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2부에서 선도사학에서 바라보는 상고・고대사를 한민족 고유의 사유체계와 제천의례, 한민족 역사의 시작, 단군조선의 문화수준, 역사 정통의 계승, 위만조선 도읍지에 세워졌다는 낙랑군 조선현 위치라는 다섯 가지 항목을 기준으로 정리하였다. 선도사학은 중화주의 유교사학에 의해 왜곡되어 전승되었는데 왜곡의 기본 방향 역시 다섯 가지 항목으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한민족 고유의 사유체계와 제천의례에 대한 인식이다. 존재의 본질을 밝음・생명(氣)・양심으로 인식하고, 밝음을 온전히 갖춘 사람이 수행을 통해 내면의 밝음을 우주의 밝음과 일치시키고 이상적인 공동체를 현실에서 구현(홍익인간・이화세계)한다는 선도사학의 홍익사관은 유교사학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중국을 내(內:華)로 이적(夷狄)을 외(外)로 인식하고 이내제외(以內制外:안이 밖을 제압한다)의 화이론에서 출발하는 중화사관은 분리와 대립, 지배・통제가 사유와 실천의 대전제이므로 조화・상생의 홍익사관과는 사유체계가 달랐기 때문이다.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하늘과 땅의 소통은 천자의 독점적인 권한이다. 하늘과 땅의 연결을 끊어 하늘과 인간의 연결을 천자 1인이 독점하는 사유체계에서 국가・사회적인 제천행사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조선시대 유교사서에서 선도적 사유체계와 제천의례가 기록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선도사서를 참고하여 『동국역대총목』(1705)을 쓴 조선후기 홍만종이 『삼국유사』를 인용하면서도 한국선도 사유체계의 궁극적 목적인 홍익인간・재세이화는 인용하지 않았던 것에서 확인된다. 이종휘가 『동사(東史)』(1803)에서 선도사서를 인용했음을 밝혔으나, 유교에서 제천은 천자만의 권한이었기에 제천행사를 귀신숭배로 이해하고 서술하였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둘째, 한민족 역사의 시작에 대한 인식이다. 선도사학에서는 우리 역사의 시작은 환웅천왕의 배달국에서 비롯한다고 보았다. 조선전기 유교사학에서는 신인이 단목 아래 내려왔는데 국인들이 왕으로 삼았다(“有神人降于檀木下 國人立爲君”, 東國通鑑)고 기록하여, 환웅과 단군을 하나로 합쳐 단군조선이 건국되었다고 하였다. 신단수 아래 내려 온 신인이 환웅이 아닌 단군으로 기록되면서 역년이 1565년에 달하는 배달국 역사는 삭제되었다.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표지. [사진출처  규장각]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표지. [사진출처 규장각]

조선시대 유교사학에서는 역사와 혈통의 시작은 대체로 단군에서 비롯한다고 인식하였다. 단군조선 대신에 기자조선을 우리 역사의 시작으로 해석하여 단군조선의 정통성을 부정하였던 홍여하의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1672)에서도 우리 역사의 시작은 단군에서 비롯된다고 인식하였다.

셋째, 단군조선의 문화수준에 대한 인식이다. 선도사학에서는 유학자들이 기자 시기의 치적으로 삼는 문화 교화가 단군조선 시기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조선전기 유교사학에서는 기자 시대에 중국 문화가 전파된 후 조선이 문명국이 된 것으로 바라보았다. 단군조선 문화수준은 상대적으로 낮다고 본 것이다. 선도사서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선도적 역사인식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인되는 권람도 같은 인식이었다. 조선후기에도 단군조선의 문화수준은 대체로 조선전기와 같이 저열하다고 보았다.

넷째, 역사 정통의 계승에 관한 인식이다. 선도사학에서 ‘배달국단군조선부여열국(列國)’으로 정통이 계승되었다고 보는 것과는 달리, 조선전기 유교사학에서는 역사 정통은 ‘단군기자위만사군이부삼한삼국’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단군은 혈통의 시작일 뿐 정치와 문화는 기자시대에서야 발전했다고 인식하였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보니 주(周)나라에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르쳐준 현인이자 중화 문화를 이 땅에 전수하여 동방을 소중화로 만들어 주었다는 기자가 가장 중시되었다.

17세기에 정통론이 등장한 이후 조선후기 유교사학에서는 정통을 찬탈하였다는 ‘위만한사군’이 빠지면서 역사 정통은 ‘(단군)기자마한신라’로 승계된다고 보았다. 영남 남인의 역사인식을 반영하는 홍여하의 동국통감제강은 기자를 정통의 첫머리로 삼았다는 면에서 역사 정통은 단군에서 비롯된다는 기왕의 인식과는 아주 달랐다. 주자학 명분론에 충실한 입장에서 동국통감을 주자강목법에 맞추어 개찬한 동국통감제강에서 홍여하는 단군조선 대신에 기자조선을 우리 역사의 시작으로 해석하여 단군조선의 정통성을 부정하였다.

홍여하는 중국인 기자로부터 그 후손인 기준왕(箕準王)의 마한을 거쳐 기자의 정통을 잇는 신라로 이어진다는 새로운 정통관계를 수립하여 우리 역사의 체계를 바꾸고자 하였다. 1644년 중국 대륙 주인공이 오랑캐로 여겨졌던 청나라로 바뀌면서 천하에는 오직 소중화만이 남게 되었다고 보는 인식에서는 중화문명 전수자요 중화의 합법적 수봉(受封)군주인 기자에 대한 숭상이 강화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한영우는 홍여하의 역사서술을 “국사의 위치는 이(夷)가 아니라 화(華)로서 정립된다”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실상 한(韓)민족 역사를 중화 정신 즉, 중국인의 정신으로 새로이 쓴 것을 말하는 것이다.

주자학 명분론에 충실한 중화사관에 입각하여 단군 정통을 부정하자 우리 역사는 중국인 기자로부터 시작하는 역사로 변질되었다. 물론, 공자가 중화문명 정수로 인정한 주(周)나라에 홍범구주를 가르친 현인(賢人)이자 중화의 선진문물을 전파하여 동방(東方)을 소중화로 탈바꿈시킨 교화(敎化)군주라는 관점에서의 역사서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군 정통이 부정된 상태에서 초점이 ‘중국인’ 기자에 맞추어지자 우리 역사 출발점은 중국인 기자로부터 시작되는 역사, 중국 식민지로부터 시작된 역사로 변개되었다. 중화사관에 철저히 물든 조선후기 유학자의 붓끝에서 시작된 단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이익・안정복・정약용・한치윤・한진서 등 남인 실학자들에게 이어지면서 후일 식민사학과 동북공정이라는 거대한 담론에 악용되었다.

마지막으로, 위만조선 도읍지에 세워졌다는 낙랑군 조선현 위치에 대한 인식이다. 선도사학에 의하면 기준왕은 고대 요동에 있던 번조선 왕이었다. 위만의 왕검성은 번조선 기준왕의 도읍에 세워졌다. 위만정권이 내부 반란으로 무너지고 서한에게 항복한 후 세워진 낙랑군 위치는 당연히 번조선 지역에 있었다.

조선전기 유교사학은 단군, 기자, 위만의 도읍을 모두 한반도 평양 일대로 보았다. 따라서 고대사 중심무대는 한반도로 축소되었다.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한백겸은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1614)에서 최초로 지리비정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그는 낙랑군에서 발원하는 열수(列水)가 요동에 있다는 중국 문헌을 인용(“郭璞云 山海經曰 列 水名 在遼東”, 東國地理志)하면서도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 있다고 모순되게 주장하였다. 무리한 추정이나 단정에 근거하거나 지명 한 글자가 같으면 억지로 끌어 붙여 유리하게 해석하는 독특한 고증방법을 통해 한서지리지 낙랑군 속현들을 한반도 안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영조 때 학자 신경준은 수성(遂城)은 요동지역에 있었는데 한백겸이 수안(遂安)의 수자(遂字)에 억지로 끌어 붙였다고 비판하였다.

한백겸은 삼한을 북쪽 조선과 대등한 정치세력으로 보는 남북이원적 국사체계를 세웠다는 평과 동시에 단군조선을 한강 이북으로 한정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남북이원적 고대사 인식은 정약용과 식민사학을 집대성한 조선총독부 교과서(심상소학일본역사 보충교재 교수참고서1)를 거쳐 2015 교육과정 중학 역사교과서와 고등 한국사교과서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고조선 표지유물인 비파형동검이 한강 이남은 물론 제주도에서도 출토되었다고 지도에는 표시하지만, ‘고조선 문화범위’는 한강 이북으로 제한하는 기이한 역사인식의 출발점이었다.

조선후기에도 많은 학자들은 고대사 중심무대였던 고대 평양(한사군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선도사서를 참고한 허목의 『동사(東事)』,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 이종휘의 『동사(東史)』도 여기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이익은 관구검이 현도군에서 출병하여 낙랑군으로 퇴각하였다는 사료를 들어 낙랑과 현도는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낙랑군 치소(治所)는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하였으나 관할지역이 평양까지였다고 보는 점에서는 ‘재평양설’과 ‘재요동설’을 절충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유교사학은 기본적으로 선도사학의 상고・고대사를 왜곡하였다. 중화주의 유교사관에서 수용할 수 없는 배달국, 민족 고유의 사유체계와 제천에 대한 기록은 삭제하였다. 우리 역사 시작을 환웅이 아닌 단군으로 보았고, 단군조선의 문화수준은 낮았다고 평가하였다. 정통 계승은 선도사학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기자를 중심에 놓았고, 낙랑군 조선현 위치를 지금의 평양으로 보아 역사 강역을 축소하였다.

* 선도사학의 영향과 한계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유교사관과 유교사학이 성행하면서 선도사학은 저류화되었으나 유가 쪽 역사인식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단지 유교사서에 단군에 대한 기록이 실린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권람은 단군 이전 환웅천왕을 기록하였고, 허목은 환웅 신시씨에서 우리 역사가 비롯하는 것으로 보았다. 홍만종도 천신의 아들이 단군이라는 자신의 의견(按)을 밝혔다.

조선초기 권람은 응제시주(應製詩註)(1462)에서 선도적 사유체계가 실천되는 사회인 재세이화를 기록하였는데, 이는 선도적 역사인식이 영향을 미쳤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종휘는 『수산집(修山集)』(1803) 신사지(神事志)에서 비록 제천행사를 귀신숭배로 이해하고 서술하였으나, 신교(神敎:한국선도) 기원이 신시시대였음을 밝히고, 단군이 즉위하고 마니산에 참성단을 지어 항상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제천 전통이 고구려까지 이어졌음도 기록하였다. 이종휘는 독단적인 유교 이데올로기에 빠진 다른 성리학자들의 태도와 달리 선도사서를 인용했음을 밝히기도 하였다.

홍만종과 이종휘는 단군의 치적을 다양하게 제시하여 단군의 역사성과 실재성을 높임은 물론 단군조선이 상당한 수준의 문화를 가진 사회였다는 인식을 보여 주었으나 기자시대에 문화가 발전했다는 유교사관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또한, 태자 부루의 도산회합을 조(朝:알현)라고 기록하여 회(會:만남)로 기록한 선가의 자주적인 관점(檀君世紀)과는 달리 유학자의 사대적인 관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역사 정통의 계승에서 ‘부여’를 주목한 경우도 있었다. 허목은 『동사(東事)』에서 유교사학에서 정통으로 인정하는 ‘단군기자위만사군이부삼한(마한)신라’로의 계승과 더불어 ‘단군부여고구려’의 계승도 인정하였다. 이는 주자성리학을 거부하고 직접 고경(古經)의 세계로 뛰어들어 원시유학 본래 모습에서 유학 정신을 찾으려 하였던 허목이지만, 육경(六經:시경・서경・역경・춘추・예기・주례) 고학(古學)에만 얽매이지 않고 선도사서의 영향도 받았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사군 낙랑군 위치에 대해 김부식 이래의 ‘재(在)평양설’이라는 유교사학 통설과는 다른 흐름도 있었다. 조선초기 권람은 관구검이 현도군에서 출병하여 낙랑군으로 퇴각하였다는 사료를 들어 낙랑군이 요동 지역에 있었다고 보았다.(“東川王時 魏幽州刺史毌丘儉將萬人 出玄菟來侵...遂自樂浪而退...則樂浪非平壤明矣”, 응제시주) 조선후기 유교사학에서도 낙랑군이 있었던 고대 평양 위치에 대해서 정약용이 거론했던 것처럼 ‘재(在)요동설’이라는 흐름이 대두되었다.(“鏞案 今人多疑 樂浪諸縣 或在遼東”, 『아방강역고』) 북학파였던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낙랑군 조선현이 지금의 평양이 아닌 요양의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였고, 김경선(金景善:1788∼1853)도 『연원직지(燕轅直指)』(1833)에서 낙랑군 치소를 요양의 평양으로 보았다.

권람・허목・홍만종・이종휘는 모두 선도적 역사인식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농후하지만 중화주의 유교사관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민간에 있던 선도사서를 조정에서 강제로 수거하던 15세기에 비해 주자성리학 영향력이 더 확대되었던 16세기에도 선도사서의 명맥은 끊기지 않았다. 『단군세기』를 지은 행촌 이암의 현손 이맥은 가장(家藏) 사서와 내각(內閣) 비서(祕書)의 내용을 종합하여 『태백일사』를 편찬했다.

명・청 교체로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바뀌는 17세기에도 주자성리학은 정통론을 주창하며 굳건히 주류 사상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이 시기에도 존화 사대의식에서 벗어나서 고유의 종교・윤리・언어・전통을 지키며 민족 주체성・자존의식 보존을 강하게 주창하는 선도사서 『규원사화』가 저술되었다. 그러나 편찬자의 이름조차 밝히지 못하는 엄혹한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