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제천신격의 변화로 본 선도제천문화의 민속·무속화(종교화)

2. 신격 인식의 변화: 천신(생명신·창조신)→산신

앞서 배달국 이래 선도의 오랜 역사 속에서 제천의 신격적 중심이 서서히 ‘마고삼신→삼성→단군’으로 달라져갔고 이것이 선도제천문화가 민속·무속화(종교화)하는 주요 배경이었음을 살펴보았다. 본절에서는 유교례의 성행 속에서 마고삼신-삼성에 대한 인식이 대체로 ‘천신(天神, 생명신·창조신)’에서 ‘산신(山神)’으로 달라져갔고 이것이 선도제천문화가 민속·무속화(종교화)해가는 또 다른 배경적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을 살펴보겠다.

현재 한국의 민속·무속문화에는 수없이 많은 신격들이 있다. 필자는 이들 중에서 선도제천의 신격적 원형인 마고삼신-삼성 계통이 (선·불 습합의 과정에서 불교적 윤색이 가해진 경우까지도 포함해서) 근간이 된다고 본다. 이외에 열국시대 이후에 새롭게 끼어든 국조신·국모신(동명왕·유화부인·파소신녀·정견모주 등), 영웅신(장군신 등), 기타 외래신, 잡신(원신·질병신 등) 등도 있지만 선도제천의 신격적 원형과 무관하므로 본고에서는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한국의 민속·무속문화에 나타난 마고삼신-삼성의 양대 이미지는 단연 ‘천신(생명신·창조신)’과 ‘산신’이다. 과거 선도제천의 신격적 원형을 그나마 잘 반영한 이미지가 ‘천신(생명신·창조신)’이며 여기에서 멀어지면서 산신의 이미지를 얻게 된 것이다.

먼저 천신(생명신·창조신)이다. 한국의 설화나 구비전승 또 민속·무속문화에는 거인 할머니의 모습으로 하늘·해·달·땅·바다·섬 등을 빚어낸 천신(생명신·창조신) 마고할미의 모습이 널리 나타난다. 상고 이래의 선도적 세계관, 곧 북두칠성 근방의 하늘에서 비롯된 근원의 생명(기, 마고삼신)에서 모든 존재가 비롯되어 나온다는 인식이 거인 할머니가 하늘·땅·바다 등을 빚어 만들어낸다는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다.(<자료8-1>)

천신(생명신·창조신)으로서의 마고삼신은 아이의 출산·육아 문제와 관련하여 산신(産神)으로 특화되어 나타났다. 곧 한국사회에서 부모들이 아이를 원할 때 삼신(삼신할미, 삼시랑할미, 삼신랑三神娘할미, 삼승할망)에게 기원하였으며 아이는 삼신의 도움으로만 잉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이를 출산한 후에는 밥과 미역국을 차려놓고 삼신에게 감사를 표하는데 그 상은 삼신상, 밥은 삼신밥, 미역국은 삼신국으로 불렸다. 육아도 자연스럽게 맞물려 들어갔다. 삼신은 어린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어린아이들에게 삼신주머니(삼신낭三神囊)를 채우는 경우가 많았다. 출산후 21일(삼칠일)간, 매 7일마다 세차례 밥과 미역국을 삼신께 올렸으며, 백일이나 돌을 맞이할 때도 반드시 삼신을 모셨다. 이러한 풍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자료8-2>)

<자료8> 한국 민속·무속문화속의 천신(생명신·창조신): 마고삼신

1: 좌로부터『마고할미』(정근 저·조선경 그림, 보림, 2006), 『설문대할망』(송재찬 저, 봄봄출판사, 2007년),『마고할미는 어디로 갔을까』(진은진 저, 해토, 2003년)의 표지 이미지, 2: 좌로부터 구파발 금성당 소장 삼신할머니도, 삼신제석도, 삼신상 2종.  [사진 제공 정경희]
1: 좌로부터『마고할미』(정근 저·조선경 그림, 보림, 2006), 『설문대할망』(송재찬 저, 봄봄출판사, 2007년),『마고할미는 어디로 갔을까』(진은진 저, 해토, 2003년)의 표지 이미지, 2: 좌로부터 구파발 금성당 소장 삼신할머니도, 삼신제석도, 삼신상 2종. [사진 제공 정경희]

 이렇듯 천신(생명신·창조신)으로서의 면모는 마고삼신에게 집중적으로 남아있지만, 삼성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삼성은 천신으로 인식되었으나 구체적으로 생명신·창조신의 이미지는 부여되지 않았던 것인데, 이는 동북아 상고 이래 천신(생명신·창조신)의 원류가 마고삼신이며, 삼성은 마고삼신을 제천한 스승왕이었던 역사적 전통 때문으로 설명된다.

다음은 산신(山神)의 이미지이다. 대체로 마고삼신-삼성은 천신(생명신·창조신)의 이미지보다는 산신의 이미지를 더 많이 갖고 있다. 선도제천의 원형에 근접한 천신(생명신·창조신)에서 산신으로 달라져갔던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그 이유를 유교문화의 성행과 선도제천문화의 쇠퇴 때문으로 본다. 조선시대에 들어 중화주의를 본질로 하는 유교문화가 크게 성행하면서 유교문화의 대척점에 서있던 선도문화가 한국사회 내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이에 인적이 드문 산속으로 밀려들게 되었던 때문으로 보는 것이다.

산속으로 밀려난 선도문화는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기 보다는 불교와 습합, 원형에서 더욱 멀어져가게 되었다. 선·불 습합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듯이 한국 대부분의 산에는 불교사찰의 뒷전 작은 전각에 산신각(山神閣)류(산령각山靈閣, 삼성각, 칠성각七星閣, 독성각獨聖閣 등)의 전각이 자리하고 있다. 선·불 습합의 과정에서 기존의 소도제천지가 불교사찰로 바뀌게 되었고 특히 소도제천지의 중심이던 환웅전(대웅전大雄殿)에는 불상이 모셔지고 이곳에서 밀려난 환웅 이하 선도제천의 신격들은 불교사찰의 뒷전, 산 가까운 쪽의 작은 전각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산신각류에 모셔진 마고삼신-삼성은 천신(생명신·창조신)으로서의 원형에서 멀어져 산신, 말그대로 산의 수호신 정도로 인식되었다. 그나마도 불교의 제석신앙 이하 각종 불·보살 신앙으로 습합되고 분식되어 성격이 더욱 복잡하고 모호해졌다.

산신으로 인식된 마고삼신-삼성이 실상 산의 수호신이 아님은 명백하다. 산의 수호신이라면 당연히 지신(地神)으로 여겨져야겠지만 실제 한국사회에서 산신은 지신이 아닌 천신으로 인식되어왔다. 산속으로 밀려나 긴 시간이 흐르는 과정에서 산신으로 이름되고 말았지만 천신으로서의 원면모는 기억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해 보자면, 중화주의 유교문화와 대척점에 있던 선도문화가 금압되고 양성화될 수 없는 상황속에서 과거 천신(생명신·창조신)으로서의 정체성이 기억되고는 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천신(생명신·창조신)의 면모를 드러내지 못한 채 산의 수호신이라는 최소한의 기능만을 부여받게 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천신이 산속에 갇히어 그 생명신·창조신으로서의 본령을 펼치지 못하고 산신의 굴레에 갇혀버린 것은 선도문화가 음성화되어있던 시대상황 때문이었다.

산신각류에 모셔진 산신은 대체로 호랑이를 거느린 남성 신선의 형상인데, 여기에는 배달국 개창으로 선도제천문화가 보급되고 한민족(예맥족, 새밝족)이 형성되는 과정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어 더욱 의미심장하다. 곧 환웅천왕이 이끄는 환웅족이 백두산 서편 천평지역으로 이거한 이후 이 일대의 토착세력인 웅족과 호족 중에서 웅족과 연합하였고 이로써 맥족(밝족, 환웅족+웅족)이 성립되었다. 반면 호족은 환웅족의 새로운 통치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추방되었다가 재차 맥족의 선도제천문화를 수용, 예족(새족)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후 맥족과 예족의 동족화가 진행되어 한민족의 종족적 실체인 예맥족(새밝족)이 성립되었다. 환웅족의 선도제천문화가 웅족·호족에게 보급, 이로써 한민족(예맥족, 새밝족)이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서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는 산신이 좁게로는 배달국 개창주인 거발환 환웅, 넓게로는 맥족(환웅족+웅족)의 상징임을 알게 된다.(<자료9>)

<자료9> 한국 민속·무속문화속의 남성산신: 거발환환웅

좌로부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신도, 순천 송광사 산신도, 북한산 진관사 산신도. [사진 제공 정경희]
좌로부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신도, 순천 송광사 산신도, 북한산 진관사 산신도. [사진 제공 정경희]

 이렇듯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은 주로 남성이지만 호랑이를 거느린 여성 산신의 사례도 적지 않다. 종래 남성산신과 여성산신을 부부 산신으로 설명하기도 했지만 동북아 고고학의 발달로 선도제천의 신격인 마고삼신-삼성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이러한 오해는 풀리게 되었다. 곧 선도제천의 신격이 마고삼신이고, 선도제천의 집전자인 삼성이 마고삼신을 향사하였기에 ‘마고삼신 = 삼성’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이에 마고삼신과 삼성이 호환되었던 것이다.(<자료10>)

<자료10> 한국 민속·무속문화속의 여성산신: 마고삼신

좌로부터 지리산 법계사의 마고할미 여산신도, 계룡산 동학사의 여산신상, 원광대 박물관 소장 여산신도. [사진 제공 정경희]
좌로부터 지리산 법계사의 마고할미 여산신도, 계룡산 동학사의 여산신상, 원광대 박물관 소장 여산신도. [사진 제공 정경희]

이상의 남성산신(거발환환웅)이나 여성산신(마고삼신)이 불교와 습합될 경우 일차적으로 제석으로 나타났다. 한국 민속·무속문화에 널리 등장하는 제석 역시 남성제석(환인제석·환웅제석·단군제석 등)과 여성제석(삼신제석·할미제석 등) 두 계통이 있다.

제석 외에도 불교의 수많은 불·보살 신앙과 습합되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백의관음(白衣觀音, 마고삼신) - 문수보살(文殊菩薩, 삼성)’으로 지리산이나 계룡산에서 이러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 삼성은 치성광불(熾盛光佛, 칠성불七星佛), 미륵불(彌勒佛,) 약사불(藥師佛) 등으로 다양하게 습합되어갔는데, 향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남성산신이 호랑이 대신 말을 탄 형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말을 타고 무기를 든 남성 성황신(서낭신)의 경우가 그러하다. 호랑이를 탄 남성 산신의 모델이 거발환 환웅이라면 말을 탄 남성 성황신(서낭신)의 모델은 동명왕(東明王)이다. 동명왕 전승에 의하면 동명왕은 구제궁(九梯宮) 앞에 놓인 조천석(朝天石)을 딛고 기린마(麒麟馬)에 올라 천상을 오르내렸다 하며 이러한 동명왕의 이미지는 뇌신 환웅을 잇는 훗날 중국도교의 뇌신(뇌성보화천존雷聲普化天尊)의 대표 이미지가 되었다.

단군조선이 와해되어 부여·고구려·백제 등으로 분열되는 과정에서 새롭게 국조신으로 등장한 동명왕과 같은 인물들은 주로 말을 타고 무기를 든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전쟁이 잦아진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들은 호랑이를 탄 산신(거발환 환웅)을 대신하여 성황당(서낭당)의 주신격이 되었다.(<자료11-1>) 말을 탄 서낭신이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은 산신에서 서낭신으로의 전변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자료11-2>) 한반도의 여러 제천유적에서 발굴되는 소형의 철제나 토제 말 조형물들은 서낭신의 상징물인 ‘천마(天馬)’이다.(<자료11-3>)

<자료11> 남성 산신의 후대 형태: 말을 탄 성황신(서낭신)

1. 서울 왕십리 수풀당 서낭신 · 건들바우박물관 서낭신  2. 대관령 국사서낭당의 서낭신  3.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백제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 출토 토제 말 · 통영시박물관 소장, 광도면 안정리 출토 고려시대 철마. [사진 제공 정경희]
1. 서울 왕십리 수풀당 서낭신 · 건들바우박물관 서낭신 2. 대관령 국사서낭당의 서낭신 3.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백제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 출토 토제 말 · 통영시박물관 소장, 광도면 안정리 출토 고려시대 철마. [사진 제공 정경희]

남성산신과 여성산신 중에서 갈수록 남성산신의 비중이 높아져갔던 시대 분위기상 서낭신의 경우는 대부분이 남성이며 여성 서낭신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천신의 산신으로의 변화, 또 산신에서 서낭신으로의 변화상에 주목, 배달국 이래 선도제천의 신격 변천 과정을 ‘마고삼신→삼성→단군→산신→서낭’으로 정리한 연구도 있다.

정리하자면, 마고삼신-삼성은 훗날 유교문화의 성행 속에서 천신(생명신·창조신)으로서의 원래 모습이 약화되고 주로 산신으로 인식되었다. 과거 천신(생명신·창조신)으로서의 기억이나 흔적은 남아있지만 천신(생명신·창조신)으로서의 정체성을 펼칠 수 없는 시대 상황 속에서 산신의 이름으로 산속에 갇히게 된 것이었다. 천신(생명신·창조신)에서 산신으로의 변화는 선도제천문화의 민속·무속화(종교화) 현상의 또 다른 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