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병자수호조약에 의한 개항 이후 외세의 침투로 민족적 자존에 대한 위협이 심화되었다. 외세의 충격에 대한 대응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의병투쟁과 민중계몽・실력배양의 자강(自强)운동으로 나타났다. 자강운동은 사대주의 유교사학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한 일이었고, 이는 반청 자주독립의 민족사 연구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구한말 역사학은 주로 교육・계몽 운동에 종사하던 지식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편찬된 교과서 형식 사서들은 학부(學部) 관리로 봉직한 중인층이 주도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국사 과목이 공교육과정에 들어갔고, 학부 편집국에서 관・공립학교 국사 교재로 《조선역사(朝鮮歷史)》(1895)를 편찬한 이래 1910년 나라가 망할 때까지 약 20여 종의 국사 교과서가 간행되어 교재로 이용되었다.

당시 사서편찬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인물들 중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이는 김택영, 현채, 장지연으로 이들은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계몽사상가이자 대표적인 역사학자들로서 학부 교과서 편찬에 깊이 관여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역사인식은 당시 학부(정부)의 역사인식을 반영할 뿐 아니라 독립협회와 구국계몽운동가들의 역사인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유교사학에서는 우리 역사를 중화사(中華史)의 일부 혹은 그 부용(附庸)으로 취급하였다. 16세기 대표적인 아동용 교재이자 18세기에도 향촌 서당의 필수서로 천자문에 이어서 반드시 학습하던 《동몽선습(童蒙先習)》(1543)은 삼황오제~명나라에 이르는 역사를 서술한 뒤에 단군~조선의 역사를 붙여 놓았다. 철저한 존화·사대(尊華·事大)의식을 아동들에게 주입시켰던 《동몽선습》은 단군에게는 평어를 쓰고 주나라 무왕(武王)과 기자에게는 존칭어를 썼다. 심지어 한무제 침략군이, 역사 정통을 잇고 있었다고 본 위만조선을 멸망시키는 사건 서술에도 ʻ漢武帝伊討滅之爲時古(하시고)ʼ라 하여 존칭어를 쓰고 있었다.

계몽사학자들은 우리 역사를 개별 민족사로 다루어 반청독립을 주장하고 중화주의 유교사학에서 탈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의명분에 입각한 정통론을 따르는 등 유교사학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계몽사학의 상고・고대사 인식은 유교사학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대체로 역사의 시작은 당요 무진년에 조선을 건국한 단군에서 비롯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남인 실학자들의 주장을 이어 ‘단군의 사적은 허황되고 사실과 어긋나 믿기 어렵다’며 단군을 부정한 인식도 있었다. 김택영은 "고기에 많은 괴이하고 헛된 말을 《삼국사기》, 《동국통감》, 《여지승람》 이하에 왕왕 실었으니, 어찌 다 없애버리지 않았는가’ 하고 탄식도 하고 있다.(“東史古記 後世君子不甚信之 以其中多怪誕語...豈非以其事不爲盡無耶”, 《역사집략(歷史輯略)》)

높은 수준의 문화를 누린 것은 단군이 아닌 기자시대라는 인식도 유교사학과 다르지 않았다. 독립협회의 대표적인 사서인 《대동역사(大東歷史)》(1905)는 단군을 성군으로 보고 단군의 치적을 다루고 있으며, 제천 기록과 함께 도산회의에 태자 부루를 보냈다는 기록에는 조(朝:알현)가 아닌 여(如:가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사대주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기자가 중국인 5천 명을 이끌고 와서 문화를 크게 일으켰다고 하여 기자를 문화의 중심으로 보는 《동국통감이래 중화주의 유교사학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음도 보여주었다.

역사 정통의 계승은 조선전기 관점인 ‘단군기자사군삼한삼국’이라는 인식과 조선후기 삼한정통론으로 ‘단군기자삼한(마한)신라’로 이어진다는 인식, 남인 실학자들 주장을 이어받아 단군을 부정하고 ‘기자마한신라’로 정통이 계승된다는 주장도 있었다.

위만조선 도읍지에 세워졌다는 낙랑군 조선현 위치에 대해서는 조선후기에 낙랑군 ‘재요동설’ 흐름도 있었으나, 계몽사학자들은 모두 조선 유학자들의 통설이었던 ‘재평양설’을 선택하였다.

계몽사학에서는 중국에 대해서는 자주독립을 주장하였으나 일본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는 일본인이 쓴 역사책(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의 《朝鮮史》(1892))의 영향을 받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계몽사학자들은 반청독립을 주장하였으나, 그들이 쓴 교과서들은 조선시기 전 기간에 걸쳐 유지되던 사대주의 유교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반청독립 정신은 청의 정치적 간섭에서 독립한다는 정당성은 있었으나 많은 부분은 일본의 부추김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일본으로의 예속’으로 연결되었다. 유교사학에서는 탈피도 못한 채 오히려 친일화되어,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논리를 자발적으로 조선인에게 교육하는 역할을 하는 형편이었다.

김택영은 단군은 황당하여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신공황후 삼한정벌설・임나일본부설은 수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고대 역사는 주(周)의 제후국에서 시작되어 삼국시대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은 식민지 역사가 되고 말았다. 김택영은 우리 역사학에서 최초로 식민사학을 수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현채는 삼한정통설(三韓正統說)을 주장하였으나 신라인들은 본래 진(秦)・한(漢)의 유민(遺民)이라고 설명하고, 임나일본부설을 수용하며,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 것이 아니라 속말말갈이라 하여 식민사관을 인정하였다. 이는 일본의 역사학에 굴종하고 있었던 당시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을사조약을 비판하면서 계몽・자강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장지연은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를 증보한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1903)에서 고령에서 포상팔국까지의 대가야를 임나라고 인정하여 정약용이 거론하지 않았던 임나일본부를 추가하면서 수용하였다. 1915년에는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업적을 과시하여 선전 도구로 삼으려는 조선총독부의 조선물산공진회를 찬동하는 글을 쓰기도 하는 등 일제 침략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계몽사학은 서양 근대사학을 받아들인 일본 황국사관 영향을 받아 반청독립을 주장하며 중화주의 유교사학에서 탈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세 유교사학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신공황후의 신라정벌과 임나일본부 인정, 단군과 일본 삼신(三神)의 하나인 스사노오 노미코토(素盞嗚尊)를 형제로 보는 등 일본 황국사관에 오염되어 매국의 성향까지 띤 식민사학으로의 길을 열었다.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계몽사학자들은 사대주의 유교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친일화되어 유교사학과 식민사학을 이어주는 접합 고리로서 ʻ친일사학ʼ의 역할을 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결과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끝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