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대중의 반역

4. 삶의 확장(하)

 

앞에서 본 것처럼 오르테가는 현대인의 의식과 삶의 특징을 “현대인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더 큰 잠재력이 있다고 느끼고, 대조적으로 과거의 모든 것을 왜소한 것으로 보는 점이다”고 주장한다.

오르테가가 이렇게 하는 것은 10여년 동안 만연한 서구의 몰락론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을 배척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절대적인 몰락을 이렇게 설명한다.

“절대적인 몰락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생명력의 쇠퇴이며 그것을 자각할 때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이유에서 보통 간과하기 쉬운 하나의 현상 즉 모든 시대가 자신의 삶의 높이에 관해 갖고 있는 인식 또는 감정을 고찰했던 것이다.”

이러한 고찰은 1부 ‘3 시대의 높이’에서 한 바 있는데, 오르테가는 다시 이를 요약하여 제시한다.

“우리는 몇몇 세기는 스스로 ‘절정의 시대’라고 여긴 반면, 다른 세기는 더 높은 곳, 즉 고대의 찬란한 황금시대에서 쇠퇴해왔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결론으로는 아주 명백한 사실, 우리 시대의 특징은 과거의 모든 시대보다 우위에 있다는 기묘한 자부심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뿐만이 아니고 우리 시대는 모든 과거를 고려의 대상으로 하지 않고, 고전 시대, 규범적 시대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과거의 모든 시대 삶 형태보다 우월한 새로운 삶이 생각하고,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삶으로 보는 기묘한 자부심을 특징으로 하는 시대라는 명백한 사실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오르테가가 앞에서 검토한 ‘시대의 높이’ 문제를 다시 이야기한 것은 그 같은 고찰을 명확하게 하지 않고서는 현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한 시대가 몰락한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다른 시대를 자신의 시대보다 더 우월한, 수준이 높은 시대라고 보기 때문이고 이는 다른 시대를 존중하고, 다른 시대에 감사하고 다른 시대를 형성한 원리들을 숭배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 시대가 그렇게 한다면 가령 실현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 시대는 명료하고 확고한 이상(理想)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오르테가의 진단이다. 현대인은 과거를 무시하기 때문에 과거에 형성된 원리들을 이어받지 못한 나머지 이상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막대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무엇을 실현해야 할지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지만 우리 자신은 지배하지 못하고 있는 시대이다. 풍요 속에서 상실감을 느낀다. 이전에는 없던 수단, 지식,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현대 세계는 과거에 있었던 최악의 시대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즉 갈 곳도 없이 표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오르테가는 우월감과 불안감이라는 기묘한 이중성이 현대인의 마음속에 생겨났다고 지적한다. 프랑스 루이 15세가 어릴 적 섭정이었던 오를레앙 공에 대해 세간에서 말한 것이 현대인에게도 일어났다는 것이다. “모든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사용할 재능만은 가지고 있지 않다.”

지도적 소수자의 배임

20세기 대중이 이렇게 표류하고 있을 때 지도적 소수자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1부 1 밀집의 사실에서 말한 ‘선택된 소수자(minorías selectas)’말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사람이 아니고, 남에게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심지어 자기 혼자서는 처리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다. 이들이 20세기에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오르테가는 진보주의적 자유주의자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

“19세기처럼 ‘절정’의 시대라고 하는 확신은 시각적인 환상에 불과하다. 이는 우리의 방향성을 우주의 기계적인 작용에 맡김으로써 미래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르크스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진보주의적 자유주의도 자신들이 최상의 미래로 바라던 것은 천문학에서와 같은 필연성을 갖고 있어서 반드시 실현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에서 자신들의 의식에 방호복을 입히고 역사의 키에서 손을 떼고 경계를 풀어 민첩성과 실현 능력을 상실해버렸다.”

진보주의적 자유주의도 19세기가 ‘절정’의 시대라는 환상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미래도 필연적으로 최상의 상태가 되리라고 확신했다. 그러한 확신은 천문학에서 말하는 필연성, 매일 해가 뜨고 지고 날이 가도 달이 가고 변함없이 운행되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그냥 놓아두고 더는 미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런 의식을 누가 파괴하지 못하도록 방호복을 입고 자신들이 조정하는 역사의 키에서 손을 떼고 경계를 풀었다. 그 결과 민첩성과 실현 능력을 상실해버렸다.

오르테가는 이렇게 함으로써 “삶은 그들의 두 손에서 벗어나 전혀 손이 닿지 않게 되고 오늘날에는 항로도 알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진보주의자들은 미래주의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미래에 관심이 없고 미래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는다. 이것을 오르테가는 ‘지도적 소수자’의 직무유기 또는 배임이라고 지적한다. 지도적 소수자는 미래에 관심을 가지고 역사의 키를 두 손으로 꼭 잡고 경계하며 민첩하게 움직여서 최상의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중의 반역 배경에는 이러한 지도적 소수자의 배임이 있다는 것이다. 지도적 소수자가 지도력의 발휘하지 않고 사회권력에 공백이 생기니 그 자리를 대중이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오르테가는 대중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고, 지도적 소수자도 비판하면서 성찰을 촉구한다.

“진보주의자는 일견 미래주의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정작 미래에는 관심이 없다. 즉 미래는 경계할 것도 비밀도 없고 급격한 변화도 본질적인 혁신도 없다고 믿고 있으며, 게다가 세계는 일탈도 후퇴도 없이 쭉 그대로 앞으로 전진한다고 확신하여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고 현재에 안주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에 계획이라든가 전망, 또는 이상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는다. 누구도 그러한 것을 준비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중의 반역 이면에는 항상 존재하는 지도적 소수자의 배임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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