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하늘에 밝게 떠 있는 달은 한때 한국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태백이 놀던 달’이라고 했다. 우리가 달을 찾은 것은 윤극영의 창작동요 ‘반달’이 나온 후이다. 오래 전 한 아동문학가의 강연에서 들었던 이야기이다. 그럼 ‘하늘(天)’은 어떤가?

조성환 지음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퇴계·다산·동학의 하늘철학》(소나무, 2022)은 한국의 ‘하늘’을 다룬다. ‘하늘(天) 관념’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의 특징을 고찰하고자 하는 시론이다.

저자는 “종래의 한국사상사 서술이 중국사상사라는 거대한 숲에 가려져 그 독자적인 서술을 드러내는 데 소홀해 있었다”고 본다. 그 원인의 하나로 학자들의 시각이 중국이나 일본학계가 만들어놓은 기존의 틀이나 문제의식을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는 경향이 컸기 때문으로, 또 하나로 한국학계 내부에 거시적 시각의 사상사 연구의 부재를 그 원인으로 들었다.

이런 원인들이 작용하여 결과적으로 ‘한국철학’이라는 범주가 ‘동양철학’ 또는 ‘중국철학’이라는 범주에 가려졌고, 그래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워졌다고 본다. 중국의 ‘천(天)’과 한국의 ‘하늘’이 어떻게 다른지, 또는 중국철학의 ‘허심(虛心)과 한국철학의 ’실심(實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와 같이, 한중일 삼국 내의 비교사상 또는 비교철학적 작업은 소홀히 해왔다는 것이다. 이를 좀더 깊이 보면 이렇다.

조성환 지음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퇴계·다산·동학의 하늘철학". 입각표지. [이미지=소나무 제공]
조성환 지음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퇴계·다산·동학의 하늘철학". 입각표지. [이미지=소나무 제공]

“일반적으로 한국철학이라고 하면 전부 중국철학에서 기원한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고려시대의 불교와 조선시대의 유교는 전부 중국에서 수용된 것이다. 퇴계가 사용하는 개념이나 표현도 전부 중국의 주자(朱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치부해버리고 말면 ‘사상사‘를 서술할 수 없게 된다. 사상사는 철학사나 종교사라는 학과적 경계의 밑바닥에까지 내려가는 작업을 요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개념을 써도 함의가 같을 수 없다. 유학(儒學)의 천(天)과 동학의 천(天)이 같을 수 없고, 주자의 리(理)와 퇴계의 리(理)가 동일할 리가 없다. 이러한 차이를 밝히는 작업이야말로 ‘한국사상사’ 서술의 관건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한국사상사 서술방법론에 관한 사례연구일 뿐만 아니라, 한국철학의 정체성을 밝히는 시론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철학과 중국철학을 비교하는 ‘한중비교철학’이라는 방법을 취하면 종래에 한국철학사나 중국철학사에서 당연시되어 왔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하늘철학’이 그러한 예이다.

“종래에 경천사상 또는 하늘철학이라고 하면 중국철학의 전유물로 생각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한반도에서도 뿌리 깊었고, 중국 유교의 전래를 통해 더욱 심화되고 강화되었다. 심지어는 ‘성속(聖俗)의 분리’가 진행되었다고 하는 근대에서조차도 하늘은 건재하였다. 아니 오히려 부활된 느낌이다. 그것이 바로 인내천(人乃天)을 종지로 하는 동학·천도교의 출현이다. 반면 일본의 경우에는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천(天) 개념이 사어화(死語化)되었다.”

이 현상을 저자는 원래 한반도에서는 하늘에 대한 관심과 동경이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고, 일본은 원래부터 천(天)의 관념이 희박했기 때문으로 본다. 이러한 주장들을 ‘퇴계-다산-동학’의 문헌들을 통해 입증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저자는 ‘‘퇴계-다산-동학’에서는 일관되게 하늘에 대한 외경[畏天]과 섬김[事天]의 태도가 두드러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퇴계에서 주자학의 언설로, 다산에서는 천주학의 수용으로, 동학에서는 자생학의 형태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전통은 그 뿌리를 추적해가면 고대 한반도의 제천행사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고대 한반도인들은 황제나 임금이 아닌데도 ‘누구나’ 하늘을 향해 제사를 지내고 축제를 벌였다. 그것도 개별적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개인적이 아니라 공공적으로 거행하였다. 이를 종교학자 정진홍은 ‘하늘-경험’이라 불렀다.

저자는 “고대 한국의 하늘축제에서 보이는 공동체적 성격을 ‘하늘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하늘은 ‘동방’이라고 하는 하나의 ‘공동체’를 묶어주는 상징적인 구심점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고대 한국인들은 집단적으로 하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하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늘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건국신화에서는 하늘을 시조(始祖)의 고향으로 생각했고, 하늘과의 교감과 협동이 중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하늘사랑이 외래문화의 수용과 더불어 쇠퇴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왕권과 이념의 바탕으로서의 하늘의 모습이 두드러지고, 그 결과 팔관회에서는 비록 하늘-경험과 불교적인 것의 종합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지속된 것은 아니었고, 단지 비가 오기를 바라는 비정기적인 제천의례를 하는 정도였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에서는 지배층의 경우 한국인의 하늘 경험은 급격하게 쇠퇴한다.

이 하늘 경험이 동학으로 다시 나타났다. 동학은 자체 사상체계를 ‘하늘’을 중심으로 전개했다.

동학은 조선성리학이 그 효력을 다해갈 무렵인 조선말기에 한반도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자생적으로 등장한 주체적인 사상이었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자신의 사상을 유도(儒道)나 불도(佛道)와 대비하여 ‘천도(天道)’라 명명하고, ‘하늘’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한국)의 세계관(道)은 생명과 평등 그리고 존엄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한다고 선언했다. 인간은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우주적 생명력인 ‘하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동등하게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하늘 경험’을 “하늘을 그리다”로 명명하였다. 여기서 ‘그리다’는 ‘그리워하다(思)’와 ‘그리다(描)’의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하늘을 그리워하고 두려워하며, 마음속에 그리고 언설로 표출하였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그리스도교(기독교, 천주교)의 성행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움의 대상은 ‘하늘님’이다. 그래서 저자는 “하늘에 대한 그리움은 자유를 상실한 일제강점기에 극에 달하였고, 그것이 종교적으로는 동학(하ᄂᆞᆯ) 천도교(한울), 대종교(한얼) 등으로 분출되었으며, 문학적으로는 소월이나 만해의 ‘님의 문학’으로 표현되었다고 본다.

이처럼 이 책은 우리의 기억속에 희미해진, 그러나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고대 한국인들의 ‘하늘경험’을 하나씩 되살려 한국의 ‘하늘섬김전통’을 ‘천학(天學)’이라는 범주로 한국사상사를 기술하는 데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를 확인하며 중국과 한국의 천관(天觀)을 비교, 고찰하여 한국사상과 중국사상의 차이를 그러낸다.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퇴계·다산·동학의 하늘철학》 “한국에서의 하늘”이라는 시각으로 ‘하늘철학’을 이야기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하늘을 찾아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