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대중의 반역

11. ‘자만에 빠진 철부지’의 시대

오르테가는 11 ‘자만에 빠진 철부지’의 시대에서 먼저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유럽은 역사상 처음으로 그렇고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결정에 맡겨졌다”고 요약하였다. 이 표현을 능동태로 바꾸면 예전에는 지배의 대상이었던 평균적인 사람들이 이제 세계를 지배하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세계를 지배하겠다고 나선 평균적인 사람들, 대중의 심리구조를 사회생활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삶은 수월하고 풍요로우며 비극적 제한이 없다는 선천적이며 근원적인 인상. 따라서 평균인은 그 내부에 지배의식과 승리감을 지닌다.

둘째, 이런 지배의식과 승리감은 평균인에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게 하고 자신의 도덕적 및 지적 자산을 훌륭하고, 완벽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이런 자기만족이 외부에서 오는 일체의 견해에 마음을 닫게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고, 자신의 의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게 한다. 그 내면에 있는 지배의식은 끊임없이 그를 부추겨 지배력을 행사하게 한다. 그래서 마치 자신과 자신의 동료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셋째, 그 결과 그는 모든 일에 개입하여 자신의 평범한 의견을 배려도 심사숙고, 절차나 유보도 없이 ‘직접행동’ 체계에 따라 관철시킨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대중을 오르테가는 ‘응석받이’ ‘반역하는 원시인, 곧 야만인과 같은 인간성 결함’을 지닌 인간형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의 인간을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상속자 행세만 하려는 상속인’으로 설명한다. 그러한 상속인은 물질문명이 만들어낸 기형이라고 표현한다.

“오늘날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어디에서나 자신의 야만성을 강요하는 이런 유형의 인물은 사실상 인류 역사가 낳은 응성받이아이이다. 그는 오로지 상속자 행세만 하는 상속자이다. 이 경우 유산은 문명, 즉 문명의 모든 혜택인 각종 편의와 안전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우리 문명이 만들어낸 생활의 안락함 속에서만 위와 같은 일련의 특징을 지니고 그러한 성격의 고무를 받은 인간의 출현이 가능하다. 이런 인간은 물질적인 사치가 만들어낸 여러 기형 가운데 하나이다.”

오르테가는 이 기형의 유형을 모든 ‘세습귀족의 비극’으로 비유하여 설명한다.

“귀족이 뭔가를 상속한다는 것은 자신이 창조하지 않고, 그래서 자신의 개인적인 삶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않고 만들어진 삶의 조건들을 부여받는다는 점이다. 태어나면서 영문도 모르면서 돌연 부와 특권을 쥐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본래 그 자신은 그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그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부와 특권은 누군가 다른 사람, 다른 인간, 곧 그의 조상이 남긴 거대한 갑옷이다. 그래서 그는 상속자로 살아야 한다. 즉 그는 다른 사람의 갑옷을 입어야만 한다.”

이렇게 하는 세습 귀족은 “자신의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최초 귀족이 된 조상의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삶을 재현해야 하며,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도 자신도 아닌 존재를 강요받게 된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그의 삶은 모든 진정성을 잃고 타인의 삶을 재현하거나 허구적인 것으로 변형된다. 관리해야 할 과다한 재산은 그 자신의 독자적인 운명을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아 그의 삶이 위축된다.

“모든 삶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싸움이며 노력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어려움은 나의 활동과 능력을 일으켜 활용하게 한다.”

이러한 것이 없는 세습 ‘귀족’의 전인격은 삶의 노력과 활용 부족으로 점차 모호해진다. 그 결과 옛 귀족 가문 특유의 어리석음만 남는다. 이는 아직까지 아무도 그 내부의 비극적인 매커니즘-모든 세습 귀족을 어떻게 할 수 없이 퇴보하게 만드는 전통적인 매커니즘을 묘사한 적이 없는 어리석음이다.

그러므로 오르테가에 따르면 가능성이 넘치는 세계는 자동적으로 기형적이고 사악한 유형의 인간, ‘상속인’이라는 일반적인 유형의 인간을 낳는다. 이 상속인에 ‘귀족’은 특수한 예에 지나지 않고 응석받이도 있으며, 훨씬 더 광범하고 근본적인 예로서 우리 시대의 대중이 있다. 그러면서 오르테가는 귀족에게서 나타나는 주요 특징이 이제는 대중에게서도 싹트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즉 대중이 귀족을 모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삶의 주된 관심을 놀이와 스포츠에 두는 경향, 개인의 위생이나 의상에 관한 관심, 여성과의 관계에서 로맨티시즘의 결여, 지식인과 교류를 즐기면서도 때로는 하인이나 경찰관에게 채찍질하라고 명령하기, 자유토론보다는 절대적인 권위하에서 생활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 등.

이 교양 없는 가장 최근의 야만인은 근대문명, 특히 19세기 문명이 낳은 자동적인 산물임을 오르테가는 지적한다. 인간의 삶은 의지할 수 있는 자원과 그것으로 다루는 문제들이 균형을 이룰 때 생성하고 발전한다. 이는 신체적인 경우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경우에도 진리이다.

그런데 문제는 19세기 문명은 본질적으로 평균인이 풍족하여 넘치는 세계에 살게 하여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수단의 풍족함만을 느낄 뿐 그와 관련한 고통이 전혀 없었다. 즉 평균인은 훌륭한 도구, 치료약품, 앞날을 미리 고려해주는 국가, 편리한 혜택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도구, 약품을 개발하고 미래에도 생산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지 못한다. 또한 국가조직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알지 못하고 자신에게 어떤 의무가 있는지도 인식하지 못한다.

오르테가는 이런 불균형한 삶은 그의 본질을 훼손하여 그 뿌리가 흔들리게 하여 삶의 실체와의 접촉을 끊게 하는데 이는 절대적으로 위험하며 근본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 중에서 등장할 수 있는 가장 모순적인 삶의 형태가 ‘자만에 빠진 철부지’이다.

오르테가는 이런 유형의 인간이 사회에 지배적으로 될 때 삶이 몰락의 위협, 즉 상대적인 죽음의 위협에 처한다는 것을 알리고 경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자만에 빠진 철부지’가 유럽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유럽의 생활수준이 과거의 그 어떤 수준보다도 높기는 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이 수준을 유지할 수 없고,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갈 가능성도 낮고, 뒤로 물러서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질 우려조차 있다.

‘자만에 빠진 철부지’는 어떤한 유형의 인간인가? 오르테가는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라고 본다. 부모 슬하에서 가정에서 어떤 큰 잘못을 범해도 전혀 벌을 받지 않기 때문에, 집밖에서도 집안에서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보며 돌이킬 수 없고 취소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철부지’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여긴다.

운명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한다는 의식 속에서 명확하고 엄격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자만에 빠진 철부지’의 특징은 어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로 그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행동과 말에서 반대의 확신을 갖고 있는 것처럼 한다.

그 예로 오르테가는 유럽의 파시스트를 들고 있다. “파시스트는 정치적 자유를 반대한다. 바로 결코 정치적 자유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유럽인의 생활의 본질을 구성하며, 위기에 직면하여 진정으로 필요하게 되면 그 자유로 되돌아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대중에게 생활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불성실과 ‘농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모든 행동은 취소할 수 있다고 여겨, ‘부모 슬하의 철부지’가 무모한 장난을 하듯이 행동을 한다. 그들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비극적이고 단호하고 최종적인 태도를 서둘러 채택하는 것은 그저 보여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문명세계에 실제 비극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비극을 연기한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누군가 우리에게 받이들이게 하려는 것을 그의 진정한 모습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오르테가는 이런 대중이 유럽을 지배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지금 어릿광대극의 회오리바람이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다. 사람들이 주장하고 과시하는 자세가 모두 그 자체가 거짓이다. 사람들이 하는 유일한 노력은 자신의 운명에서 도망가는 것이다. 그 운명의 분명함을 보지 않고 그 깊은 곳에서의 호소에 귀를 막고 ‘마땅히 존재해야할 모습’과 대면을 회피한다. 우리는 희극적인 삶을 살고 있고, 쓰고 있는 가면이 외견상 비극적일수록 더욱더 희극적이다. 희극은 필연성에 기반을 두지 않는 삶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것에서는 의지할 만한 기반이 없다. 대중인은 자신의 운명의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기반에 발을 내딛지 않고 공중에 매달린 허구의 삶을 좋아한다. 그래서 지금은 전에는 없었던, 체중도 뿌리도 없는 이러한 삶이 운명으로부터 뿌리가 뽑혀, 가장 가벼운 풍조에 따라 이리저리 흘러다니고 있다.”

오르테가는 “지금은 풍조의 시대”이고 “그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닌다”고 본다. 그래서 거의 예술, 사상, 정치, 사회적인 관습에서 일어나는 천박한 회오리바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수사학이 난무한다. 초현실주의자가 그 예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현대 사회가 더욱 분명해진다. 일찍이 견유학파는 문명을 고의로 파괴한 것 외에 한 것이 없다. 자유에 대해 악평을 하는 것 제외한다면 파시스트는, 예술을 모독하는 제외한다면 초현실주의자는 무엇이겠는가?

오르테가는 지금까지 ‘자만하는 철부지’를 고찰하여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너무나도 훌륭하게 조직된 세계에 태어나서 그 세계로부터 어떠한 위험에도 없고 혜택만을 누리는 사람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 주위 환경이 그를 망치는데 그것이 ‘문명’ 즉 집이기 때문에 ‘부모 슬하의 철부지’는 자신의 변덕스런 기질을 버리고, 그보다 위에 있는 우월한 외부의 조언에 귀기울일 필요성은 조금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더더구나 그 자신의 가차 없는 운명의 심연과 대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