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무가 눈앞에 있으나 나무는 보이지 않고 숲이 보였다. 숲이 보이는가 했더니 이내 숲은 사라지고 산의 속살이 보였다. 그러나 또 그 산은 온데간데 없고 거기 흐르는 맥이 집히더니 결국에는 그 깊은 속에 세勢가 숨어 있음을 알았다. 그러고 나니 바로 기氣가 느껴지면서 만유의 형상이 모두 음율로 다가왔다. - 이종상, '음치의 침묵 속에 엄청난 선율이...' 중에서 -

일랑一浪 이종상 화백. 그의 재능을 알아본 스승에게 이끌려 대학교 2학년 때 일랑이란 아호를 지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부터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연이어 입상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5천 원권과 5만 원권 화폐 영정 화가로도 유명한 일랑 선생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과거와 현재를 통섭한 자신의 정신적 토대 위에 한계없는 창작 활동을 펼치며 한국 예술을 세계화한 한국 화단의 거대한 파도 같은 존재다. 화가이자 철학자로서 독도문화심기, 문화영토론을 주장하고, 우리 민족이 가진 자생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평생 문화운동가의 삶을 살아온 그를 1월 4일 국학원에서 만났다.

[사진=김경아 기자]
[사진=김경아 기자]

2022년 임인년은 호랑이의 해입니다. 화백님께서도 범띠이신데요. 그래서 어렸을 때 조모님과 모친으로부터 유달리 엄격한 교육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집안이 전부 쥐띠였어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동갑으로 쥐띠시고, 어머니 아버지도 쥐띠신데 동갑이시고. 위에 형님이 한 분 계신데 형님도 쥐띠셨죠. 이상하게 집안사람들 모두가 쥐띠였어요. 내가 호랑이 띠이지만 12지간의 의미 같은 건 모르고 자랐죠.

그걸 학문적으로 할머니가 가르쳐 주실 수는 없으셨지만 아주 좋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너는 우리 집안의 유일한 호랑이'라는 거였죠. "너는 강한 사람이니까 약한 사람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에 차별을 두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 말씀이 지금도 아주 뿌리 깊게 박혀 있습니다. 워낙 어려서부터 그렇게 할머니한테 교육을 받았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또 그러셨으니까요.

결과적으로 그렇게 받은 교육은 내가 서울대 교수를 하고 아이들을 가르칠 때에도 그대로 드러났어요. 내가 가르치는 서울대 애들이 잘났다고 으스대거나 다른 학교 아이들을 폄훼했다가는 나한테 아주 혼이 났었죠.

그리고 서울대에 들어서면 수위들이 너무 애쓰는 것 같아서 먹을 걸 사 가지고 교수실로 가기 전에 수위실에 들어가서 환담을 나누면서 같이 나눠 먹다가 나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내가 거기서 나오는 것을 학장님이 보시고는 학장실로 나를 불러서 "체통 없이 교수가 신분 낮은 곳에서 나오느냐"라고 혼을 내셨어요. 그때 학장님에게 사람들에게는 높고 낮음이 없다고 대답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할머니 얘기도 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그게 어때서요? 맛있는 걸 샀기 때문에 좀 나눠 먹으려고 들어갔었어요."라고만 했어요.

이처럼 제가 단순히 그냥 띠가 호랑이가 아니라, 호랑이 띠이기 때문에 엄한 가정교육을 무섭게 받고 자라며 그런 생활이 몸에 베인 거였죠.

 

정치적으로 물리적으로 가시적으로 만든 평등은 평등사회에 대한 착각

우리 사회에 차별은 없어져야 하지만, 잘못된 공평으로 오히려 공평하지 못한 일들이 이상하게 팽배해 있습니다. 공평이라는 것은 노력한 사람은 잘 살고 게으른 사람은 못 사는 게 공평한 거죠. 그런데 게으른 사람이나 밤새워서 노력한 사람이나 성적이 똑같이 나오거나 돈을 똑같이 벌게 되면 그게 평등하지 못한 거예요.

지금의 평등사상은 잘못된 것입니다. 외압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물리적으로 가시적으로 평등하게 만드는 것을 평등사회라고 착각하고 있어요.

제일 안 좋은 것이 "좋은 학교 없애." "서울대도 없애." "국전? 일반인들이 출품하기 힘든 미술전람회야. 국전도 없애." "예술원 회원도 없애. 양로원이지 뭐하는 데야." 이런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 겁니다. 과연 무엇이 평등한 건지, 평등의 의미란 어떤 것인지 묻고 싶어요.

 

일랑이란 호는 언제 받으셨나요?

대학교 2학년 때 받았어요. 당시 유명한 한학자 월당月堂 홍진표洪震杓 선생에게서 받았습니다. 이대 교수를 하시다가 서울대로 오신 남정藍丁 박노수朴魯壽 선생님이 소개해 주셨어요. 그분이 "그림을 보니까 앞으로 네가 2~3학년이 되면, '야, 종상아' 이렇게 하기가 좀 어려울 것 같으니까 호를 하나 짓자"라고 하셨어요.

나는 당시 우리의 국학에는 담쌓고 살아온 사람이었죠. 중고등학교 때 서양화 선생님한테 배웠으니까 당연히 서양화를 배우러 왔는데 그분이 호니 뭐니 하니까 하지 않으려고 도망을 다녔어요.

젊은 애들은 호 부르는 거를 아주 싫어하는데, 선생님은 "아니야"라고 하시며 또 말씀하시고. 조금 지나면 다시 또 말씀하시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호, 두 분의 생년월일과 내 생년월일을 가져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결국은 적어서 드리게 되었죠.

그걸 월당 홍진표 선생님에게 건네 드린 겁니다. 워낙 유명한 화가가 부탁을 하니까 "이게 누구냐?"라고 물으셨다고 해요. 학생이라고 하니까 "대학생에게 벌써 호를 주느냐?"라고 물으셨다고 하더군요. 박노수 선생님께서 "그건 묻지 마시고 앞으로 이름 부르기가 어려워질 것 같아서 그렇다고" 답하셨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일랑 이종상' 풀이를 받았는데, 한문으로 一자에 대한 설명, 浪자에 대한 설명을 A4용지 6장에다 빽빽하게 풀어주셨습니다.

그때는 너무 어려워서 읽지도 않았어요. 물론 호도 안 썼죠. 선배들도 많은데 저학년인 어린놈이 선배들도 없는 호를 쓰면서 "나 일랑이야" 이러고 다닐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도 학교에 소문이 난 거예요. 어느 날 다른 선생님이 "자네 호를 지었다면서? 벌써부터 왜 호를 짓고 다니냐?"라고 몹시 꾸중을 하셨죠.

그리고 3학년이 되면서 국전에 특선을 하고 자꾸 신문에 오르내릴 때였습니다. 저 뒤에서 누가 "어이, 일랑! 자네 나 좀 보세"하는 거예요. '어이, 일랑? 그거 내 호인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봤더니 호를 지었다고 꾸중하시던 그 선생님이 처음으로 내 호를 부르시는 거예요.

그 바람에 학생들이 다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부터 내 이름은 없어지고 어디서나 일랑으로만 불리게 되었죠. 호를 지어주신 박노수 선생님은 그 후 몇 년이 더 지난 뒤에 호를 부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제자 그룹도 선생님의 호를 따랐다고 들었습니다.

내 제자 모임이 둘이 있었어요. 그 하나가 내 호 '일랑'에서 앞 글자인 一자를 딴 제자 그룹이었죠. 사람들은 지금도 이상하다고 해요. 서울대 교수를 오래 했는데 내 제자 모임은 대부분 서울대 출신들이 아니거든요.

동양화는 서예를 해야 되니까 한때 동방연서회에 나가서 한문을 배웠습니다. 그곳에 돌아가신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선생님이 계셨어요. 아주 오래된 유물로 남아있는 글자를 산씨반명체散氏盤銘體라고 하는데, 여초 선생님께 산반체부터 시작해서 초서草書까지 배웠어요.

그곳은 원래 여초 선생님의 친형님인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선생님이라는 아주 유명하신 분이 운영하던 서예실이었습니다. 일중 선생님이 동생 여초 선생님에게 서예실을 물려주신 거예요. 거기서 문인화를 가르치던 분이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 선생님입니다. 노수현 선생님은 서울 미대 교수로 저의 1대 스승이셨어요. 그런데 노수현 선생님이 거기서 문인화를 가르치시다가 일중 선생님과 같이 그만두셨어요.

 

심산 노수현 선생의 나이 많은 제자들에게 문인화 가르쳐

동방연서회 노수현 선생님의 제자들은 다들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었습니다. 대학교수도 있고, 나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리시는 분들도 계시고, 대단한 분들이셨는데 문인화를 더 이상 배우지 못하고 있었죠.

그러다 심산 스승의 제자인 제가 서예를 배우러 간 거예요. 어느 날 여초 선생님이 레슨비를 받지 않고 저에게 서예를 가르치겠다고 하셨어요. 그 대신 제 스승 노수현 선생님이 가르치던 제자들을 가르치라는 거였죠.

처음에는 말을 안 들었어요. "우리 스승님이 가르치던 제자를 내가 어떻게 가르칩니까. 전 제 공부만 하겠습니다."라고 우겼어요. 그런데 나중에 노수현 선생님이 직접 오셔서 사정을 하셨습니다. "내 제자를 여기다 두고 갔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제자들을 이어서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내가 남긴 제자들을 네가 마무리해서 좀 가르쳐라."

 

화가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

그래서 그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그분들이 가고 난 다음에 서예를 배우고. 두 가지를 한 거죠. 그분들 모임이 굉장히 잘 돼 있었습니다. 자신들 모임의 이름을 내 호의 한 일자를 따서 짓겠다고 했어요. 나보다 손 윗분들이고 내가 손주뻘이니, 지금까지 생존해 계시면 100살이 넘었거나 90살이 다 넘으신 분들이죠.

그렇게 연세 많은 분들이 새파랗게 젊은애한테 배우신 거예요. 대단한 분들이죠. 아무리 교수님이 내게 배우라고 하셨어도 "저런 어린애한테 뭘 배울 게 있냐?"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열심히들 배우셨습니다.

그때 제가 가르친 게 '인간이 되라'는 거였어요. "화가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어라." 같은 스승에게서 배운 제자들이니 사실 같은 급 아닙니까. 그런데 이 얼마나 시건방진 이야기예요. 새파랗게 젊은 놈이 와서 하는 소리가. 하지만 제게는 '그림만 가르치는 환쟁이는 되지 말자'는 소신이 있었던 거였죠.

 

이종상, 호랑이해 연하장

평생 어떻게 하면 인간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자기 전공을 통해서 인간이 되어가야 된다. 인간이 되어가지 않으면 아무리 전공을 잘해도 그 사람은 국가에 아무 소용이 없는 사람이다." 그게 그때부터 가졌던 제 철학입니다. 다시 말해 후소론後素論이죠. 쉽게 얘기하면 인간이 먼저 되고, 전공도 있고, 미술도 있고, 예술도 있고, 학문도 있다는 얘기예요.

그걸 제가 평생 잊지 않고 공부하고, 지금도 내가 어떻게 하면 인간이 될 수 있는가를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화육법畫六法의 기운생동, 골법용필骨法用筆, 응물상형應物象形 등을 가르치면서 늘 후소론을 얘기했어요.

아무리 중국의 누가 말했건 간에 그 뜻은 우리나라의 단군 할아버지와 이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닌 것은 우리 홍익인간 정신이 아니에요. 소위 삼재三才 사상도 사실은 인간이 되는 거예요. 천지인天地人을 삼재라고 합니다. 천지인의 센터가 있어요. 그 센터가 뭐냐 하면 '나'예요.

결국은 내 제자들이 一자를 따서 벗友을 한다는 게 그러한 사고입니다. 거기에 서울대 나온 사람은 단 한 명 있었어요. 대부분 다 일본학교를 나오신 분들이에요. 그분들이 내 一자를 따서 友자를 쓴 것은 내가 자신들의 새까만 후배니까 벗한다는 거죠. 일랑하고 벗하는 우리들. 이 뜻이 일우회예요. 지금은 다 돌아가셨죠.

 

두 번째 제자 그룹은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

실기 외에도 나는 이론을 많이 가르쳤습니다. 동양화 수업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동양철학과 이론을 가르치니까 각 학교 아이들이 저한테 몰리는 거예요. 아주 간단한 사군자에도 그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동양철학을 이야기하니까. 구도만 맞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죠.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미학 이론에 동서철학을 이야기하니까 모이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모인 거예요.

그러고 나서 '일우'가 있으니까 내 호의 뒷글자 물결 랑자를 써서 ‘랑우회’라고 붙였더라구요. 내가 나이가 많은데, 이 친구들과 어떻게 벗을 합니까? 일우회가 있으니 그걸 보고 딴 건데, 왜 벗 우자를 썼는지도 모르고 한 거죠.

 

땅 속 깊이 묻어도 향기가 짙어지면 지나가는 이가 땅을 판다

그래서 "좋다. 이왕 그렇게 했으니까. 그 대신 이건 너희들만 알고, 나하고 전람회에 가거나, 돈을 벌기 위해 전시회에서 같이 랑우회를 알린다거나, 너희들과 내가 랑우회의 사제 관계에 있다는 걸 일체 알리면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땅속 깊이 묻어 두어도 향기가 짙어지면 자연히 지나가는 사람들이 향내로 알고 땅을 판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와라. 자꾸 어디에 플래카드 걸고 '랑우회'라고 절대 얘기하지 마라." 이게 나하고 약속이에요.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어요. 일우회는 아는데, 랑우회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내가 창립 멤버로 있는 중앙일보 미술대상 초대 작가전에 랑우회 제자들 이름이 자꾸 올라오더군요. 

 

삼성과도 인연이 깊으셨던 것 같습니다.

중앙일보 건물을 만들 때 무대막을 했습니다. 시청 삼성 본사 건물을 지을 때도 52m 암벽을 파서 송학도를 그렸어요. 왜 석수장이처럼 돌멩이를 직접 파서 그 자리에서 소나무를 그렸을까요?

우리 자생문화에 반구대 암각화가 있습니다. 고려도 고구려도 아닌 훨씬 그 이전, 벌써 선사 시대에 암각화 미술이 있었다는 얘기예요. 문자도 하나 없는데 어떻게 미술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암각화를 그려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 송학도가 제 암각화 1호예요.

당시 이병철 씨는 쉽게 만날 수 없는 높은 분인데 그 작업을 할 때 밤낮으로 내려와서 작업실에 자주 들어오셨어요. 먼지 나니까 들어오시지 말라고 하면, 점심 다른 데 가서 먹지 말고 회장실에 올라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올라가면 그 자리에서 꼭 국수를 삶아 주셨죠. 그러니까 굉장히 가까워질 수밖에요.

그분 앞에 오면 다른 분들은 턱이 떨려서 말을 못할 정도로 어려워들 하는데, 나는 그냥 우리 할아버지 같고 형님 같고 그랬어요. 상당히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중앙일보에서 미술 전람회를 만드니까 또 관여할 수밖에 없게 되었죠.

랑우회 제자들은 그걸 몰랐습니다. 그런데 중앙일보 건물에 걸린 대형 플래카드에 전람회 초대 작가 이름들이 나오는데, 거기에 나와 동등한 자격으로 3명이나 랑우회 제자의 이름이 보이는 거예요. 나는 랑우회인지 알죠. 속으로 ‘야, 이 자식들이 벌써 이렇게 컸나’ 했어요. 서로 얘기를 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래서 내가 한 말이 맞는구나 했습니다. "향내가 깊으면 스스로 열심히 하면, 자연히 나하고 벗하게 되고 세상이 랑우회를 알게 된다. 그때까지는 절대로 알리면 안 된다." 그걸 그들도 지키고 나도 지킨 거죠. 지금 그들이 곳곳에서 대학교수를 하고 있습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