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위풍당당하게 살고 싶은데/ 그 모냥 그 꼴이냐고, 현실을 좀 보라고/ 그대들은 비웃으며 손가락질했지만/ 난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고 있단다/ 그토록 원하던 꿈을 이루며/ 웃게 되는 그날 반드시 올 테니/ 두고 봐라” (리쌍 ‘누구를 위한 삶인가’, 오단해 개사)

진중하고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무대에 올라 관객의 숨을 빼앗는 소리꾼 오단해 씨. 그는 명창, 명인의 등용문으로 불리는 제35회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부문 장원으로, 한국예술종합대학(한예종) 판소리 석사이기도 하다.

국립국악원(서울 서초구)에서 만난 그는 자신의 삶과 국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이야기했다.

소리꾼 오단해 씨를 지난 3월 8일 국립국악원에서 만났다. [사진=김경아 기자]
소리꾼 오단해 씨를 지난 3월 8일 국립국악원에서 만났다. [사진=김경아 기자]

먼저 최근 근황이 궁금하다.

- 지난해 jtbc ‘풍류대장-힙한 소리꾼들의 전쟁’ 출연 이후 공연을 계속 했고, 지금도 공연 연습 중입니다. 지난달에는 3.1운동 103주년을 맞아 국학원이 개최한 삼일절 기념식에서 ‘압록강 행진곡’과 ‘8호 감방의 노래’를 불렀어요.

삼일절 기념식 영상에서 힘찬 목소리와 비장한 눈빛으로 독립투사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 했다.

- 그 당시에 독립투사들이 계시지 않았으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저도 없고 이렇게 음악을 할 수도 없었겠죠. 항상 감사하고 그 역사를 절대 잊지 말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노래했어요. 영광스러웠고 반응이 뜨거워서 뿌듯했습니다.

전에도 항일음악회에 참여한 경험이 많습니다. 역사에 엄청난 관심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아야 할 역사는 찾아보고 공부했어요. 소리꾼은 대중을 위한 노래를 업으로 하지만 시대정신이 있는 소리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판소리를 전공했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은 누구인가

- 제게 처음 판소리를 알려주고 이끌어준 분은 작고하신 성창순 선생님(판소리 ‘심청가’ 국가무형문화재 명창)입니다. 심청가와 춘향가, 흥보가를 배웠는데 흥보가는 다 배우지 못했어요. 그리고 판소리에 북으로 장단 맞추는 고법鼓法과 장구를 가르쳐주신 분은 지금 서울시 무형문화재인 명고 정화영 선생님입니다.

오단해 씨는 스승 성창순 명창, 정화영 명고와의 만남, 그리고 판소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이야기했다. 공연 모습. [사진= 본인 제공]
오단해 씨는 스승 성창순 명창, 정화영 명고와의 만남, 그리고 판소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이야기했다. 공연 모습. [사진= 본인 제공]

 

‘심청가’이수자 성창순 명창과 첫 만남 ‘산 공부’, 삶이 소리가 되다

성창순 명창과 만나게 된 계기는.

- 어머니가 문화센터에서 성창순 선생님께 판소리와 남도민요를 배우셨어요. 어머니가 연습할 때 제가 옆에서 ‘내가 더 잘 할 것 같아’라고 했어요. (하하)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데 첫 시작이 산 공부였어요. 선생님과 30명 정도 경기도 포천 자인사에서 했어요. 부모님과 떨어진 것도 처음인데다 절이라 반찬은 채소밖에 없고 좋아하는 만화영화도 못 보고 소리만 해야 해서 답답했죠. 선생님 몰래 선배들이랑 물놀이도 하고 시내에 나가 치킨도 먹었어요.(하하)

그런데 어릴 때 배운 건 뇌 속에 깊이 새겨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하셨던 중요한 말씀도 생생하고, 그때 배웠던 것은 연습을 하지 않아도 잊히지 않아요. 선생님과는 주로 절에서 머물며 산 공부를 했는데, 심청가에 ‘중 타령’이라는 게 있어요. 하루 종일 염불소리를 들어보고 스님들이 하는 염불소리를 대입해보기도 했습니다.

젊은 국악인들도 ‘산 공부’를 한다는데.

- 예 많이 하죠. 아침에 눈 뜨면 밥 먹고 레슨을 받아요. 그 다음은 북채 하나 들고 자기가 좋아하는 곳을 찾아서 하루 종일 연습합니다. 삶이 곧 소리가 돼버리는 것이죠. 산 공부가 좋은 게 계곡에 들어가면 폭포도 있고, 습해서 목도 덜 상해요. 탁 트인 자연 속에서 마음껏 소리를 내보고, 다른 사람의 소리도 들으며 배우고 조언을 듣기도 해요. 선택과 집중이라고 할까. 갔다 오면 한 계단 점프하죠.

판소리를 잠시 중단한 시기가 있었다고.

- 중학교 1학년 때 목이 너무나 아파 내시경을 받았는데 혹이 생겼더군요. 게다가 오래 소리를 하다 보니 어린 마음에 싫증이 나고 놀고 싶었어요. 변성기와 사춘기가 같이 왔어요. 아버지가 ‘소리를 좀 쉬고 북을 좀 배워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하셨죠. 그때 정화영 선생님께 배웠는데 습득이 굉장히 빠르고 리듬감이 뛰어나다고 천재라고 칭찬하셨어요.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소리를 시키시더군요. 2년 만에 소리를 했는데 선생님께서 ‘너 다시 가서 소리를 해라. 여기 오지 말고’라고 하셨죠.

성창순 명창께 되돌아갔을 때 뭐라고 하셨을 것 같다.

- 선생님께서 항상 ‘내 강아지’라며 저를 무척 예뻐하셨어요. 그만두려 했을 때는 나무라셨는데 다시 왔을 때는 무척 기뻐하셨어요. 다시 배우고 중3 말 때 ‘심청가’ 완창完唱 발표를 하라고 하셨어요. 선생님은 매번 그때 쉬어서 소리가 흐트러졌다고 야단치셨지만 저는 그때 억지로 계속했더라면 중간에 그만뒀을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혹사하다 목을 상했을 수도 있고요.

목소리가 강하면서도 맑은 편이다.

- 성창순 선생님도 엄청 맑으세요. 목이 쉬지 않아야 기량을 100%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폭포 아래서 수련한다고 걸걸해진다는 편견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단단해지는 거죠. 그리고 전에 10년간 ‘재비’라는 9인조 국악팀에서 유일한 보컬을 했어요. 곡들이 파워풀하다보니 연주에 묻히지 않고 목소리가 뚫고 나와야 하는 원톱 보컬로서 숙명 같은 거죠. 많은 무대에 서며 관객들에게 좀 더 시원한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보니 단련되었죠.

오단해 씨는 파워풀한 음악을 하는 '재비'라는 9인조 국악팀의 단독 보컬로 활약하면서 관객에게 좀 더 시원한 목소리를 들려주고자 노력하면서 더욱 강하면서도 맑은 목소리로 단련되었다. [사진=본인 제공]
오단해 씨는 파워풀한 음악을 하는 '재비'라는 9인조 국악팀의 단독 보컬로 활약하면서 관객에게 좀 더 시원한 목소리를 들려주고자 노력하면서 더욱 강하면서도 맑은 목소리로 단련되었다. [사진=본인 제공]

판소리는 감정표현이 직접적이고 사람들을 이야기 속을 끌어들여 … 하나의 '이야기꾼'이 되고자

판소리를 하면서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 언제인지

- 20대 말 저는 장구 하나를 메고 대금을 하는 형과 울진에서 강구, 포항까지 무전여행을 한 적이 있어요. 바닷가를 따라가다 보니까 한적한 마을에 할머니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어부 남편을 일찍 여의고 살아오신 할머니들은 오랜 만에 본 청년들의 소리와 연주에 흥겨워하셨어요. 밥과 잠자리면 충분하다고 한사코 거절하는데도 할머니들이 손자 생각난다면서 꼬깃꼬깃 접은 돈을 쥐어주시며 ‘꼭 굶지 말고 다녀야 해’라고 하셨어요. 무대가 아니라 가까이에서 제 소리에 귀 기울여주고 행복해하는 분들과 호흡했던 일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판소리에서 느끼는 독특한 매력은 무엇인지

- 연기와 노래가 어우러진 종합예술이죠. 우리 소리 중에는 가락이 매우 흥겨운데 가사는 가슴 아픈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판소리는 감정표현이 직접적이고 사람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죠.

그리고 판소리는 서사가 어마어마하게 길잖아요. 심청가는 완창하는데 4시간 반, 춘향가는 5시간 정도 걸립니다. 저는 심청가 완창을 한 번, 춘향가 완창을 두 번 한 적이 있어요. 예전에는 제 기량을 보여주려 했죠. 대학교(한예종) 졸업할 때 두 번째 완창할 때 더 잘하려 의욕이 앞서다 보니 전반부에 목이 쉬어 후반부에 너무나 힘들게 해냈어요. 2016년 세 번째 완창 할 때는 사람들이 지루해하지 않고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 수 있도록 방법을 연구하면서 하나의 ‘이야기꾼’이 되고자 했어요.  [계속]

2편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 대변하는 소리꾼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