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학에 실용적 사유와 경세론을 결합시켜 실학을 정립한 조선 실학의 최고봉으로 알려진 정약용이지만 그의 고대사 인식에는 단군조선은 물론 단군왕검도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 기록이 아닌,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기록들은 모두 허황되고 거짓되어 근거가 없다(“故我邦史冊 據漢魏晉諸史 點綴成文 其或收拾於本國之傳記者 皆虛荒誕妄不根之說”, 《아방강역고》(1811) 변진고)는 기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약용은 단군에 대한 믿을만한 문헌자료가 없다고 보았다. 우리나라 사람들 글에 선인 왕검이란 설이 두루 실려 있지만 왕검(王儉)이란 이름도 지명인 왕험(王險)에서 꾸며낸 것으로 보았다.(“鏞案易曰 王公設險 以守其國 平壤之別名王險 蓋此義也 檀君之都於平壤 亦無信文 況姓名之爲王儉 有誰知之仙人王儉之說 徧載東人之筆 然改險爲儉 旣甚穿鑿”, 《아방강역고》) 단군의 도읍 임검성(壬儉城)의 ‘검(儉)’자를 중국 사서에서 ‘험(險)’으로 잘못 썼다고 보는 선가(仙家) 북애자와는 역사 인식 기준이 완전히 달랐다.

기자를 정통의 첫머리로 삼는 것은 17세기 남인 홍여하의 관점을 이은 것이나, 홍여하가 단군의 역사적 실재는 인정하되 혈통이 단절되었다고 본 것과는 달리 정약용은 단군왕검 자체를 부정한 것이다. 조선 건국 이래 ‘단군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을 받은 임금’이라는 조선 유학자들의 한국고대사 인식을 전면 부정하고 결국, 중국인 기자로부터 한국고대사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았다. 단군왕검을 부정하는 이러한 인식은 한치윤의 《해동역사》, 김택영의 《역사집략》을 거쳐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에게 이어졌다.

정약용은 한백겸을 이어 남북이원론적인 국사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기자조선-한사군-고구려-발해로 이어지고, 남쪽은 토착세력인 마한이 삼한을 주도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양나라 무제(재위:502~549) 이전에는 신라가 아닌 진한의 이름을 썼다 하고, 양한·위·진 시기가 삼한 시대와 같다(“兩漢·魏·晉之際 與我三韓之國時代實同”, 《아방강역고》)고 하여 4세기까지도 삼국이 아닌 삼한 시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하는 식민사학-주류 강단사학의 주장은 기실 정약용에게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열수(한강) 남쪽은 궁벽하나 북쪽은 중국과 가까워 문명이 조금 빠르다(“洌水以北 近於中國文明差早 洌水以南 益復荒遠”, 《아방강역고》)하여 문명은 중국으로부터 전파되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고대사 중심 무대를 요동지방에 두지 않고 한반도에만 국한하여 두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인 정약용의 지리고증 태도는 17·18세기 선배학자인 한백겸과 안정복의 역사지리 연구성과를 계승 발전시킨 것인데, 송호정은 정약용의 고조선 지리 고증에 대해 “실학자들의 문헌 고증에 입각한 역사지리 연구 가운데 최고의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정약용의 지리고증 방식 또한 아주 독특하다.

정약용은 아무런 문헌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위만의 도읍이었던 낙랑군 조선현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정약용이 인용한 중국문헌에는 낙랑군 속현인 열구현은 요동에 있다(“列口 郭璞注山海經云 列水在遼東”, 《아방강역고》)고 하였고,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의 기점이 있다(“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 有碣石山長城所起 通典云 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 長城起於此山”, 《아방강역고》)고 하였다. ʻ요동과 갈석산과 만리장성ʼ. 너무도 분명하게 한반도 안에는 있을 수 없는 지명이 나오므로, 고증을 위해서는 반드시 설명이 필요함에도 정약용은 이를 무시 혹은 회피하고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조선왕 만이 왕험성을 도읍으로 하였다는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에 대해, 남북조 시대 유송(劉宋)의 배인(裴駰)은 《사기집해》에 인용하기를, 동진과 유송의 관료이자 학자였던 "서광(徐廣)은 (요동군 18현 중 하나인) 험독현이 창려에 있다"고 하였다.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은 《사기색은》에서 후한의 "응소는 지리지에 의거 요동군 험독현은 위만조선의 옛 도읍이라고 주를 달았다"고 하였고, 서진의 "신찬(臣瓚)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말했다"고 인용하였다.

중국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위만조선의 도읍인 험독현 또는 왕험성은 요동군에 있다는 것인데, 의견이 달랐던 정약용은 ʻ어찌 (지금의 평양에 있어야만 할) 위만의 도읍이 요동군에 있을 수 있느냐. 그들이 제멋대로 비정했다ʼ고 무시하였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ʻ위만의 도읍인 왕험성이 요동에 있었다면 지금의 평양에는 있을 수 없으니 서광, 응소, 신찬 등이 틀렸다(“險瀆 旣是遼東屬縣 安得爲衛滿所都 徐廣・應劭・臣瓚之等 妄爲之說耳”, 《아방강역고》)ʼ고 일방적이고 공허한 주장만 했을 뿐이다. 자신의 주장과 배치되는 사서 내용이나 다른 학자의 의견을 배척하였지만 자신의 선입견말고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정약용이 인용한 《수서(隋書)》에는 수양제의 113만 대군의 24道(공격로)가 모두 압록수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정약용은 양평과 후성만이 요동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모두 낙랑군에 속하는 현인데 낙랑의 모든 현이 어찌 모두 요동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24로는 과시용일 뿐 근거가 없고 요동 1로가 맞다고 주장하였다. 24군으로 나누어 나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隋煬帝二十四軍之詔 但欲夸耀焜煌 全無實踐 不可據也 隋唐之伐句麗 惟有遼東一路 安得二十四軍 分道各出 大無理矣”, 《아방강역고》)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믿은 정약용에게 낙랑군의 속현들이 요동에 있다고 기록된 《수서》 믿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약용은 이에 대해서도 주장만 할 뿐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기록도 아닌, 국가의 운명을 걸고 고구려와 건곤일척의 전면전을 벌인 수나라 황제 양광의 조서 내용을 "과시용·이치에 맞지 않는다"라고 간단하게 치부(置簿)해 버리는 것을 문헌을 고증하는 학자의 태도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수양제의 조서에는 24개의 공격로가 나와 있다. 수나라의 대군은 한나라 낙랑군에 속하는 현이었던 ʻ조선, 함자, 점제, 대방, 해명, 장잠, 누방, 제해, 혼미, 동이ʼ도를 포함한 24개의 공격로를 통해 평양으로 집결하라고 조서에 나와 있는 것이다. 낙랑군의 여러 속현을 지나고 나서 평양으로 집결하라는 것은 그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심할 나위 없이 명백하게 하는 것이다. 수양제의 조서는 낙랑군이 요서나 요동지역에 있었기에 가능한 명령이었다.

17세기 중국에서 이단으로 몰려 금서 처분까지 받은 이탁오의 사상도 망설임 없이 수용하여 탈주자학적 경전해석의 근거로 사용한 정약용이었으나, 그러한 과단성은 유학의 범주 내에서의 일에 국한되었다. 고래(古來)의 선도적 역사인식에 근거한 선도사서 기록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부정으로 일관하였다. 성호학파의 경세치용학과 북학(北學)의 이용후생학을 합쳐 조선실학을 집대성하고, 정조를 보좌하며 개혁에 참여한 실학의 대가로 칭송을 받는 정약용이었으나, 한국 상고·고대사를 보는 인식은 고루한 유학자의 관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한국고대사 중심 무대를 한반도에서 찾은 정약용의 지리 고증 방법은 "다산은 기록은 무엇이나 믿는 비과학적 태도를 버리고, 기록 자체를 비판하는 엄밀한 과학적 태도를 견지하여 문헌고증학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지금도 높게 평가된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와는 달리,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약용은 기록을 비판적으로 보지 못하고 상호 모순되는 결론을 내리기도 하였다.

동천왕 21년(247년) 낙랑이 평양을 잃어 고구려에 넘어갔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그러고 나서 7년 후에 낙랑군으로 귀양보냈다는 가평(嘉平) 6년(254)의 〈위지〉 기록을 같이 제시한 후, “평양은 고구려에 속해 있었지만 낙랑군은 여전히 위나라에 복속되어 있었다”(“鏞案 罪人流徙必在內服之地 則此時平壤雖屬句麗 樂浪郡之依然內服 可知也”, 《아방강역고》)는 모순된 결론을 내린다. 자신의 신하를 귀양 보내는 곳은 다스리는 영토 안에서만 가능한데 낙랑군으로 귀양을 보냈으니, 평양은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지만 (평양에 있다는) 낙랑군은 위나라가 다스리는 영토라는 것이다.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은 한반도의 평양이고 낙랑군은 한반도의 평양에 있었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기록은 무엇이나 믿는 비과학적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기록 자체를 비판하는 엄밀한 과학적 태도를 견지"하지 못한 것이다.

정약용은 심지어 고구려가 가장 강성했던 광개토태왕, 장수태왕과 동시대인 북위(386~534) 때에도 낙랑과 대방은 중국에서 바다 건너 다스렸다고 주장하였다.(“鏞案...地形志所云樂浪帶方 亦在我邦域之內 魏人越海而遙領 非在鴨水之西也”, 《아방강역고》) 낙랑군이 영주(營州)에 속해 있다는 중국 사료를 인용하였으나 낙랑과 대방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유교사학 ʻ이데올로기ʼ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냉철한 사료 비판을 하지 못한 것이다. 중국의 다양한 사료 기록과 함께 당시 여러 지식인들이 낙랑의 위치를 고대 요동으로 비정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鏞案 今人多疑 樂浪諸縣 或在遼東”, 《아방강역고》)으나 정약용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역사 지리는 1차 사료에 대한 엄밀한 검토를 바탕으로 비정해야지 특정 이데올로기로 비정하면 안 된다는 좋은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