들을 제사의 대상으로 받들어 지방(紙榜) 형태로 모셨으나, 태백산 천제단에서는 하늘을 상징하는 해·달·북두칠성과 28수기를 깃발로 만들어 모셨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신라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태백산에서의 제의 장소가 어떤 형태였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에 작성된 유산기에 소개된 내용으로 보아 제당 형태였음을 알 수 있고, 대일항쟁기를 지나면서 현재와 같이 돌로 쌓은 제단 형태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 해 마리산에서는 돌로 쌓은 제단 형태의 참성단이 고려 이후 조선시대에도 계속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태백산에서 제의를 주관한 제관은 고려시대까지 왕이나 국가에서 파견된 관리가 주관 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국가제장 선정에서 탈락됨으로써 향리나 민간인이 제의를 주도 함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마리산 참성단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관리를 파견하여 제의를 주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태백산 천제단과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에서의 천제를 주관하는 이는 해당 지역 자치단체장을 비롯한 지역 인사들이다.

넷째, 조선시대까지 태백산에서의 제의에 올린 제수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소를 헌공한 사례는 많다, 1987년부터 태백산천제위원회에서 주관하여 지낸 천제에 올린 제수는 조선 시대에 소와 삼베를 헌공한 전통을 살려 소머리와 삼베를 올리며, 백설기와 소머리를 제외한 모든 제수는 생으로 올린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마리산 참성단에서는 조선시대에 도 교의 제사에서와 같이 차·탕·술과 떡을 준비하여 올렸으며, 국가에서 제수 등을 준비하기 위한 별도의 제전(祭田)을 내려주었다는 점은 태백산지역과 다른 점이다.

현재 마리산 참성단에서의 제의에 올리는 제수는 태백산 천제단에 올리는 제수와는 달리 대 부분 조리한 제수를 올리며, 소머리를 올리지 않는다. 하늘에 대한 제사라 하더라도 올리는 제수는 지역적 특징이나 종교 의례 전통에 따라 차이점이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들 두 지역 나름의 특징이 제수에서도 일부 드러남을 알 수 있다.

다섯째, 의례를 행하는 시간은 두 지역 모두 자시에 지냈으나, 지금은 낮에 지낸다. 절차는 태백산에서의 제의 절차에 대하여 조선시대까지의 구체적인 양상을 알 수 없다. 1987년부터 매년 10월 3일 오시에 지내는 태백산 천제는 이 지역 나름의 무속식과 유교식 의례를 적절히 융합하여 만든 절차에 따라 지낸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에 마리산 참성단에서 행한 의례 과정 은 각종 기록을 통해 그 대략을 알 수 있다. 특히 1511년 유숭조에 의해 운마락(雲馬樂)을 벌였다는 점은 태백산과 비교되는 점이다. 1982년 하늘에 제사지낸 전통을 부활한 이후 1997년 공식적으로 참성단에서의 제천행사를 부활하면서 지낸 개천대제 과정은 유교식 절차를 근간으로 제천례를 행한다.

현재 태백산 천제에서는 28수기와 함께 ‘세계평화, 민족통일, 국태민안, 우순풍조, 민족의 영산 태백산, 태백산 천제, 대한민국 천제’(世界平和, 民族統一, 國泰民安, 雨順風調, 民族의 靈 山 太白山, 太白山 天祭, 大韓民國 天祭]’라고 각각 쓴 깃발을 만들어 배치하였는데, 이 깃발 은 태백산에서의 천제(天祭)를 통해 기원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에 비해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에서는 제천례를 마친 후 국운의 번창과 태평시대를 기원하며 성화를 채화한다. 기원하 는 바는 유사하다 볼 수 있으나, 방법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동안 태백산은 구국의 성지로 부각되기 시작했 다. 동학을 만든 최제우 사후(死後) 동학교도들이 태백산 권역에 모여들면서 태백산은 민족의 종산으로 그 가치가 더욱 부각되었다. 특히 신종교가 일어나면서 신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이 태백산으로 모여들어 천신에게 제사지냈다. 신흥종교 중에서는 1937년의 태극교도[천지중앙 명류도]들의 활동이 주목된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을 기원하기 위해 태백산 정상에 구령탑을 쌓고 독립 기원제를 지냈다. 이러한 활동은 태백산이 지닌 민족의 영산이라는 관념 속에서 구 국(救國)의 성지로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구국을 위한 의례가 행해지면서 태백산의 제의는 천제(天祭)의 형식을 갖추게 된다.

이와 함께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거나 태백산에서 민간 치성을 드리던 전통은 태백산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태백산에서 제사를 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백산 줄기가 내려온 산봉 우리나 능선 아래에 천제단[천제당 또는 천지단]을 만들고 마을 단위로 천제를 지낸 사례들도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도교에 기반을 두면서 국가 제사로 행해진 마리산에서의 제천의례와 구분되는 점이다.

하늘에 제사지낸다는 점에서는 태백산 천제단이나 마리산 참성단은 유사한 성격을 지닌 제 의 장소다. 그러나 그 역사적 연혁이나 의례 과정, 주변 지역으로의 확산 등에서는 구분되는 점들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정동락 대가야박물관장은 “팔공산 제천(祭天)문화의 가치와 의미”라는 논문에서 “팔공산은 압독국시대에는 하늘에 제사하는 제천의 대상이었다. 통일신라시대 에는 중악신, 고려시대에는 공산대왕, 조선시대에는 공산밀대천왕이 머무는 성소였다. 시대에 따라 팔공산의 위상과 산악신의 명칭도 변화되었고, 제의의 성격과 의미도 달라졌다.”며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첫째, 대구·경북지역은 한민족의 뿌리정신과 문화의 원천인 홍익인간사상이 길러지고 간직된 중심 지역이었다.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풍류정신과 화랑도, 선비정신과 동학사상으 로 발전해 왔다.

팔공산은 압독국 또는 달벌국의 제천과 관련한 제장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소국의 국읍에는 천군이 제천을 주관하였고, 별읍에는 소도라는 신성구역이 존재했다. 압독국의 국읍은 경산 임당유적, 달벌국은 달성토성이었다. 압독국이 신라에 편입되면서 팔공산은 신라의 중악 제장으로 수용되었고, 음악 역 시 신라의 국가음악인 향악으로 재편성되었다. 이후 팔공산은 국가수호와 지역주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처였다. 팔공산에서 거행된 제천의례와 산신제는 우리 민족의 뿌리인 단군신화 에서 연원을 둔 대구·경북정신이자 출발점이었다.

둘째, 팔공산의 가치와 의미는 그 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팔공산은 일찍부터 부악-아버 지산으로 불렸다. 최치원이 지은 「석이정전」에 기록된 가야건국신화에서 가야 시조의 아버지 는 천신 이비가지, 어머니는 산신인 정견모주였다. 부악은 천지신 중 남성성을 지닌 천신의 관념적 표상일 가능성도 있다. 분지형의 지형을 이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산악을 보면, 부악인 팔공산에 상대되는 모악으로 현풍의 비슬산을 상정할 수도 있다. 국가적 측면에서 충담의 「안민가」에서 보다시피 아버지는 곧 국왕을 의미하였다. 부악은 국가-국왕의 산악이란 뜻을 지닌 셈이다.

셋째, 팔공산은 압독국 또는 달벌국의 제천의례 성소이자, 삼국통일 이후에는 중악의 산악 신에 대한 제사를 지낸 제장이란 장소성을 지녔다. 각종 문헌기록에서는 팔공산의 정상부에 제천단 또는 사당(신사, 壇廟)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흔적이 잘 남아 있 지 않아, 구체적인 장소는 의견차이가 있다.

정동락 대가야박물관장은 “팔공산의 제천문화가 지닌 역사적 가치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끊임없이 탐구하고, 그 의미를 되살리는 노력을 기울일 때 찾아지는 것이다. 역사는 문헌과 물질자료를 근거로 삼아 당시의 실상을 이해하고, 그것이 가지는 현재적 의미와 미래 적 가치를 추구하는 학문이다. 팔공산의 역사고증도 결국 증거자료에 바탕을 둘 수밖에 없다. 그 출발은 팔공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토론에는 조미옥 박사, 장지화 박사, 정인열 대구가톨릭대학교 글쓰기말하기센터 부교수가 패널로 참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