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17세기 중국에서 활동한 독일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1~1666)은 당시 중국 지식인들에게 유교적 관점에서 신(神)을 설명하고자 고심했다.

이에 아담 샬은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도덕신학자이자 예수회사인 레시우스(Leonardus Lessius, 1554~1623)가 쓴《무신론자와 정치가들에 대항한 신의 섭리와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논의》를 발췌해 수정·번역하여 《주제군징(主制群徵)》을 펴냈다.

《주제군징(主制群徵)》의 책 제목의‘주제(主制)’는 ‘주제자(主制者) 혹은 주제자인 신의 섭리’를 뜻하고, ‘군징(群徵)’은 ‘여러 증거를 통해 증명한다’는 뜻으로 《주제군징》은 ‘여러 증거를 통해 신의 섭리를 증명한다’는 의미이다. 25가지 항목을 통해 신의 섭리를 증명한 17세기 천주교 교리서이다.

한국서학사에서는 유학자 이익(李瀷, 1681~1763)이 《주제군징》 서명과 함께 천문학적 내용과 서양 의학에 관한 내용을 초록한 것이 이 책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이다. 1791년에는 천주교 서적 소각령에 따라 외규장각에서 소장한《주제군징》이 불태워졌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한동안 기록에 등장하지 않다가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의령(醫零)(저술 연대 미확정)에 등장한다. 여기에는“탕씨군징(湯氏群徵)”이라고 하여 인체의 구조에 관한 내용을《주제군징》에서 인용한다. 19세기에는 이규경(李圭景, 1788~?)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주제군징”이라는 서명과 함께 인체와 서양 의학에 관련된 내용을 언급한다.

한국서학사에서 확인되는《주제군징》에 대한 기록은 횟수도 많지 않고, 그 내용도 간략한 편이다. 주제군징》이 천주교 신학 및 교리에 관한 서적이고, 18세기 말 이후에는 천주교에 대한 금압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 유학자들 사이에서 공개적으로 유통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제군징-만물로써 신의 섭리를 증명하다" 앞 표지. [이미지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주제군징》이 유가철학·서양 중세철학·과학사·성서학·서양 고전학에 소양을 지닌 다섯 명의 전문 연구자들의 협동 번역을 통해 《주제군징(主制群徵)­만물로써 신의 섭리를 증명하다》(전용훈 외 역주)라는 책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에서 발간됐다.

《주제군징》을 쓴 아담 샬은 신이 ‘우주 전체의 완성’이라는 공적인 목적을 위해 만물을 창조했고, 이는 개별 사물의 모양, 구조, 활동 양상, 사물 간 관계 등에서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또한 개별 사물의 존재와 활동 양상을 통해 신의 존재와 섭리에 의해 사물들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한다. 이에 더해 중국의 유가 지식인들에게 기독교 신학을 설득하기 위해 레이우스의 원서에는 들어 있지 않는 유가 철학의 개념과 이론을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독자적인 내용도 추가하였다.

《주제군징》의 다양한 내용 가운데 특히 17~18세기 한중일 학자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것은 ‘5. 인체의 목적으로 증명함(五以人身向徵)’ 부분이다. 이 항목은 인체의 구조와 생리활동이 모두 신의 존재와 능력에 대한 방증(傍證)임을 역설하는 내용이다. 아담 샬이 직접 서술한 도입부는 당대까지 밝혀진 의학 지식을 통해 인체의 각 부분이 훌륭하게 기능하도록 만든 신의 위대성을 드러내려 했다.

'주제군징' 소인판(바티칸 도서관 소장본). [이미지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제군징' 소인판(바티칸 도서관 소장본). [이미지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레시우스가 쓴 원서의 핵심 주제 ‘영혼불멸론’에 관해선 ‘12. 영혼이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증명함(十二以靈魂常存徵)’부분에서 간략히 다룬다. 다른 예수회사들처럼 아담 샬도 중국인들에게 영혼의 비물질성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영혼불멸설을 설파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혼령 혹은 혼백을 기(氣)의 이합집산으로 보는 동아시아 유가철학의 혼백 개념이 물질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자신들의 영혼 개념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그에 따라 자신들의 영혼이 비물질성에 기초한 실체라는 점을 강조하는 한편, 동아시아의 음양론적인 혼백 개념을 강하게 비판함으로써 영혼불멸론을 이해시키고자 했다.

전문 연구자들의 협동 번역으로《주제군징(主制群徵)­만물로써 신의 섭리를 증명하다》의 발간의 의의는 이 책 ‘해제’에 잘 드러나 있다.

“최근 한국서학사의 연구가 심화하면서, 서학으로 포괄되는 서양의 신학·철학·과학의 지식들이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지배적인 사상이었던 유가철학과 어떻게 상호작용하였는지를 탐구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조선 지식인들이 서학서에 담긴 지식에 어떻게 반응하고 그것을 어떻게 변용하여 자신의 논의 속으로 끌어들였는지를 탐구하는 일이 성숙한 한국서학사 연구의 중심과제가 되었다. 당연하게도 보다 심층적인 한국서학사의 이해를 위해서는 서양의 신학·철학·과학의 지식은 물론 유가철학에 대한 비판론까지 포괄하고 동서양의 핵심 지식이 교차하는 《주제군징》같은 텍스트에 대한 기초적 연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유가철학, 서양 중세철학, 과학사, 성서학 및 서양 고전학에 소양을 지닌 다섯 명의 필자들이 공동 강독과 토론을 통해 번역문을 만들고 역주를 붙였다. 필자들이 거의 처음으로 시도한 공동 연구 방식의 번역 연구가 한국서학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