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대중의 반역

9. 원시성과 기술

오르테가는 ‘9 원시성과 기술’에서 먼저 분석 대상인 현재의 상황, 1930년대가 모호한 상황임을 먼저 상기시킨다. 그래서 현재의 모든 상황, 특히 대중의 반역에 양면성이 있다. 즉 승리와 죽음의 양면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중의 반역은 인류의 새로운, 그리고 지금까지 그 예를 볼 수 없는 조직으로 이행일 수도 일지만 동시에 인류의 운명에 파국이 될 수도 있다고 오르테가는 본다.

그래서 오르테가는 19세기를 이끈 지도자들이 범한 최대의 잘못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잘못은 긴장을 풀고 경계를 게을리 하게 한 책임의식의 결여이다. 언덕을 내려가는 것과 같은 편안한 때에도 마주칠 위험이나 생각지 못할 측면에 둔감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책임과 사명에 반하는 것이다. 오늘날 책임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과민하다할 정도로 예민한 책임감을 환기하는 것이 필요하고 현대의 여러 징후가 안고 있는 불길한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오르테가는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생활의 현상분석에서 현재의 여러 징후가 암시하는 미래를 고려한다면 불리한 요인들이 유리한 요소를 훨씬 능가한다고 우려한다.

이렇게 책임감을 일깨운 오르테가는 유럽의 사회생활을 분석한다. 그는 현재 유럽은 우리의 삶이 경험한 모든 물질적 가능성의 증대가 폐기될 위기에 놓여 있는데 이는 유럽의 운명을 갑자기 습격한 가공할 문제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고 설명한다. 가공할 문제란 문명의 원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런 저런 문명의 원리가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상황에서 판단한다면 어떠한 문명의 원리에도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는 유형의 인간이다. 이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마취제나 자동차와 같은 것들인데, 이것은 문명에 대한 그들의 근본적인 무관심을 확인해줄 뿐이다. 왜냐하면 마취제 등은 문명의 단순한 산물에 지나지 않고, 그것에 열광하는 것은 그것을 낳은 문명의 원리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유럽의 사회적 지도권을 장악한 이들이 문명의 원리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을 오르테가는 신과학(nuove scienze), 즉 자연과학이 탄생한 이래, 따라서 르네상스이래 자연과학의 순수한 연구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이 세대를 거듭할수록 높아져 왔는데, 최초로 그 비율이 낮아지는 현상이 오늘날의 20대와 30대에 나타났다는 것을 들어 보여준다. 순수과학의 연구실이 오늘날 학생들을 끌어들일 매력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산업이 최고의 발전단계에 달하고 사람들이 과학에 의해 만들어낸 장치나 약품을 사용하려는 의욕이 넘칠 때 일어났다. 그리고 정치, 예술, 도덕, 종교와 일상적인 삶에서도 이러한 부조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설적인 상황이 의미하는 바를 오르테가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인간은 문명 세계의 한 복판에 돌연 모습을 드러낸 원시인, 자연인(Naturmensch)”이라고 말한다. 세계는 문명화되어 있는데, 그곳에 살고 있는 인간은 미개한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 문명을 보려고 하지 않고 마치 문명이 자연물인 것처럼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 오르테가는 “새로운 인간은 자동차를 갖고 싶어하고 그것을 즐겨 이용하지만 그것이 에덴동산의 나무에서 저절로 열리는 과일이라고 믿고 있다”고 비유했다. 그는 문명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인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문명의 이기에 대해 품고 있는 열정을 이기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원리에까지 확장하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오르테가는 ‘5 하나의 통계적 사실’에서 인용한 라테나우(Rathenau)의 “야만인의 수직적 침입”이라고 말한다. 즉 현대의 대중인은 실은 원시인으로, 문명이라는 오랜 역사를 지닌 무대에 돌연 등장한 것이다.

이어 오르테가는 당시 기술의 발전에 관한 논의를 비판한다. 특히 《서구의 몰락》 저자 슈펭글러의 “문화의 제원리에 대한 흥미가 사라져도 기술은 계속 살아남는다”는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기술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기술과 과학은 동질의 것이며 과학은 과학자체의 순수함이나 과학 자체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문화의 일반원리에 관한 열정을 잃게 된다면 과학에 관한 흥미도 사라질 것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한 열정이 식어버리면 기술은 잠시 동안, 즉 기술을 낳은 문화적 충동이 타성으로 계속되는 순간밖에 살 수 없다. 사람은 기술과 함께 살아가지, 기술에 의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기술은 스스로 자라는 것도 호흡하는 것도 할 수 없다. 즉 그것은 자기원인(자신이 자신의 원인이 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여분의 무용한 관심에서 생겨난 유용한 실용적인 침전물인 것이다.”

기술은 이러한 것이기 때문에 오르테가는 당시 유럽의 기술에 관한 관심으로는 기술의 발전도 그 지속성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이다. 오르테가는 기술을 ‘근대문화’의 특징적인 성격의 하나라고 보았다.

“기술을 ‘근대문화’의 특징적인 성격의 하나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물질적으로 이용가능한 것으로 이루어진 과학의 한 분야를 포함하는 문화이다. 따라서 19세기에 도입된 삶의 가장 새로운 모습을 내가 요약할 때 두 가지 특징, 자유민주주의와 기술을 들었던 것이다.”

오르테가는 기술은 그 심장부, 핵심은 순수과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기술을 영속하게 하는 조건은 순수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동일하다. 그런데 이 점을 너무나도 쉽게 잊어버려 오르테가를 놀라게 했다. 달러, 돈이 있는 한 과학이 있다고 믿는 것은 원시성의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오르테가는 비판한다.

실험과학이 역사상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낮은 확률 속에서 태어난 산물의 하나이다. 이 실험하는 인간집단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전설상의 일각수를 낳는 것보다도 더욱 예외적인 조건이 필요했다고 오르테가는 지적한다.

실험과학, 그 결과인 기술을 낳은 역사적 조건이 무엇인지를 정밀하게 분석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지만 분석했다고 하더라도 오르테가는 이것을 대중이 이해하리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대중은 이론에는 관심이 없고 그는 오로지 자신의 육체를 통해서만 배운다.”

이러한 대중은 실험과학의 혜택을 누리지만 실험과학을 위해 자금 지원이나 헌신적인 협력을 하지 않는다.

“실험과학은 평균인이 이용하는 새로운 발명품을 제공한다. 매일같이 새로운 진통제 또는 백신을 생산하여 그 혜택을 평균인이 받는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만일 과학적 영감이 약해지지 않는다면 실험실의 수를 3배로, 또는 10배로 하면 부와 편익, 건강과 생활의 풍요로움도 증가할 것이다. 삶의 원리에 대한 이보다 더 놀랍고 강력한 선전문구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러나 대중은 과학에 대해 더욱 큰 공헌을 하려고 자금을 지원하거나 헌신적인 협력을 하려고 하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그러기는커녕 전후(제1차 세계대전)는 과학자를 사회의 새로운 천민, 최하층민으로 전락시켰다.”

새로운 천민이 된 과학자가 자금을 지원하는 자가 원하는 연구를 해야 연구비를 확보할 수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 과학자에서 오르테가는 철학자는 제외한다. 철학은 대중의 보호도 관심도 동정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은 스스로 문제의 본질을 알고 선한 신(神)의 작은 새, 공중을 나는 새와 같은 자유로운 운명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공중을 나는 새는 ‘성경’에 나오는 말로 노동하지 않고 생활에 고민하지 않는 새조차도 창조주인 신이 풍요롭게 한다. 공중을 나는 새는 노동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은 까닭에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실험과학으로 와서 오르테가에 따르면 실험과학은 대중을 필요로 하고 물리 화학이 없다면 오늘날 지상에 존재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없기 때문에 대중도 실험과학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과학이 대중에게 가져다 주는 확실한 혜택과 대중이 과학에 대해 보여주는 관심과의 불균형이 너무나 크다.

오르테가는 과학에 대한 무관심이 다른 어떤 부류보다도 의사와 기사 등 전문가로 된 대중에게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전문가들은 과학이나 문명의 운명과의 긴밀한 연대에 최소한의 관심도 갖지 않고, 자동차를 타고 다니거나 아스피린을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정신상태에서 자신의 직업을 실천하는 게 보통이다는 것이다. 이 전문가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룬다.

오르테가가 가장 놀란 것은 “평균인이 과학으로부터 받은 혜택과 그가 과학에 바치는(실은 바치지 않는) 감사 사이의 불균형이라는 증상이다.”

그래서 대중화한 유럽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문명을 지배하기 시작한 유럽인-이것은 나의 가설이다-은 그가 태어난 복잡한 문명에 비해 상대적으로 원시인이며, 무대에 별안간 등장한 야만인, ‘수직적 침략자’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