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경제수도’라 불리는 인구 2,400만의 상해(上海, 상하이)가 코로나19로 인해 봉쇄된 지 40일이 지났다.

시 당국은 수 차례 “도시 봉쇄는 없다”고 거듭 발표했으나 3월 27일 밤 급작스럽게 강도 높은 봉쇄령을 내려 시민들은 대비 없이 강제격리 상황을 맞았다. 계속되는 식량난과 의료공백, 강도 높은 방역 통제 속에 격리시설로 징발된 아파트 주민들은 쫓겨났고, 방역을 이유로 아파트 입구가 전면 봉쇄되어 갇히기도 했다. 제대로 된 치료와 구호 조치 없이 가족이 숨지는 참담한 상황에 처한 시민들은 신음하고 분노했다.

중국 상하이는 지난 3월 27일 이후 40일째 락다운 상태에 있다. [사진=페이스북 moneycontrol.com ]
중국 상하이는 지난 3월 27일 이후 40일째 락다운 상태에 있다. [사진=페이스북 moneycontrol.com ]

4월 14일 상하이 포동(浦東, 푸둥)을 비롯해 곳곳에서 공산당과 시진핑 주석을 비난하고 타도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현수막이 걸리고, “가축처럼 가뒀다”는 불만이 SNS로 퍼졌다.

인권이 무시되는 것에 분노한 상하이 시민들의 시위와 더욱 완고해진 당국의 봉쇄 상황은 1989년 ‘천안문(天安門, 톈안먼)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중국 공산당의 끔찍한 악몽 ‘천안문 사건’에서 시작된 애국주의 교육과 역사공정, 그리고 동북공정

올해는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대외에 공표한 2002년 2월 28일로부터 만 20년이 되는 해이다. 2022년 현재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고대사 침탈은 물론 한국의 전통문화인 김치, 한복, 그리고 안중근, 윤동주, 손홍민, 김연아까지 중국의 것, 중국인이라 주장하는 문화공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은 물론 세계가 인정하지 않는 논리를 SNS에서 펼치는 중국의 밀레니얼 세대 누리꾼 집단 소분홍(小粉紅,샤오펀홍) 청년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시진핑 시대 애국주의 교육을 받은 세대라는 점이다.

동북공정의 본질은 역사문제가 아니다. 천안문 사건으로 촉발된 애국주의 교육,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공정 중 하나로 시작되었다.

1990년대 중국 시조 염제와 황제 열풍인 염황열(炎黃熱)과 2000년대 후진타오가 공자를 내세운 유학열(儒學熱), 그리고 시진핑의 미래비전 중국몽(中國夢)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국가전략에서 동북공정은 출발한 것이다. 동북공정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데 필요하다.

'제로 코로나'정책을 이유로 40일째 봉쇄된 상하이의 상황은 1989년 천안문(톈안먼) 사건을 상기시킨다. [사진=Pixabay 이미지]
'제로 코로나'정책을 이유로 40일째 봉쇄된 상하이의 상황은 1989년 천안문(톈안먼) 사건을 상기시킨다. [사진=Pixabay 이미지]

첫 출발인 천안문 사건을 돌아본다. 천안문 사건 1년 전, 중국 CCTV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 ‘하상(河殤)’은 “중국 문명은 이미 오래전에 사망하였다”며 중국의 전통문화와 관료주의와 특권의식에 물든 공산당을 직접 비판했다.

급진적 서구화를 요구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지하에서 세차게 몰아치던 학생운동에 불을 붙였다. 1989년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중국의 전통문화와 사회주의를 버리고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 완전개조해야 한다고 외쳤다.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 통치를 부정한 ‘민중봉기’로 규정하고 무력으로 진압했다.

중국 공산당은 천안문 사건을 끔찍한 악몽이자 대위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구소련(소비에트 연방)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국내 개혁과 개방과 함께 동유럽의 민주화 개혁 등을 추진했다. 그 영향으로 1990년 독일이 통일되었고, 1991년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소수민족 공화국들이 탄생했다. 중국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로, 구소련과 같은 해체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중국 공산당은 1989년 천안문 사건의 원인을 민족 허무주의와 역사 허무주의에서 찾았다. 그리고 등소평(鄧小平, 덩샤오핑)은 젊은이와 청소년에 대한 사상교육이 부족하였다며 1994년 ‘애국주의 교육 실시 강요’를 선포하였다.

소수민족 분열을 막기 위해 중국은 고대부터 다민족으로 구성되었지만, 정치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국가였다며 소수민족에 의해 한족이 지배받은 원(몽골족), 청(만주족) 역사, 북방민족의 역사까지 모두 한족의 역사로 끌어안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한 역사 만들기에 돌입했다.

천안문 사건의 원인 ‘민족 허무주의’는 중국이 ‘문화대혁명’으로 자초한 것
문화대혁명의 시작, 홍위병이 모인 백만인 집회도 천안문 광장에서

그런데 중국인들이 민족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던 것은 중국 스스로 만든 덫때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둥) 주석은 1966년부터 무력을 동원해 이른바 ‘문화대혁명’을 추진했다.

북경의 천안문 광장은 1966년 8월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고자 전국에서 홍위병들이 모여 백만인대회를 개최한 장소이자, 1989년 민주화와 서구화를 외친 천안문 사건의 장소이다. [사진=Pixabay 이미지]
북경의 천안문 광장은 1966년 8월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고자 전국에서 홍위병들이 모여 백만인대회를 개최한 장소이자, 1989년 민주화와 서구화를 외친 천안문 사건의 장소이다. [사진=Pixabay 이미지]

모택동은 1950년대 대약진, 인민공사와 같은 정책을 추진했으나 실패해 수천만 명에 이르는 기아를 낳았다. 그는 위기를 벗어나고자 피폐한 현실의 원인을 전근대적인 문화와 자본주의에 돌렸고, 무자비한 비판과 규탄, 숙청을 거듭하며 공산당 독재의 사회주의 사회 기틀을 수립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중국의 유교 문화가 붕괴되었다. 이때 군부를 배경으로 학생들로 충원된 ‘홍위병’들이 전국 곳곳에서 앞장섰다. 그들은 “구사상, 구문화, 구풍습, 구습관을 타파한다”며 고전 저작을 불태우고 명승고적을 파괴했다.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하면서 종결될 때까지 10여년간 진행된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중국인들은 자신의 전통문화를 혐오하고 철저히 무시했다. 2000년대 중국이 전 세계에 공자학당을 세우며 유학열이 불타오를 때 많은 중국 교수와 연구자들이 한국을 방문해 배웠던 것도 중국 내 유교 전승이 많이 훼손되고 끊긴 데 하나의 원인이 있다. 일례로 공자의 덕을 기리고 추모하는 ‘석전대제’를 개최하기 위해 한국 학자를 초청해 감수하는 일도 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고자 전국의 청소년 ‘홍위병’들을 모아 1966년 8월, 백만인집회를 연 장소 또한 천안문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