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생명력이 왕성한 늦봄, 천년 사찰 봉원사를 찾았다. 서울 서대문구 안산의 남서쪽 산자락에 있는 봉원사로 가는 길은 2주 앞으로 다가온 ‘부처님오신날’을 준비하는 연등이 길잡이를 하고 있다.

천년사찰 봉원사로 가는 길 300년 넘은 느티나무에 걸린 연등. [사진=강나리 기자]
천년사찰 봉원사로 가는 길 300년 넘은 느티나무에 걸린 연등. [사진=강나리 기자]

대웅전으로 향하는 계단을 한 단씩 오르니. 그 돌계단 끝자락에 작고 여린 냉이 줄기가 힘차게 올라와 있다. 오가는 발길이 많은데도 생명을 피워내는 힘이 대단하다.

(위) 봉원사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 끝에 피어난 냉이. (아래) 냉이꽃. [사진=강나리 기자]
(위) 봉원사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 끝에 피어난 냉이. (아래) 냉이꽃. [사진=강나리 기자]

대웅전 안마당에는 한 사람, 한사람 각자의 간절한 소망을 매달게 될 연등이 줄지어 걸려있다. 문득 대웅전 계단 오른편에 수줍게 피어난 금낭화를 보니 자연이 만든 연등인 듯 보이는데 누구의 솜씨보다 더욱 섬세하고 곱다.

(위) 대웅전 앞마당에는 오는 5월 8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연등이 걸려있다. (아래) 대웅전 앞 계단 한쪽에 핀 금낭화. [사진=강나리 기자]
(위) 대웅전 앞마당에는 오는 5월 8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연등이 걸려있다. (아래) 대웅전 앞 계단 한쪽에 핀 금낭화. [사진=강나리 기자]

대웅전 마당의 오른편에는 ‘봉원사(奉元寺)’ 현판이 걸린 대방(代房) 앞에 부처님오신날 괘불도가 걸릴 붉은 두 개의 기둥이 우뚝 서 있다. 봉원사라는 현판은 본래 조선 21대 영조가 내렸고, 대방 자체는 염리동에 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 아소정(我笑亭)을 옮겨온 건물이다. 영조의 친필 현판은 1950년 9.28 서울수복 당시 방화로 소실되었다.

봉원사는 1991년 화재로 인해 대웅전과 명부전, 삼천불전 등이 불타 새로 지었기 때문에 오랜 고찰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올해로 1134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겪은 만큼 곳곳에 통일신라 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와 유적이 남아 있다.

부처님 오신 날 괘불도가 걸릴 붉은 기둥이 봉원사 대방 앞에 세워졌다.

태고종의 총본산인 봉원사는 신라 51대 진성여왕 3년(889)에 도선국사가 금화산 서쪽에 있는 현재 연세대 터(연희궁터)에 창건한 반야사(般若寺)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고려말 공민왕 때 태고 보우국사가 중건하고 보수하여 금화사(金華寺)라고 이름을 바꿨다.

봉원사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유교 국가를 내세운 조선 시대에도 번성했다. 태조 5년(1396) 원각사(圓覺寺)의 삼존불상을 옮겨 봉안했고,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신 진전이 있었다.

봉원사 대웅전 왼편 가장 아래 위치한 전각인 명부전(冥府殿)의 현판은 조선을 유교 국가로 기틀을 세운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의 글씨이다. 그런데 명부전 기둥에 쓴 주련은 구한말 조선(대한제국)의 총리대신으로,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한 이완용의 글씨이다. 조선의 시작과 끝을 이끈 두 인물의 글씨가 한 건물에 있는 셈이다.

봉원사 명부전 현판은 개국공신 정도전이 썼다. [사진=강나리 기자]
봉원사 명부전 현판은 개국공신 정도전이 썼다. [사진=강나리 기자]
봉원사 명부전의 주련. 구한말 조선(대한제국)의 망국을 이끈 이완용의 글씨. [사진=강나리 기자]
봉원사 명부전의 주련. 구한말 조선(대한제국)의 망국을 이끈 이완용의 글씨. [사진=강나리 기자]

봉원사는 조선 21대 영조임금과 인연이 깊다. 영조는 즉위 24년(1748) 직접 땅을 하사해 지금의 터로 이전했고, 직접 쓴 ‘봉원사’ 친필을 하사함으로써 금화사에서 봉원사로 개칭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새로 지은 절이라고 ‘새절’이라 불렀다고 한다.

봉원사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칠성각(七星閣)은 본래 영조의 적장손인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의 신위(神位)를 모신 원당(願堂) ‘의소제각(懿昭祭閣)’이었다. 의소세손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첫아들로, 정조와는 동복형인데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고종 1년(1864)년 중건되면서 해당 전각은 ‘칠성각’이라 불렸다.

(위) 연등에 가려진 칠성각 현판. (아래) 칠성각은 영조의 첫 손자였던 의소세손의 신위를 모신 원당 '의소제각'이었다. [사진=강나리 기자]
(위) 연등에 가려진 칠성각 현판. (아래) 칠성각은 영조의 첫 손자였던 의소세손의 신위를 모신 원당 '의소제각'이었다. [사진=강나리 기자]

이와 같은 역사는 지난 2011년 봉원사 칠성각의 불단을 수리하면서 ‘의제소각’이라고 각인된 편액이 발견되면서 명확해졌다. 일제 강점기 많은 사찰에 있던 조선왕실 원당이 폐쇄되고 편액들이 훼철되었는데 칠성각 불단 아래 숨겨진 편액은 비록 훼손되었지만 남았다. ‘봉원사 의소제각 편액’은 조선왕실의 원당에 대한 실마리를 풀 희소한 사례로 평가되며, ‘봉원사 칠성각’과 함께 2020년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2011년 봉원사 칠성각 불단 수리과정에서 발견된 '의제소각'편액. [사진=서울시]
2011년 봉원사 칠성각 불단 수리과정에서 발견된 '의제소각'편액. [사진=서울시]

흥선대원군과 연관된 유적도 곳곳에 있다. 대웅전 동쪽 문 옆 동종은 흥선대원군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면서 철거된 충남 예산 가야사에 있던 것이고, 대방은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자신이 죽은 뒤 묻힐 땅에 지은 별장 ‘아소정’이었다. 아소정 자리에 학교(현재 서울디자인고등학교)가 세워지면서 전각은 봉원사에 옮겨졌다. 이때, 아소정에 걸렸던 추사 김정희의 글씨 현판 ‘청련시경(靑蓮詩境)’과 '산호벽수(珊瑚碧樹)', 그리고 청나라 옹방강의 글씨 현판 ‘무량수각無量壽閣’ 한 점이 함께 왔다.

(아래) 봉원사 대방. 영조가 직접 쓴 '봉원사' 현판은 6.25때 불탔다.
봉원사 대방. 영조가 직접 쓴 '봉원사' 현판은 6.25때 불탔다. 대방은 본래 흥선대원군이 염리동에 죽은 뒤 묻힐 묏자리로 지정한 곳에 세운 별장이었다. [사진=강나리 기자]
봉원사 대방 안에 걸린 김정희의 글씨 '청련시경'. 청련은 당나라 시인 이백의 호로, 청련시경은 이백이 시를 지을 만큼 뛰어난 곳을 뜻한다. [사진=강나리 기자]
봉원사 대방 안에 걸린 김정희의 글씨 '청련시경'. 청련은 당나라 시인 이백의 호로, 청련시경은 이백이 시를 지을 만큼 뛰어난 장소를 뜻한다. [사진=강나리 기자]
추사 김정희의 '산호벽수'. [사진=강나리 기자]
추사 김정희의 '산호벽수'. [사진=강나리 기자]
청나라 옹방강의 '무량수각'. [사진=강나리 기자]
청나라 옹방강의 '무량수각'. [사진=강나리 기자]

또한, 봉원사는 구한말 국권회복운동과도 인연을 맺었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취한 쇄국 정치로 뒤처진 근대화를 통해 자주독립하고자 고종 21년 (1884) 일으킨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의 요람지이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가 봉원사의 이동인 스님이었기 때문이다. 봉원사에서 삼천불전 앞 마당에서 명부전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는 이동인 스님이 계시던 자리에 ‘존귀한 분을 모신다’는 뜻을 담은 수위안좌인受位安座印상이 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의 스승 이동인 스님이 계시던 자리. [사진=강나리 기자]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의 스승 이동인 스님이 계시던 자리. [사진=강나리 기자]

아울러 미륵전 앞에는 1908년 8월 31일 한힌샘 주시경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을 같이한 인사들이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연구하고 교육하고자 세운 한글학회 창립총회 터 표지석이 서있다.

봉원사 미륵전 앞에 세워진 한글학회 창립총회 장소 표지석. [사진=강나리 기자]
봉원사 미륵전 앞에 세워진 한글학회 창립총회 장소 표지석. [사진=강나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