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묵 평역, "조선사람이 좋아한 당시" 표지. [사진=민음사 제공]
이종묵 평역, "조선사람이 좋아한 당시" 표지. [사진=민음사 제공]

 

19세기 조선에서 인기 있었던 《춘향전》에 수많은 고사와 한시(漢詩)가 나온다. 이 한시는 당나라 때 유행한 시로 ‘당시(唐詩)’라고 한다. 《춘향전》은 ‘열녀춘향수절가’라는 판소리로 누구나 두루 즐겼다. 예를 들면 이백의 ‘장진주’ 일부가 '열녀춘향수절가'에도 나온다.

고대광실에서도 거울 속의 백발을 슬퍼하니 高堂明鏡悲白髮

아침에 검은 실이 저녁에 눈처럼 희어지는 것을. 朝如靑絲暮成雪

─ 이백, 「술의 노래(將進酒)」

거문 머리 백발 되니 조여쳥사모셩셜(朝如靑絲暮成雪)이라 무졍한 게 셰월이라.

─ 「열녀춘향수절가」의 암행어사 출두 대목

이렇듯 ‘당시’는 조선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당시’라고 하면 많은 이가 《당시삼백수》를 떠올릴 텐데, 하지만 《당시삼백수》는 조선에서 즐겨 읽던 책이 아니었다. 《당시삼백수》를 번역한 임동석에 따르면 《당시삼백수》는 청나라 때 순수(孫洙, 1711~1778)가 나이 54세 때인 1764년 당시(唐詩)의 대표작을 모아 분류해 편집한 책이다. 삼백수를 선정한 것은 그 무렵 민간 속담에 “300수의 당시만 외우면 저절로 시를 읊고 지을 수 있다는 말이 있었으며, 그 속담 구절을 제목으로 택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당시를 망라하여 편집한 《전당시(全唐詩)》라는 책에는 무려 4만 8900여 수가 실려 있는데 비해 300수는 약 160분의 1정도이며 작자 2,200여명에 비하면 겨우 77명(무명씨 포함)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당시삼백수》는 민간에 널리 퍼져 애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아동용 학습 교재에 목적을 두고 편찬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전에 당시 선집은 주로 전문적이며 학술적 가치를 목적으로 한 학자용이었다.

조선에서 《당시삼백수》를 읽지 않았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당시를 어떻게 접했을까? 바로 《당시장편(唐詩長篇)》을 통해서였다. 규장각한국학연구소 해제에 따르면 이 책은 중국 당나라 때의 고시(古詩)·오언절구(五言絶句)·칠언절구(七言絶句)를 선발하여 190수로 엮은 시선집으로‚ 한글필사본이다. 즉 선발된 시문 모두 한문 원문 없이 한글로 음을 쓰고 토를 달았다. 이 책은 조선 시대에 가창과 음영(吟詠)을 맡은 기녀가 애창한 당시를 엮은 선집으로, 한문에 능하지 않은 사람들도 궁중 연희나 시조, 판소리 공연에서 당시를 즐겼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서울대 이종묵 교수가 최근 출간한 《조선 사람이 좋아한 당시》(민음사, 2022)는 《당시장편》을 저본으로 했다. 당시 200수와 각 시에서 영향받은 우리 한시·시조·판소리 600수를 번역하고 평설했다.

먼저 이 책 《조선 사람이 좋아한 당시》에서 독특한 점은 동아시아 문명의 잣대이자 한국 한시의 모범인 당시가 조선에 수용된 양상을 구체적으로 조사한 것이다. 당시는 눈으로 보고 이해하기도 하지만 귀로 듣고 즐기기도 했다는 점이 연구의 핵심이다.

이종묵 교수는 “특히 한글본 《당시장편》은 당시에 한글로 토를 달고 원문만 표기한 책으로, 율시를 배제하고 절구와 고시로만 채워져 있는데, 이는 공연공간에서 일반대중의 귀에 익숙한 당시를 노래로 부르는 데 쓰일 목적으로 편찬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당시는 시조로 바뀌거나 판소리에 삽입되어 불리다가 공연공간의 중요한 가사집에 버젓이 실리게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보편적인 한시 양식이면서 조선 사람들이 가장 사랑한 당시가 향유된 종장이 이러하였다”고 연구 논문에서 밝힌 바 있다.

이렇듯 《조선 사람이 좋아한 당시》는 중국의 고전을 조선에서 어떻게 깊이 있게 수용했는지 보여 주는 지표로도 의미가 깊다. 책에 실린 우리 한시·시조·판소리의 풍부한 예에서 보듯 당시는 양반사대부만이 아니라 여성층과 일부 평민, 천민에게까지 유통된 대중 교양이었다. 이 책에 수록한 당시 200수는 널리 읽힌 판본에서 나왔기에 조선에서 가장 사랑받은 작품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준다.

저자는 시의 출처를 정확하게 교감하고 이에 더하여 《고문진보》 《두시언해》와 같은 창의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조선의 풀이를 폭넓게 참고해 번역문만 읽어도 시의 심상과 의미가 통하게 했다.

《조선 사람이 좋아한 당시》로 인해 중국 당나라 시대에서 조선 말기까지 전해진 천년 고전의 향기가 저자의 단정하고 다감한 번역과 함께 지금 우리에게까지 실려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