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월 19일은 “3·1운동 민족대표 중 한 분으로 우리 민족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그은 의암 손병희(1861. 4. 8.∼1922. 5. 19) 선생의 순국 100주기이다.

천도교(교령 박상종)와 (사)민족대표33인기념사업회(이사장 김재옥)가 주관하여 의암 손병희 선생 '순국 100주기 추도제'를 5월 19일(목) 오전 9시부터 서울 봉황각(강북구)과 천도교 중앙대교당(종로구)에서 봉행했다. 이 추도제에는 이남우 국가보훈처 차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천도교 회원, 기념사업회원, 관련 유족, 일반 시민 등 400여 명이 참여했다.

손병희 선생은 우리 민족 최대의 항일독립운동인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천도교 측의 대표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선생은 이 때문에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구금되었으며,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1922년 5월 19일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의암 손병희.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의암 손병희.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1861년 4월 8일 충청북도 청원(淸原)에서 태어난 선생은 1882년(고종 19)에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고종 21)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동학혁명군과 논산(論山)에서 합세하여,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元山)·강계(江界) 등지에서 은신생활을 하였다.

1897년(광무 1)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1년(광무 5) 일본을 경유해서 상해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으로 개명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전해 듣고, 1905년(광무 9)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최시형의 뒤를 이어 3세 교주로 취임하여 교세확장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설하고 보성학교(普成學校)와 동덕학교(同德學校)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도 공헌하였다.

1908년(융희 2) 박인호(朴寅浩)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崔麟)·천도교 도사(道師)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사항을 협의하였다.

선생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과 3·1독립운동의 골간이 된 대중화(大衆化)·일원화(一元化)·비폭력화(非暴力化)의 3대 원칙에 합의하고 각 교계의 중심인사들을 규합해 갔다. 그리고 1919년 1월 초 전국의 천도교 교인들에게 ‘49일기도회’를 실시하게 함으로써 3·1운동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다지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하순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고,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제반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불교에 대한 동지규합이 진행되었다.

천도교 자료에 따르면 선생은 2월 22일 서울 우이동 봉황각에서 3.1독립운동을 앞두고 실시한 49일 특별기도가 끝나는 날 아침에 전국의 천도교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崔南善)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선생은 권동진·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나용환(羅龍煥), 장로 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 교인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의 자택으로 동지들을 불러 회합하는 자리에서, 당초에 독립선언 장소로 정한 파고다 공원에서 학생들이 모여 독립만세 운동을 벌일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장소를 인사동(仁寺洞)에 있는 명월관(明月館)지점 태화관(泰華館)으로 변경하였다. 또 당일에는 이갑성(李甲成)에게 조선총독부에 조선독립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서를 제출하여 알리고, 회합장소를 떠나지 않고 조용히 포박 당하기로 약속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선생은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李鍾一)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회람하게 한 후, 한용운(韓龍雲)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쳤다. 그리고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1920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선생의 나이 62세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각계에서 애도를 했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는 ”先生(선생)은 民衆的(민중적) 一大偉人(일대위인)“이라고 하였다.

” 조선 사천년사를 통관하면 그 간에 영웅호걸이 불무하였으나 흔히는 군주중심이 아니면 귀족을 배경으로 하여 그 업을 이루었으며 그名(명)을 成(성)하였소.
그러나 선생에게 至(지)하여는 민중 간에 生(생)하야 민중적으로 활동하고 민중적으로 대업을 成(성)하려하는 始終一貫(시종일관)한 주의(主義)는 선생 일대의 위업(偉業)이외다.
이것이 조선이 장차 민중문화를 건설하려는 劈頭(벽두)의 위인이 아닌가 합니다. 또한 선생의 모든 경력이 민중적이 됨으로 그 出處(출처) 進退(진퇴)에 정의(正義) 인도적 정신이 橫溢(횡일)한 것이 朝鮮偉人史上(조선위인사상)에 一光彩(일광채)를 더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천도교 ‘의암성사환원호’)

선생의 유해는 삼각산 동쪽 우이동 언덕에 안장하였고 1966년 민족의 얼이 깃든 탑골공원에 선생의 동상을 세웠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는 손병희 선생의 유해가 안장된 서울 수유리 묘역을 지난해 1월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했다. 특히, 올해 순국 100주기를 맞은 손병희 선생 묘역의 노후화된 진입로 돌계단을 나무계단으로 시공하는 등 정비 공사를 이달 중 마무리하여 방문객의 편의와 안전을 도모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