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일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지 103년이 되는 날이다. 이미 100년이 지난 지금, 안타깝게도 세상은 시간을 역행하는 듯 다시금 편협한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들 간의 분쟁으로 인해 평화의 근간이 흔들리는 지경까지 왔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는 마치 히틀러가 각 지역에 살고 있는 게르만 민족의 안보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한 침략전쟁과 너무도 유사하게 전개되고 있다. 또한, 러시아에 대한 나토 동맹국들의 대응은 마치 국제연맹이 근본적으로 평화를 유지할 힘이나 의지가 없이 효력 없는 경제 재제를 남발하던 때와 동질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유럽만의 일이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세계에서 가장 큰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지역은 동북아시아이다. 이미 중국은 크게 둔화된 성장률로 인한 내적인 불만을 국수주의를 통해 잠재우려 하고 있으며,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소위 징고이즘(Jingoism)이라 불리는 극단적이고 맹목적이며 배타적인 애국주의는 과거 19세기와 20세기 초 대영제국이나 프랑스, 독일과 같은 열강들의 전유물이 아닌 바로 현 시대 아시아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이는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도 여실히 드러난 현실이다. 평화와 스포츠맨십을 기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행사가 각국의 이기심 충족과 자존심을 위한 싸움터로 변질되었다.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벌어진 중국의 편파판정, 러시아 피겨선수의 도핑의혹 등은 이번 올림픽을 아름다울 수 없는 국가들 간의 가상전쟁터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2017년 시진핑 주석이 미중 정상회담에서 “수천 년 역사에서 한국은 중국의 일부”라고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말한 일이 단순히 한 국가정상의 무지한 견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중국 내에서 한복이나 태권도, 김치가 중국의 전통문화라는 억지주장이 통하는 것 역시 한국의 고유문화에 대한 중국인들의 존중이나 배려가 결여된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언젠가 자신들의 것이 되어야 하는 한반도에 대한 숨겨진 야심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러시아의 도발이 심해질수록 중국 역시 미국의 영향력을 시험하고자 할 것이며, 시진핑 주석의 말은 자신이 생각하는 중국의 직접적인 통치영역을 어디까지 생각하는지에 대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기 전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면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듯이 아시아의 상황 역시 전쟁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기에 시대는 너무도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아시아의 정세가 다시금 혼란의 시기를 맞고 있지만, 1919년과 지금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이제 한국은 근대화에 실패하여 어떠한 경쟁력 없이 강국들의 자비에 호소할 뿐인 비참한 상태에 놓여있는 국가가 아니다. 오히려 경제력, 군사력, 문화력 모든 것들이 고루 발전한 선진국의 모습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으며, 한국 반도체의 경우 세계 최고 생산지의 하나로서 한국의 안보가 세계경제에 줄 수 있는 영향은 상당히 크다.

한류는 근처의 아시아 국가들만이 아닌 유럽과 미국, 남아메리카에게까지 퍼져 이제 한국을 모르는 나라는 많지 않다.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우리 손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한 것, 그것이 식민지배와 전쟁을 거치고 수많은 희생 끝에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민족이 달성한 쾌거이다.

100년 전의 민족의 운명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던 시대의 흐름이었다면, 이제는 미래의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우리의 선택이자 의지이다. 신민족주의 시대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도래한 지금, 한국 역시 우리의 안보와 발전을 위해 민족의식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해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인인 우리가 어떠한 민족인지, 어떠한 공통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동질성을 가지고 있고 반만년의 역사동안 우리를 유지시킨 동력은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것이 더 이상 내부의 분열과 갈등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거나 주변 국가들의 광적인 민족주의로 오염되어 우리까지 분란에 휩쓸리는 오류를 범하게 되지 않게 할 것이다.

필자는 미래를 걱정하는 한국인이라면 삼일절을 계기로 한번은 ‘3.1독립선언서’를 읽어보기를 바란다. 청나라와 러시아, 일본의 폭거에 시달리며 결국 일본에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민족대표 33인을 통해 보이는 민족의식은 분노나 복수심이 아니었다. 독립을 요구하는 글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선언서는 민족의 미래를 넘어 세계의 평화와 발전을 기리고 있으며, 일본에 대한 원망이 아닌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개척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글 속에 그 어떠한 구절에도 타민족을 비방하거나 헛된 우월주의로 남을 깔보는 문장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백범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에서와 같이 절망적인 시대를 살았던 민족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민족정신을 계승한 문화의 발전을 통해 세계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국가를 꿈꿨으며, 국민들이 복수심이나 좌절감에 빠지지 않고 희망을 선택하여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민족의 사명을 실현할 시대를 만드는데 집중하기를 원했다.

한국인들은 식민지배와 내전, 분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한류로 표현되는 현 시대를 창조하였다. 한강의 기적을 만들고 민주항쟁을 이끌며 IMF라는 국가적 위기를 금모으기와 같은 단결력과 투지로 2년 만에 극복해 냈고, 그 외에도 태안 기름유출사건 등의 재난을 국민 전체의 의지로 해결했다. 어떤 이들은 한류를 단지 K-Pop이나 드라마로 생각하지만, 이제 한류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넘어 우리의 선조들이 간절히 바라던 민족적 목표를 이루는데 매우 근접하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는 2019년 대통령 1차 투표 후 인터뷰에서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은 주변에 독재국가가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서도 강하고 자유로운 나라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한국은 우크라이나의 롤 모델”이라고 언급한바 있다. 또한, 2021년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 사태로 대규모 민주운동이 일어났을 때 미얀마의 젊은이들은 군부의 폭력을 극복한다면 자신들도 한국처럼 성공한 민주국가가 될 수 있다는 꿈을 이야기했다.

전 세계에서 한국은 억압받으며 고통 받고 있는 이들에게 자유와 평화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 어떤 희망도 가지기 힘들던 1919년, 위력의 시대에서 도의의 시대를 만들고 반만년의 역사동안 닦아온 인류적 정신으로 새로운 문명의 빛을 인류의 역사에 비추고자 했던 민족의 소망이 10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우리에게 현실적 사명으로 다가온 것이다.

간신히 유지되어 왔던 평화가 공격받고 강국들의 이기심이 기존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있는 이 때 우리는 우리의 문화와 역사에 눈을 떠야 한다. 반만년의 그 어느 시기에도 우리에게 진보가 구원이 되질 못했고 보수가 구원이 되질 못했다. 오히려 진보와 보수라는 편협한 시각은 외적인 위기로부터 우리의 눈을 멀게 했고 매번 이를 깨닫고 후회를 할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은 뒤였다.

다른 국가들이 맹목적 애국심에 빠진다고 해서 우리도 그래서는 안 된다. 참된 민족의식이란 역사와 전통을 자괴감이나 오만함 없이 왜곡되지 않은 시선으로 직시하며, 여러 실패와 성공을 통해 시대를 거치며 내려온 공동의 꿈, 함께 이루고자 했던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실체를 찾으며, 그 실체가 여러 혼란과 불안 속에서 우리를 더 현명하게 하고 힘을 모을 수 있도록 하는 등불이 되도록 하는 노력이다. 이것이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하는 나라의 학문, 곧 국학이며 그 어떤 역사교육보다 중요하게 다뤄야 할 현 시대의 과제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성공이 우리만의 성공이 아닌, 세상에 희망과 모델이 될 수 있는 한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가장 잘못한 것이 있다면 이념적으로, 사상적으로 분리되어 내분을 일으키다 기회를 놓치고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남을 탓하고 운명에 비관하는 것이 아닌 희망과 꿈을 이야기 했던 3.1절의 정신을 다시금 되새기며 내적인 분열을 경계하고 우리의 가치를 회복하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독립과 자립은 민족의 가치관 회복이 없이는 불가능 하다는 것, 누군가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 보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떠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지를 인지하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 것을 민족지도자들은 알고 있었다.

다시금 강국들의 이권다툼에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새로운 문화운동, 한국적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이 원했던 진정한 독립을 이루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