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26대 왕 고종이 15세에 한 살 많은 명성황후 민씨와 혼인한 1866년(고종 3년, 병인년)은 신정왕후 조씨가 수렴청정을 마치고 친정을 시작한 해이다. 또한,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및 탄압을 이유로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병인양요가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구한말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야욕 속에 격변기를 살다간 고종과 명성황후의 왕실 혼례의 일면을 보여주는 ‘보잠발기(寶簪件記)’가 국립고궁박물관 7월 큐레이터 추천 왕실유물로 선정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선정한 7월의 큐레이터 추천 왕실유물인 '보잠발기'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혼례시 사용한 비녀의 목록을 기록한 첩이다. [사진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이 선정한 7월의 큐레이터 추천 왕실유물인 '보잠발기'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혼례시 사용한 비녀의 목록을 기록한 첩이다. [사진 문화재청]

‘보잠발기’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혼례 때 사용한 비녀 목록을 적은 기록이다. 보잠은 ‘보배로운 비녀’를 뜻하고, 발기는 왕실 의례에 소용되는 물품, 인명 등을 나열해 작성한 목록으로, 각 건件에 대한 기록이라 하여 한자로는 ‘건기件記’라고 하는데 우리 옛말로 ‘발기’라고도 했다.

한글 정자체로 작성된 해당 문서는 두툼한 붉은색 종이를 아코디언처럼 접은 직사각형 형태로 만든 첩이다. 첩의 표지는 직물로 만들어 왕실유물다운 품격을 갖췄다. 종이 표면에는 물목을 바르게 쓸 수 있도록 표시를 해두었는데 상단에 기준점이 되는 작은 구멍을 내고, 그 아래 세로로 홈을 내어 칸을 마련해 흐트러짐 없이 글을 쓸 수 있게 했다.

발기는 업무상 확인을 위한 용도부터 최종 보관 용도까지 목적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확인된다. 그중 도톰한 색지와 직물로 된 표지를 갖춘 이 기록물은 여러 번 작성을 거친 최종 보관용으로 보인다.

보잠발기의 표지는 직물로 만들어 기록물의 품격을 높였다. [사진 문화재청]
보잠발기의 표지는 직물로 만들어 기록물의 품격을 높였다. [사진 문화재청]

기록물의 내용인 비녀의 종류는 크게 ‘큰마리칠보’와 ‘조짐칠보’ 2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큰마리칠보’는 국가의 가장 큰 의례를 행할 때 입는 대례복에 갖추는 머리 모양인 큰머리를 장식하는 비녀이고, ‘조짐칠보’는 궁중 머리 모양 중 가장 약식인 조짐머리를 장식하는 비녀이다.

조짐 칠보 중 하나의 아래에는 “병인년 가례 때 보내오실 때 본래 아니 보내오신 것”이라고 적은 작은 쪽지가 부착되어 있다. 이 첨지를 통해 보잠발기의 작성배경을 파악할 수 있다. 비녀는 병인년 가례에 소요되었던 것으로, 처음에 도착하지 않았던 비녀를 다시 마련하면서 목록이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보잠발기’는 국립고궁박물관 지하층 ‘왕실의례’ 전시실에서 관람할 수 있고, 온라인으로 볼 수 있도록 국립고궁박물관 누리집과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유튜브에 국영문 자막과 함께 해설영상이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