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대중의 반역

6. 대중인 해부 제1단계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6 대중인 해부 제1단계’를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첫째, 정치 생활이든 비정치 생활이든 오늘날 사회생활을 지배하는 이 대중인은 어떤 사람일까? 둘째, 이들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어 “오늘날 유럽의 삶을 이끌려고 하는 사람들은 19세기를 진두지휘한 사람들과 매우 다르지만 19세기가 낳고 준비한 사람들이다”고 답한다.

오르테가에 따르면 1820년, 1850년, 188년 당시 명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역사적 상황의 중대함을 예견할 수 있었다. 그 예로 오르테가는 세 가지를 제시한다.

헤겔은 “대중이 전진한다”고 암시적인 말을 남겼다. 콩트는 “새로운 정신적 지도력이 없다면 혁명 시대인 우리 시대는 파국을 맞이할 것이다”라고 예고했다. 니체는 “허무주의의 물결이 밀려오는 것을 본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같은 예견이 전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역사를 예견할 수 없다는 말이 많았다. 이에 오르테가는 “역사를 예견할 수 없다는 말은 거짓이다. 역사가 예언된 경우는 셀 수 없을 정도다”고 반박했다.

더 나아가 “역사는 뒤돌아선 예언자라는 것이 역사철학 전부를 요약해주는 관점이다”고까지 말한다. ‘역사철학’ 전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역사가는 뒤돌아선 예언자”라는 것이다. 즉 역사가는 과거를 보고 미래를 예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근거로 오르테가는 일반구조(estructura general)를 들었다. 즉 미래를 예견한다는 것은 미래의 일반구조를 예측할 수 있을 뿐이고 이 일반구조가 과거나 현재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과거나 현재의 일반구조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일반구조 파악, 즉 자신의 시대를 정확히 보려고 한다면 먼 거리에서 보라고 오르테가는 말한다. 어느 정도 먼 거리? “답은 매우 간단하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거리면 되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 낮았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고 자주 들었던 그 클레오파트라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 이야기는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이 《팡세》에서 한 것이다. 그 대목을 보자.

“인간의 허무를 충분히 인식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사랑의 원인과 결과를 생각해 보기만 하면 된다. 그 원인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다. 코르네유. 그리고 그 결과는 무서운 것이다. 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 어떤 것" 즉,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한 이것이 전 지구와 왕자들과 군대들, 그리고 전 세계를 뒤흔든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더 낮았더라면 지구의 전 표면이 달라졌을는지도 모른다.”

(글레즈 파스칼 지음, 《팡세》, 김형길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전정판 6쇄, 2019, 16~17쪽)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한 이것이 전 지구와 왕자들과 군대들, 그리고 전 세계를 뒤흔든다. 사소한 이것은 바로 클레오파트라의 코이다. 이 코에 반해 로마의 통치자들은 로마를 배반했다. 여기서 유래하여 '클레오파트라의 코'는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소한 일"이라는 의미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는 높다는 것은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미녀라는 의미이다. 이 미녀에게 로마의 권력자들이 반해 모국에 해가 되는 행위를 하곤 했다.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인 셈이다.

더 보자. '클레오파트라의 코'에 관해서 앙리 페나-뤼즈가 《데카르트가 사랑한 사팔뜨기 소녀》(임왕준 옮김 김의규 그림, 이마주, 2008,144-152쪽)를 참고한다. 

여기서는《팡세》 '인간의 허무'를 '인간의 허영심'으로 번역하였다. ​

"인간의 허영심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고자 하는 사람은 사랑의 원인과 결과를 살펴보면 될 것이다. 그 원인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다. 우리는 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지극히 미미한 것을 의미함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영토와 왕과 군대와 온 세상을 뒤흔들어 놓는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만약 조금만 더 낮았더라면 지구의 표면이 달라졌을 것이다."

다시 《대중의 반역》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면 오르테가가 자기 시대를 볼 때는 이렇게 하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자신의 시대를 바르게 제대로 보려면, 사소한 것보다는 멀리서 크게 보고 전체를 파악하라.”

20세기 대중인을 분석하기 위해 오르테가가 선택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보이지 않는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그것은 19세기 후반 이전 시대이다. 17, 18, 19세기 전반에서 20세기를 보면 20세기를 정확히 볼 수 있다. 오르테가는 이같은 간격으로 19세기에 점차 대량으로 생산된 대중인의 삶, 생활을 분석한다.

우선 모든 면에서 물질적으로 풍요, 편리해졌다는 것이다.

“평균인이 지금만큼 자신의 경제문제를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어느 계층이든 각 사회계층 내의 평균인의 경제적 전망은 날로 호전되었다. 그의 생활수준 목록에는 날마다 새로운 사치품이 추가되었다. 그의 지위는 날이 갈수록 안정되고 타인의 뜻에서 벗어났다.”

대중인이 경제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에는 소수만 구입할 수 있었던 사치품도 날마다 살 정도로 여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처지도 안정되고 다른 사람의 의지에 좌우되지 않았다. 즉 다른 사람의 억압이나 지시를 받지 않게 되어 더욱 자유롭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대중인은 어떻게 생각하게 되었는가?

“전에는 운이 가져다 준 것이라고 여겨 운에 겸허하게 감사하게 생각하였는데, 이제는 감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요구해야 할 당연한 권리로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안락과 안정성에 육체적 편의, 즉 안락함과 치안이 더해졌다. 평균인의 삶은 평탄한 레일 위를 달리고 있어 그곳에는 폭력, 위험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이렇게 열린, 자유로운 상황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평균인의 마음 깊은 곳에 삶에 관한 하나의 인상을 심어주었다. 오르테가는 이를 옛 스페인의 속담으로 표현했다. “광대하구나! 카스티야여!” 즉 이 새로운 인간 즉 대중인에게 제시된 삶이란 모든 기본적이고 결정적인 영역에서 장애가 사라지고 자유로운 것이었다. 예전에 카스티야는 땅은 넓은데 인구가 적어 거림낌 없이 무엇이나 할 수 있어 이러한 속담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러한 삶의 자유가 과거의 일반인에게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사실과 그 중요성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 과거의 일반인에게 삶은 경제적인 면에서든 육체적인 면에서든 괴로운 것이었다. 그들에게 삶이란 태어나면서부터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장애물의 누적이었고 그러한 장애에 맞춰 괴로움 속에서 자신에게 남겨진 좁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밖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물질적인 면에서 시민적, 도덕적인 면으로 눈을 돌리면 대조적인 상황이 더욱 드러난다.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평균인 앞에 놓여 있던 사회적 장애물이 제거된다. 사회생활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방해나 제약도 받지 않게 되었다. 아무것도 그의 삶에 제약을 가할 수 없다. ‘광대하구나! 카스티야!”가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신분'도  '카스트'도 없었고 특권을 지닌 시민도 없었다.”

이로 인해 평균인은 모든 인간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이 이와 같은 상황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생활환경에 놓인 적은 결코 없었다. 19세기는 인간 운명에 근본적인 혁신을 가져왔고 새로운 무대가 만들어졌다.

이 새로운 세계가 가능하게 한 것은 세 가지 원리, 자유민주주의와 과학적 실험과 산업주의였다. 과학적 실험과 산업주의를 과학기술로 요약하면 자유민주주의와 기술이 가져온 것이다. 이 가운데 어느 것도 19세기에 발명한 것은 아니고 모두 17, 18세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19세기의 영예는 자유민주주의와 기술을 발명한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현실에 적용한 데 있다. 단순히 그러한 사실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원리가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를 이해해야만 한다.

오르테가는 19세기는 본질적으로 혁명의 시대였다고 진단한다. 그 혁명을 평균인 삶의 조건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즉 19세기의 특성은 평균인-사회대중을 그때까지 항상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조건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조건 속에 놓이게 한 데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대중인의 사회적 존재양식을 완전히 뒤집었던 것이다. 이것이 왜 혁명인가? 오르테가는 혁명을 기존의 질서에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질서를 무의미하게 하는 새로운 질서를 정착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 새로운 질서 속에 살게 된 19세기가 낳은 인간, 즉 대중인은 사회생활의 측면에서 볼 때 다른 모든 시대의 인간과는 다른 인간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한 것이 아니다. 다른 모든 시대의 인간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

“이전 어느 시대나  '평민’'게 삶이란 무엇보다도 제약과 의무와 예속, 한마디로 압력을 의미했다. 억압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오르테가는 이러한 억압은 법적, 사회적 차원뿐만 아니라 우주적 차원, 구체적으로 시대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과학기술이 물리적, 제도적으로 무제한 팽창을 시작한 100년 전까지만 해도 우주적 억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자든 부자든 평민과 똑같이 가난과 곤란과 위험한 세계에서 살았다.

19세기 중반 이후 평균인이 사는 세상은 이전과는 정반대이다. 이 새로운 인간을 둘러싼 세계는 태어날 때부터 아무런 제약이 없고 어떤 금지나 제지도 없다. 오히려 그의 욕망을 자극하여 무한대로 만든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세계는 완벽성과 완전성을 실제 소유할 뿐만 아니라 흡사 자연발생적으로 끝없는 성장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주민들에게 미래는 더욱 부유해지고, 더욱 완전해지며, 더욱 풍부해진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태양이 내일 다시 떠오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확신한다.

이러한 확신으로 인해 일반인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기술적 사회적으로 완벽한 세계에 살면서도 그것이 자연이 만들어낸 산물이지 탁월한 개인들의 천재적인 노력의 산물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모든 편의시설이 고도의 인간 능력에 기초한 것이며 그러한 능력이 조금이라도 결여되면 장엄한 건물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같은 분석을 토대로 오르테가는 현대 대중인의 중요한 심리적 특성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삶의 욕망, 곧 개성(persona)의 무한한 확대이다.

둘째, 생활의 편의를 가능하게 해준 모든 것에 대한 철저한 배은망덕이다.

오르테가는 이러한 심리적 특성을 응석받이 어린이의 심리적 특성과 같다고 말한다. 응석받이 아이의 심리적 특성을 오르테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응석을 부린다는 것은 욕망을 제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람에 대해서도 모든 것이 허용되고,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이런 방식으로 자란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경험한 적이 없다. 그는 주변에서 어떠한 압력도 받아본 적이 없고, 다른 사람과의 어떠한 충돌도 겪어본 적이 없어 유아독존적인 사고에 빠지고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습관, 특히 그 누구도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살아온 대중인이 이전 시대의 사람들과 다른 점이다.

새로운 대중인이 살고 있는 세계를 다시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새로운 대중은 가능성이 풍부하고 안전한 세계, 우리가 어깨 위로 태양을 들어 올리지 않아도 해가 높이 떠 있는 것처럼 아무런 사전 노력 없이도 모든 것이 준비된 세계에 살고 있다.”

이러한 세계에 살고 있는 응석받이 대중은 어리석어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물질적, 사회적 조직이 공기와 같이 주어진 것으로 보고, 그 기원도 공기와 같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조직은 결코 소멸하지 않고 자연물과 거의 같을 정도로 완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르테가는 이렇게 정리한다.

“19세기가 일부 생활 영역에 부여한 조직의 완벽성으로 인해 그 수혜자인 대중은 그것을 조직으로 보지 않고 흡사 자연물로 간주한다.”

이어 이러한 대중의 이상한 심리 상태를 오르테가는 더욱 명확하게 설명한다.

“(대중)그들은 자신의 복지, 안락에만 관심을 쏟기 때문에 그러한 복지를 가져온 근원에는 무관심하다. 그들은 문명의 편의 속에서 엄청난 노력과 세심한 배려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경탄할 만한 발명과 건축물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권리인 것처럼 자신의 역할은 문명의 혜택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르테가는 안락의 근원을 모르는 대중은 빵을 요구하면서 빵집을 때려 부순다고 설명한다. 20세기는 이러한 대중이 사회권력으로 사회를 지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