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에 꽃피었던 실학 전통을 사학 분야에서 탁월하게 계승했다고 평가받는 한치윤・한진서는 시종 외국 자료[중국 523종, 일본 22종]로 우리 역사를 살펴보고자 했다. 유교가 도입되기 전 민족 고유 사상과 역사인식에 근거한 고기류를 "허황되고 근거가 없는 말이라 사대부들이 입에 담을 수 없는 것"(“東史 凡幾種哉 所謂古記 都是緇流荒誕之說 士大夫不言可也”, 《해동역사(海東繹史》(1823))이라고 보았기에 중국인과 일본인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남의 기록만 가지고 역사를 쓰면 그 역사는 남의 것이 되어 버린다. 남이 그 범위와 한계를 정해 놓은 자료에만 의지하므로 내 것이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외국 자료를 문헌비판 없이 그대로 이용하였기에 특히 고대사에서는 한국사를 왜곡하는 일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단군조선에 앞서 동이총기(東夷總紀)를 독립된 항으로 넣어 유교문화를 숭상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이(夷)의 문화를 높이 평가하고 한국문화의 뿌리를 동이문화와 연결시킴으로써 그 이해의 폭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물론 한영우의 지적처럼 동이의 군자국이라는 것은 중국인 기자의 교화 덕으로 이해한다.

기자 이전 동이에 대한 서술은 《산해경》을 인용하여 "군자국에 살며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라고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원지역 국가와 교류하고 전쟁한 사실은 모두 일방적으로 기록되었는데, 시종일관 중원지역에 비해 문화적으로 뒤처지고, 정복되고 복속되고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으로 일관하였다. 선도사서인 고기류는 모두 배제하고 중화의 관점에서 쓰여진 자료만 인용하였으므로 당연한 결과였다.

중원지역에 앞선 동이문화에 대해서는 "황제가 청구에서 자부선생에게 삼황내문을 받았다"는 단 하나의 기록만 실려 있다. 황제 헌원이 청구에서 자부선생에게 삼황내문경을 받았다는 내용은 선도사서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이문화가 중국보다 뛰어났다는 기록이 오로지 도교서적인 《포박자》에만 실렸다는 것은 유교사서만 살펴보고 고기류를 배제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기자가 도망갔다는 조선이 단군조선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으며 우리나라 역사책에서 말하는 단군에 관한 일은 모두 허황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고, 단군조선을 실은 것은 《고려사》에 단군을 전조선이라 하였기에 따랐을 뿐이라고 단군조선을 부정하였다.(“然則箕子之前知有朝鮮之稱 而檀君時朝鮮稱否未可的也 然而麗史以檀君爲前朝鮮箕子爲後朝鮮故今從焉...按東史所言檀君事皆荒誕不經”, 《해동역사》) 《삼국사기》에 그나마 한 줄 기록된 ‘平壤은 仙人 檀君王儉이 자리 잡은 곳’이란 문구를 삭제하지 않아, 황잡한 설이 정사에 편입되어 인현의 나라가 말이 괴이한 나라가 되어 버렸다고 탄식한다. 남인학자인 안정복의 《동사강목》,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와 마찬가지로 단군시대에 관한 고기류 기록에 대한 불신을 똑같이 표현하고 있다.

해석보다 자료를 앞세우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실증적인 편사(編史) 방식으로 문헌고증에서 당시 다른 사서에 비해 한 단계 높은 수준이라는 《해동역사》 역시, 고대사 지리고증 방식에 아주 독특하였다.

자신의 주장과 다르면 인용에서 일부러 누락시켜서(“初 Ⓐ王調據郡不服 秋遣樂浪太守王遵擊之郡吏殺調降...崔駰奏記指切長短 憲疎之因察駰高第 Ⓑ出為長岑長按長岑縣屬樂浪郡 駰自以遠去不得意”, 《해동역사》)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였다. Ⓐ 후한서 광무제본기 왕조(王調) 기사 원문은 ‘初 樂浪人王調據郡不服【樂浪郡 故朝鮮國也 在遼東】’이다. Ⓑ 후한서 최인열전 해당 기사 원문은 ‘出為長岑長【長岑縣屬樂浪郡 其地在遼東】’이다. ‘낙랑인’ 왕조가 웅거한 낙랑군은 ‘요동에 있다(在遼東)’라고, 낙랑군 장잠현은 ʻ요동에 있다(其地在遼東)ʼ라고 후한서 원문에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한치윤은 인용에서 이를 빼버렸다. 따라서 원문과 대조해 보지 않는 이상 한사군을 다룬 ‘사군사실(四郡事實)’ 항목에서는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과 만리장성이 있다면, 낙랑군을 한반도에 위치시킨 한국고대사는 전체를 다시 써야 할 정도의 중대 사안이다. 역사학자라면 반드시 고증과 함께 충분한 설명을 해야 함에도 한진서는, ʻ수성폐현은 평양의 남쪽 경계에 있다’는 《대청일통지》(1743) 기록(“大淸一統志...遂城廢縣在平壤南境”, 《해동역사》 續)을 근거로 태강지리지(太康:280~290)와 통전(801)에 기록된 한나라 수성현(漢遂城縣)이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라는 기록은 ‘진실이 아닌 듯하다’라고 한마디 하고 끝내버렸다. 더욱이 《대청일통지》에 기록된 평양은 한반도의 평양을 적시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평양 남쪽에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 없다면 갈석산과 만리장성이 있는 수성현의 위치를 다시 찾아야 하는데, 1743년의 기록을 근거로 그보다 1450여 년 전 낙랑군이 존재하던 당시의 ʻ장성이 시작되는 곳ʼ이라는 기록을 한마디로 부정하고 끝내버린 것이다. 갈석산은 아예 무시하고 회피해 버렸다. 한치윤을 이어 구체적인 지리비정을 하였던 한진서는 후대 기록을 근거로 낙랑군이 존재하던 당대 기록이나 앞 시기 기록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한진서가 인용한 《대청일통지》에는 수성폐현이 평양의 남쪽 경계에 있다는 구절에 이어“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군사를 나누어 수성도(遂城道)로 나갔는데 바로 이곳이다”(“大淸一統志...遂城廢縣在平壤南境 漢置屬樂浪郡後漢魏晉皆因之 隋伐高麗分軍出遂城道卽此”, 《해동역사》 續)라고 하였다. 수양제의 113만 대군의 24道(공격로) 중 하나인 수성도가 한반도의 평양 남쪽 경계에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한진서는 이 구절을 무시하고 아예 언급을 회피하였다. 한진서에게 지금의 평양이 아닌 다른 곳에서 평양을 찾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약용은 수양제의 24道(공격로)는 ʻ자랑하여 빛을 내고자 한 것이요, 도무지 이치에 닿지 않는 말ʼ이라고 부정하였는데, 한진서는 인용은 하되 설명을 하지 않고 회피하였다.

사료에 기록되어 있더라도 자신의 선입견과 다르면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부정만 하거나 설명을 회피하는 것을 고증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과 배치되는 사서 내용이나 다른 학자의 의견을 배척하기도 하였다. 《대명일통지》에 영평부 경내에 조선성이 있고, 기자의 수봉지라고 전해 내려오는 것을 기록했는데, “고금의 사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찬수하게 하였다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겠는가?”(“當日儒臣令稍知今古者爲之 何至於此爲之太息”, 《해동역사》 續)라고 하여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명나라가 국가 차원에서 편찬한 지리지 편찬자들을 역사적 사실도 모르는 학자들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 학자 고조우도 중국 역사 지리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1678))에서 그 영평부는 산해관 서쪽 180리에 있었다고 하였다.(“永平府 東至山海關一百八十里...後魏亦曰遼西郡 兼置平州 又分置北平郡”, 《독사방여기요》)

북위(北魏) 북평군 조선현이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이었다고 명기(明記)되어 있는데도, “후위 때 요서나 북평 등지에 설치된 낙랑과 대방은 한나라 때 군현과는 서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서 단지 그 이름만을 취한 것이다.”라고 강변하기도 하였다. 한사군의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에 병합된 후 모용외에 의해 요서에 교치(僑治)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진서가 인용한 《자치통감》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교치되었다는 낙랑군이 한반도의 평양에 있었다는 기록이나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중국의 문헌에 의하면 고대 요동에 있던 낙랑군이 고구려와의 전쟁 과정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한진서 역시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것을 고증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수경주(水經注)에 근거하여 지금의 평양에 한사군 낙랑군이 있었다고 주장(“鎭書謹按 朝鮮縣卽樂浪郡之治也 據水經注今平壤府是也”, 《해동역사》 續)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수경주를 쓴 역도원은 한반도 평양이 한사군 낙랑군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도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다”고 말한 고구려 사신의 말을 듣고 ‘그 땅은 지금(6세기) 고구려 도읍인데, 고구려 사신 말처럼 도읍이 패수의 북쪽에 있다면 그 강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을 경유하여 서북쪽으로 흐르는 것’이라고 말했을 따름이다.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다른 사료들은 모두 무시하고 ‘도성이 서쪽으로 흐르는 강의 북쪽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도 빈약한 논리이다. 게다가 대동강은 평양을 지나고 나서는 ‘서북쪽이 아닌 서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ʻ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이 한반도에 있었는가?ʼ는 조선 초 세종 때에도 의문이 제기된 사안(“禮曹判書申商啓曰 三國始祖立廟 須於其所都...高句麗則未知其所都也”, 《세종실록》)이었으며, 5세기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지금의 요동지역에 있는 요양이라는 연구결과도 발표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역도원이 말하는 서쪽으로 흐르던 6세기의 패수는, 낙랑군이 존재하던 당시 누방현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던 패수와는 강물의 흐름이 정반대인, 서로 다른 강이었던 것이다.

역도원 《수경주》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낙랑군이 존재하던 당시 누방현에서 나와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 패수는 서고동저(西高東低)형 지형에 있었고, 서쪽으로 바다로 들어간 6세기 패수는 동고서저(東高西低)형 지형에 있어서 강물의 흐름이 정반대인 서로 다른 강이었다는 사실이다.

한진서는 고증은 하지 못한 채 한사군의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고 전제하고 나서 요서에 교치되었다고 주장하였을 뿐이다. 안정복의 주장을 이어받은 한진서의 ʻ낙랑군 교치설ʼ은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반도사》를 편찬한 이미니시 류가 다시 주장하였고, 노태돈이 ʻ313년 평양의 낙랑군이 소멸된 후 낙랑·대방군 등은 요서지방에 이치되었다ʼ고 이어받은 후 현재 주류 강단사학의 통설이 되었다.

ʻ한사군의 위치를 요동 지역으로 잘못 비정하고 있는 견해를 비판ʼ한 한진서의 ʻ교군(僑郡)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탁견ʼ이라고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진서도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것을 고증하지는 못한 상태에서 요서 교치설을 주장하였으므로, ʻ한사군의 위치를 요동 지역으로 잘못 비정하고 있는 견해를 비판ʼ했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공허한 주장일 뿐이다. 요서로 교치되기 전에 ʻ낙랑군은 한반도의 평양에 있었는가?ʼ가 문제의 핵심인데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증도 입증도 없다. ʻ낙랑군은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ʼ는 근거 제시도 없는 주장만 난무할 뿐이다.

역사학자들이 어떻게 인식을 하던 서고동저형 지형이 동고서저형 지형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만리장성 동쪽에 있으면서, 낙랑군 누방현에서 동남으로 흐르는 패수가 동으로 바다로 들어가는 서고동저형 지형은, 동고서저형 지형인 한반도나 요동지역이 아닌 지금의 요서지역인 연산산맥 근처일 수밖에 없다. 자연지리학인 지형학에 의하면 고대 평양은 한반도 평양이 아닌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고조선 중심지 논의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받는 자료인 《위략》의 ʻ백리의 땅을 봉해 서쪽 변경을 지키도록 했다ʼ는 기록(“魏略曰...燕人衛滿亡命爲胡服東度浿水 詣準降說準求居西界...準信寵之 拜爲博士賜以圭封地百里 令守西邊”, 《삼국지》)은 너무도 명확하게 지금의 평양이 아님을 역설(力說)한다. 지금 평양 중심부와 서해안 바닷가까지의 거리는 평면지도상으로 36km 내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평양 서쪽에는 (위)만에게 봉해줄 100리의 땅도 존재하지 않고 변경지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서쪽에 바다가 있어서 위만에게 봉해 줄 100리의 땅이 존재할 수 없는 지금의 평양은 낙랑군 조선현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익이 단군의 문화수준이 아주 낮았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한 이후, 안정복・한치윤은 단군의 사적을 터무니없고 근거가 없다고 인식하였고, 정약용・한진서는 단군왕검의 이름도 지명인 왕험에서 따온 것이라 하여 단군왕검을 부정하였다. 안정복이 정통의 시작에 대한 혼란한 인식을 보여준 이후 정약용과 한치윤・한진서는 역사의 정통에서 단군조선을 삭제하였다.

조선 유학자들은 낙랑군 조선현 위치를 대체로 평양에 있었다고 ‘인식’하는데 그쳤다. 남인 실학자인 안정복・정약용・한치윤・한진서는 모두 중국 사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문헌 고증을 통해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음을 적극적으로 ‘입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지리 고증 방식은 ①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장만 하고 ② 자신의 주장과 상반되는 부분은 원(原) 사료를 인용할 때 일부러 배제하고 ③ 자신의 주장과 배치되는 학자 의견은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배척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ʻ한사군 낙랑군 = 한반도 평양ʼ이라는 가설이 수용되기 전에 먼저 증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그 가설에 기반한 전체구조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원시유학에 관심을 두고 문화의 층위(層位)를 기준으로 화・이를 구분했던 남인 실학자들은 기자에 대한 존숭(尊崇)을 더욱 강화하였고, 그만큼 더 단군시대의 문화수준을 저열하게 인식하였다. 심지어는 단군왕검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남인 실학자들의 역사인식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을 거쳐 주류 강단사학으로 계승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