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대중의 반역

5 하나의 통계적 사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대중의 반역》에서 우리 시대와 우리 현재의 삶을 진단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 진단의 일부는 앞에서 이미 하였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능성의 선택지로서는 우리 삶은 훌륭하고 풍부하며, 역사상 알려진 어느 시대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규모가 다른 것보다 크다는 바로 그 이유로 전통으로 남아 있는 것에서 범람하여 원리, 규범, 이상을 뛰어넘어버리고 말았다. 우리의 삶은 과거의 어떤 삶보다도 활력이 넘친다. 그러나 그로 인해 더욱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과거로부터 아무런 방향성을 발견할 수 없으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3 시대의 높이’에서 과거와 현재의 심각한 괴리를 말한바와 같다. 즉 “남아 있던 전통적 정신은 모두 증발해버렸다. 과거의 모범, 규범, 기준은 이제 우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술이든 과학이든 정치든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과거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현실 속에서 해결해야 한다”며 오르테가는 “유럽인은 그의 곁에 살아 있는 영혼들도 없이 홀로 서 있다”고 묘사했다.

현대인이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으로 상기시키고 오르테가는 우리 시대의, 우리 현재의 삶의 진단을 마무리한다.

오르테가는 “삶이란 무엇보다 가능성의 산물로서 여러 가능성 가운데 실제로 우리가 희망하는 바를 선택하는 것”라고 말한다.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어 그 많은 가능성 가운데 실제로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결단하여야 한다.

“환경과 선택, 삶을 구성하는 2개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환경이라는 여러 가지 가능성은 우리의 삶에 주어지고 부여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 삶이 자신의 세계를 선택하는 게 아니다. 산다는 것은 일정한 불변의 세계, 이 우리의 현재 세계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관계를 ‘일종의 운명’으로 오르테가는 설명한다. “세계는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일종의 운명이다. 하지만 이 운명이 기계적인 것은 아니다.”

운명이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은 운명이 하나로 정해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오르테가가 비유한 것처럼 “우리는 궤도가 미리 정해진 탄환처럼 세계 속에 발사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숙명적으로 선택을 해야 하는 존재라고 오르테가는 말한다.

“우리에게 하나의 궤도를 강제하지 않고 몇 개의 궤도를 주고 선택을 강제한다. 산다는 것은 숙명적으로 자유를 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이 그리는 모습을 선택하도록 운명적으로 강요받았음을 느끼는 것이다. 한 순간도 우리의 선택 행위를 쉬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낙담하여 될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에 빠진 경우조차도 바르게 말하면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오르테가는 《돈키호테 사색》에서 “나는 나와 나의 환경이다(Yo soy yo y mi circonstancia). 따라서 내가 환경을 구해 내지 못한다면 나 자신도 구원되지 못한다”라는 오르테가 철학의 주요 개념을 제시하였다. 즉 이 문장의 첫 ‘나’는 나의 영혼도 내 육체도 내 성격도 아니고 또한 이 총체도 아니고 그것은 ‘생의 계획’이며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모습’ 즉 ‘내 생(삶)’이다. 두 번째의 ‘나’는 주관적인 자아, 즉 오르테가식의 나, 바꿔말하면 순수한 자아이다. 그리고 마지막 ‘나의 환경’이란 그 자아를 둘러싼 모든 것, 즉 주위 환경이다. 이 두 번째 ‘나’와 마지막 ‘나의 환경’과의 변증법적 대화, 즉 상호적인 다이나믹한 긴장 관계에 의해 첫 번째 나의 삶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오르테가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정동희 옮김, 민음사, 2006)에서 삶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삶 속으로 던져졌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던져진 이 삶 속에서 우리 스스로 삶을 건설해야 하며 창조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삶은 곧 우리의 존재이다. 우리는 삶 그 자체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이 같은 우리의 존재는 예정되어 있지 않으며 사전에 결정되어 있지 않은 우리 스스로가 결정해야만 하는, 우리 스스로가 미래적 존재를 결정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환경이 삶을 결정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그 반대이다.

즉 환경이라는 것은 그 앞에서 우리가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딜레마, 항상 새로운 딜레마이다. 그러나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특성이다. 이 모든 것은 집단적인 삶에도 적용된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대중이 지배하고 대중이 선택한다. 대중이 결정하는 시대의 정치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 오르테가는 지중해 연안 국가의 사례를 제시한다.

대중의 승리가 가장 앞선 국가들, 곧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사회생활을 보면 정치적으로 무계획적인 하루살이 삶을 살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대중은 세력이 매우 강대해서 어떤 반대도 용납하지 않는다. 대중이 소유하고 있는 권력은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형태이며, 역사상 이처럼 절대적인 정치적 힘을 가진 상황을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사회적 권력, 즉 정부는 하루살이를 하고 있을 뿐이다. 미래상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미래를 명확히 예고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어떻게 발전하고 전개해 갈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계획을 시작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요컨대 생의 설계도 계획도 없이 살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해 어디론가 가고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정해진 길도 예정된 궤도도 없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되는가 하면 대중은 앞에서 본 것처럼 자신에게 뭔가 특별한 요구를 하지 않고, 산다는 것도 기존의 자신을 반복하는 데 지나지 않고, 자기완성에의 노력을 하지 않고 매순간 물결을 따라 표류하는 부표 같이 표류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삶의 계획 없이 표류하는 인간이다. 그래서 그의 가능성과 권력이 아무리 막대하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건설하지 않는다.”

이런 유형의 인간이 우리 시대를 결정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대중화한 인간의 성격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이제 오늘날 역사 무대에 차고 넘치는 이 모든 대중은 어디서 왔는지 자문할 때이다. 오르테가는 대중이 대두하게 된 원인으로 유럽의 급격한 인구 증가를 통계수치로 제시한다.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 하나를 강조했다. 그것은 유럽의 역사가 시작된 6세기부터 1800년에 이르기까지 12세기에 걸쳐 유럽 인구가 1억8천만 명을 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1800년부터 1914년까지 1세기가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유럽 인구는 1억8천만 명에서 4억6천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 세 세대 동안 생산된 거대한 인간의 무리는 급류처럼 역사의 평원에 범람하여 대중이 승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오르테가는 이것은 동시에 미국과 같은 신생 국가들의 인구 증가를 추켜세우는 찬사가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가를 보여준다는 점을 지적한다. 바로 여기에 유럽의 미국화라는 환상을 깨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유럽은 지난 세기에 미국보다 더 많은 인구 증가를 기록했다. 미국의 인구증가는 유럽의 인구의 범람에서 형성된 것이다. 즉 유럽의 인구가 급증하여 이 가운데 많은 사람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인구가 증가했다. 출생이 아닌 이민에 의한 증가인 것이다.

오르테가는 유럽 인구의 양적인 증가보다도 증가 속도에 더 주목한다.

“유럽의 인구 증가 상당히 증가했다는 사실은 막연하나마 충분히 알려져 있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현기증 날 정도의 증가 속도이다. 이 현기증 나는 속도에는 엄청난 수의 인간이 너무나 급속도로 역사 무대에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이들을 전통문화로 흡수하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전통문화의 세례를 충분히 받지 못한 결과 대중은 ‘문명 속의 원시인’이 되었다고 오르테가는 진단한다.

“현재 유럽의 평균인이 19세기인들보다 더 건강하고 강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긴 하지만 훨씬 더 단순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해를 거듭한 문명 속에 원시인이 불현듯 출현한 인상을 준다.”

짧은 기간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대중을 위한 학교를 많이 세웠지만 문제가 있었다고 오르테가는 진단한다.

“학교는 지난 세기의 자랑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오로지 현대적인 삶의 기술만을 가르쳤을 뿐 계몽하지 못했다. 대중에게 열심히 생존수단들을 제공하기 했지만 위대한 역사적 사명감을 심어주지 못했다. 그들에게 현대적인 도구의 힘과 긍지를 허겁지겁 전해 주었지만 그 정신을 심어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신과는 무관하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는 세계가 마치 과거의 흔적도 없고 전통 문제와 복잡한 문제도 없는 천국인 것처럼 세계의 지배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제까지의 역사는 ‘인간’이라는 식물에 이로움을 주는 공공생활 방식을 얻기 위해 온갖 실험을 다해 본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이다. 잡다한 실험 끝에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와 과학기술이라는 두 원리에 인간 종자를 투여할 경우 단 한 세기만에 유럽인이 세 배로 늘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르테가는 이 엄청난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첫째, 기술 지식에 기반을 둔 자유민주주의가 지금까지 알려진 공공생활 가운데 최고의 형태이다. 둘째 이런 생활이 최상의 유형이 아니라도 좋은 유형이라면 앞의 두 원리, 자유민주주의와 과학기술의 본질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셋째 19세기보다 못한 생활 형태로 되돌아가는 것은 자살 행위이다.

그런데 19세기에 근본적인 악습과 제도적인 결함 때문에 새로운 인간, 곧 반역하는 대중적인 인간이 출현하여 삶을 구성하는 원리 자체를 매우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이런 유형의 인간이 계속해서 유럽을 지배하고 최종적인 결정권을 행사한다면 30년 정도만 지나면 유럽은 야만 상태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라고 오르테가는 우려했다.

“삶은 위축될 것이고 현재의 풍부한 가능성들은 실질적인 감소와 겹핍, 그리고 고통스러운 무기력으로 변할 것이다. 진짜 몰락을 겪게 될 것이다. 대중의 반역은 라테나우가 ‘야만인의 수직적 침입’이라고 부른 것과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최선과 최악의 힘을 지닌 대중을 철저히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발터 라테나우(Walther Rathenau, 1867~1922)는 실업가, 정치가, 철학자로 독일 외무장관으로 일하던 중 암살당했다. 외부 이민족의 침입을 수평적 침입이라고 하면 내부에서 야만인화하여 기존의 지배구조가 무너지는 현상을 야만인의 수직적 침입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