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대중의 반역

10. 원시성과 역사

오르테가는 ‘10 원시성과 역사’에서 먼저 ‘자연’과 ‘문명’을 비교한다.

“자연은 항상 그곳에 있다. 그리고 자립자존하고 있다. 자연 속에서, 밀림 속에서 우리는 원시인으로 지내도 거리낌이 없다. 심지어 야만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쳐들어올 위험만 없다면 영원히 그런 상태로 있겠다고 결심할 수도 있다. 원리적으로는 영원히 원시적인 민족이 있을 수 있다. 그런 민족이 실제 존재한다. 브라이지히(Breyssig)가 그들을 ‘영원한 여명의 민족’이라고 불렀는바, 그들은 여명에 머물러 얼어버려 움직이지 않고 한번도 한낮을 향해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문명은 그렇지 않다. “문명은 단순히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립자존할 수도 없다. 문명은 인공적인 것이며, 예술가나 기술자가 필요하다. 만일 당신이 문명의 혜택을 누리길 바라면서 문명을 유지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없게 된다. 순식간에 당신은 문명이 없는 세계에 돌아가게 될 것이다. 잠시라도 방심한 사이 그 주변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순수한 자연을 덮고 있는 장막을 걷어낸 것처럼 원시의 밀림이 원초의 모습 그대로 다시 나타난다. 밀림은 항상 원시적이다. 또한 그 역도 그렇다. 원시적인 것은 모두 밀림이다.”

이렇게 오르테가는 자연은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없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문명은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문명은 유지하려는 관심을 소홀히 하면 순식간에 원시상대로 돌아가버린다는 점 또한 강조한다.

그리고 낭만주의자들이 발견한 것처럼 문명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밀림이 자랄 수 있는 흙이고 어디에서나 밀림이 다시 자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밀림의 침입을 저지해야 한다.

오르테가는 “‘선량한 유럽인’은 이제 호주의 여러 주가 앓고 있는 중대한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즉 선인장이 번성하여 땅을 뒤덮고 사람들을 바다로 밀어내는 것을 저지하는 데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유럽을 뒤덮고 있는 ‘선인장’은 대중이다.

유럽의 대중은 어떤 상태에 있기에 오르테가는 호주를 침략한 선인장이라고 비유한 걸까.

“대중은 자신이 그 안에서 태어나 이용하고 있는 문명이 자연과 마찬가지로 자연발생적이고 원생(原生)적이라고 믿는다. 바로 그 사실에 의해 그는 원시인이 된다. 그에게 문명은 밀림과 같다.”

이것은 오르테가는 이미 지적한 바 있는데, 이에 더하여 좀더 깊이 다룬다.

오르테가에 따르면 “유지해야 할 문명세계를 지지하는 원리가 오늘날의 평균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문화의 기본적인 가치 등에 흥미를 갖지 않고, 그것에 대해 연대책임도 지지 않으며, 문화를 위해 봉사할 마음도 없다.”

이의 원인으로 오르테가는 한 가지를 지적한다. 미리 말하면 역사를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왜 역사를 배워야 하는지 살펴보자.

먼저 문명이 갖는 성격을 밝힌다. “문명을 발전하면 할수록 더욱 복잡해지고 어려워진다. 오늘날 문명이 제기하는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사람의 수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 증거는 전후(1차세계대전)의 예를 보면 분명해진다. 그 성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고 하지만 유럽의 재건은 너무나도 복잡하여 평범한 유럽인이 이처럼 고도의 사업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해결 수단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위한 두뇌가 부족한 것이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있기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극히 소수이다. 그러나 중앙유럽의 대중은 그 두뇌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르테가는 우선 문명이 발전하여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면서 이로 인한 문제를 대중이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을 들고 게다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극히 소수의 두뇌에게 맡기려고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로 인한 결과를 이전의 문명과 비교하여 설명하면 오늘날의 특징이 더욱 분명해진다. 즉 문제의 복잡 미묘함과 이를 해결하려는 정신 상태 사이의 이러한 불균형은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점점 심각해지는데 이것이 우리 문명의 기본적인 비극이다. 문명을 형성하고 있는 원리가 풍부하고 확실하여, 산물의 양과 정밀도가 증가하여 보통 사람의 수용 능력을 능가한다. 과거에는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결코 없었다.

오르테가에 따르면 이전의 모든 문명은 그 근저에 있는 원리가 불충분하여 멸망했다.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경우 실패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원리였다. 로마제국은 기술 부족으로 종말을 맞았다. 유럽의 문명은 지금 그 반대의 이유로 멸망이 시작되고 있다. 오르테가는 무엇을 유럽의 위기로 보고 있는가.

“오늘날 실패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다. 즉 자신의 문명의 발전과 보조를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비교적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 오늘날 직면하는 기본적인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소름이 돋는다.”

소름이 돋는 이유는 그들이 오늘날의 정밀도 200분의 1도 안 되는 200년 전의 상황에 사용한 조잡한 개념 도구로 정치, 사회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새로운 도구를 배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새로운 수단은 어떤 것인가? 바로 역사이다.

“발전된 문명은 해결하기 힘든 문제와 동일하다.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위험성도 증대한다. 분명 삶은 점점 좋아진다. 그러나 점점 복잡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가 복잡해짐에 따라 그것을 해결할 수단도 정교해진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마다 그 진보한 수단을 숙달해야 한다. 이러한 발전한 수단 가운데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명의 진보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역사라는 수단이 있다. 역사란 문명의 배후에 많은 과거,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 지식은 성숙한 문명을 유지하고 지속하기 위한 일급의 기술이다. 그것은 새로운 상황의 삶의 갈등-삶은 항상 그때까지의 것과는 다르다-새로운 양상에 적극적인 해결책을 주기때문이 아니라 다른 시대가 범한 순진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오르테가에 따르면 오늘날 유럽은 대중은 물론 교양이 높은 사람도 역사에 무지하고 지도자도 18세기, 17세기의 지도자에 비해 역사를 훨씬 모른다.

19세기에 전문가들이 역사학을 과학으로 크게 발전시켰는데도 이미 ‘역사 교양’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르테가는 이처럼 역사 교양을 포기한 데서 19세기 특유의 오류들 대부분이 기인하며 이것들이 오늘날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19세기 마지막 3분의 1기간에,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야만 상태, 즉 과거가 없거나 과거를 망각한 인간의 순진성과 원시성을 향해가는 퇴화와 퇴보가 시작되었다.”

이의 증거로 오르테가는 유럽과 그 인접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볼셰비즘과 피시즘을 들었다. 이 두 가지 ‘새로운 정치적 시도’는 실질적인 후퇴를 보이는 명백한 사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주장이 갖는 타당성을 다루는 방식이 반역사적이고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전형적인 운동은 평범하고, 즉흥적이고 오랜 기억도 '역사 의식'도 없는 사람들에 의해 좌우된다. 그들은 애초부터 자신들이 과거에 속해 있는 것처럼 믿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을 과거 시대의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1917년 공산주의자는 이전에 일어난 것과 동일한 형태의 혁명, 과거의 결함과 오류가 전혀 개선되지 않은 혁명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오르테가는 이 볼셰비키 혁명을 “인간 삶의 새로운 시작과는 반대인 과거 혁명의 단조로운 반복이며 완전한 재탕이다”고 혹평했다.

파시즘에도 비슷한 평가를 했는데, 파시즘은 그 어떤 시도도 '시대의 높이'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과거를 뛰어넘는 필수조건, 즉 모든 과거를 압축하여 내부에 갖고 있지 않았다. 과거와 몸을 맞대고 싸울 필요는 없다. 미래가 과거를 극복하는 것은 과거를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과거의 일부를 삼키지 않고 남겨두면 미래는 패배한다. 결론적으로 오르테가는 볼셰비즘과 파시즘은 가짜 여명이라고 말한다.

“볼셰비즘과 파시즘 모두 가짜 여명이다. 새날의 아침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한 번, 아니 몇 번이나 되풀이된 과거의 아침밖에 가져오지 않는다. 즉 둘 다 원시성으로 후퇴한 것이다. 과거를 소화, 흡수하지 않고 과거의 일부와 격투를 벌이는, 단세포적인 대응을 하는 행동은 모두 원시성인 것이다.”

그러면 파시즘과 같은 반자유주의가 19세기 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 즉 자유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오르테가는 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반자유주의나 비자유주의는 자유주의 이전의 인간이 택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주의가 일단 승리를 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 승리가 반복되거나 아니면 파괴된 유럽 속에서 자유주의와 반자유의주의가 모두 소멸되거나 할 것이다. 자유주의는 반자유주의 이후에 또는 그와 동시에 나타난 것으로 대포가 창보다 더 강한 무기인 것처럼 자유주의는 반자유주의보다 강한 생명력이 있다.

오르테가는 어떤 것에 반대하는 행위에 그것보다 나중에 오는 경우도 공허한 부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가령 누군가 ‘반베드로파’를 선언할 경우 이를 긍정적으로 보자면 베드로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지지한다는 말과 같은데 이것은 베드로가 아직 태어나기 전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모든 반대는 그저 공허한 부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오르테가는 과거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하는지 이야기한다. 그것은 과거를 고려에 넣는 것이다.

“단순히 부정하는 것을 모든 과거를 말살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는 본질적으로 유령(revenant)과 같다. 아무리 내쫓아도 어김없이 돌아온다. 그러므로 과거를 진정으로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쫓지 않는 것이다. 과거를 고려에 넣는 것이다. 과거를 잘 피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시야에 넣고 행동하는 것, 요컨대 역사적인 상황에 관해 예민한 의식을 갖고 '시대의 높이'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오르테가는 과거는 과거 나름의 정당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과거는 과거 나름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만일 과거에 대해 이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다시 요청할 것이고, 나아가 정당성을 갖지 않을 것까지 들이댈 것이다. 자유주의도 나름대로 정당성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세세에 영원히(per saecula saeculorum: 가톨릭 미사에서 반복하는 기도문의 일부로 이 말 다음에 아멘이 이어진다)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전체가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정당하지 않는 부분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럽은 그 자유주의의 본질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자유주의를 극복할 조건이다.”

이어 오르테가는 파시즘과 볼셰비즘이 시대착오인 것에만 주목하여 다룬 점을 거론하고 이 시대착오는 오늘날 대중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중이 활개치고 있으며, 대중이 기획한 원시적 양식의 계획만이 외견상의 승리를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오르테가는 여기서 바라는 것은 “혁명이나 진화가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닌 역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오르테가는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정치적으로 중립임을 밝힌다. 그 주제는 정치나 정치적인 갈등보다 훨씬 심층에서 태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도 모두 같은 인간, 반역하는 대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오르테가는 이렇게 호소한다.

“유럽의 운명은 진정  '동시대적'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내부에 역사의 지하층 전체가 고동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삶의 현재 수준을 알고, 낡고 미개한 모든 태도를 혐오한다.

우리가 역사 속에 매몰되지 않고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알기 위해서는 역사 전체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