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중국의 포스트동북공정, 사실상 고조선‧고구려 역사 삭제 수순”에서 계속)

통화 만발발자 유적은 우리 학계에서 고조선 멸망 후의 문화변동과 고구려 국가성립, 고구려 문화의 기원 등과 관련해 주목해 온 유적이다.

해당 유적이 자리한 통화 일대는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남았고, 육로와 하천로를 통해 각지를 오가는 관문이자 요도였다. 압록강 상류 인근에 위치한 만발발자 유적의 동쪽은 백두산과 연결되고, 통화를 관통하는 압록강의 주요지류인 혼강을 통해 고구려의 초기 발흥지인 환인, 집안과도 연결된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남하하여 도착하였다고 하는 졸본천으로 내려오는 길목이란 점에서 주목받았다.

통화 만발발자 유적의 위치. 압록강의 주요 지류인 혼강을 통해 고구려 초기 발흥지인 오녀산성을 포함한 집안, 혼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 편의 환인지역과 연결된다. [사진=동북아역사재단]
통화 만발발자 유적의 위치. 압록강의 주요 지류인 혼강을 통해 고구려 초기 발흥지인 오녀산성을 포함한 집안지역, 혼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 편의 환인지역과 연결된다. [사진=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재단 박선미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소장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 관계를 고고학적으로 규명할 실마리를 ‘통화 만발발자 유적’에서 찾을 수 있다”라며 “역사 편년으로 표현하면 고조선 후기에서 고구려 성립기에 해당되는 유구와 유물들이 모두 발견된다”라고 밝혔다.

박선미 소장이 연구총서 《길림성 통화 만발발자 유적-고조선과 고구려의 만남》 중 ‘고조선고구려사 속의 통화 만발발자 유적’을 통해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발발자 유적은 신석기시대부터 명대까지 총 6기의 문화권이 층층이 쌓여 있는 독특한 유적이다. 그중 서기 전 4세기부터 서기 원년 전후로 편년되는 3기와 4기 문화권이 주목된다. 고조선의 물질문화로 알려진 세형동검문화 요소와 방단석광적석묘와 같은 고구려 초기 물질문화 요소가 복합적으로 나타나 둘 사이의 연관성을 확인할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동북아역사재단 박선미 한국중고세사연구소 소장은
동북아역사재단 박선미 한국중고세사연구소 소장은 "고조선 후기에서 고구려 성립기에 해당하는 유구와 유물이 상하로 퇴적된 만발발자 유적 3기와 4기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사진=본인 제공]

3기와 4기 문화층에서 특히, 무덤 양식인 묘제와 관련해 고조선의 대개석묘(고인돌)에서 고구려의 적석총으로 이행해가는 과도기에 해당하는 ‘적석시설을 한 고인돌’ 단계인 대개석적석묘(고인돌의 덮개돌을 한 적석묘)와 무기단석광적석묘가 발견되었다.

무기단석광적석묘는 ‘돌무지무덤’으로 불리는 고구려 적석총의 원형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적석총은 중국 동북 여타지역과 구별되는 특징적인 무덤 형식으로, 그 기원에 대해 명백히 밝혀진 바 없어 일찍부터 적석총의 기원에 대해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만발발자 유적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묘제와 화장 등 장례 습속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관련성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주거지에는 구들의 초기 형태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무순 연화보 유적에서 발견된 것과 연결될 수 있다. 연화보 유적은 고조선 후기 유적으로 거론되는 대표적인 고고학적 자료이고, 구들은 고구려 주거시설로 계승되었다.

이외에도 M56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팔찌는 고구려 초기의 팔찌 형태인 망강루 M4호 무덤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것인데, 망강루 유적은 환인에 있는 고구려 유적이다.

만발발자 유적의 3기와 4기 문화층 무덤. 고조선의 대개석묘(고인돌)에서 고구려의 적석총으로 이행해가는 과도기 형태가 나타난다. [사진=동북아역사재단]
만발발자 유적의 3기와 4기 문화층 무덤. 고조선의 대개석묘(고인돌)에서 고구려의 적석총으로 이행해가는 과도기 형태가 나타난다. [사진=동북아역사재단]

역사기록 상 고조선 멸망은 서기전 108년, 《삼국사기》에 나타난 고구려의 건국 시기는 서기전 37년이다. 고구려의 건국시조 고주몽과 관련해 《삼국유사》는 ‘단군의 아들檀君之子’라고 표기해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했음을 밝혔다. 반면, 광개토대왕비(정식명칭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에는 “북부여에서 나온 ‘천제의 아들天帝之子’”라고 표현했다.

박선미 소장은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했노라고 스스로 밝힌 문헌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여러 고고학 자료를 통해 둘의 계승성을 밝힐 수 있다. 또한 단편적인 기록이지만 여러 사서에서도 둘의 계승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라고 했다.

중국 기록으로는 《후한서後漢書》 ‘예濊조’에 “예, 옥저, 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의 땅이다”라고 했고, 《구당서舊唐書》 ‘열전’에는 당이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을 ‘조선왕朝鮮王’으로 책봉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1922년 요동지역인 하남성 낙양에서 발견된 연개소문의 셋째아들인 연남산의 묘지명인 ‘남산요묘지명男産療墓誌銘’에는 “군의 휘는 남산이니 요동 조선인이다”라고 기록했다. 고구려 말 귀족 출신 무장으로 당에 투항한 고자(高慈, 665~697)의 묘지명인 ‘고자묘지명高慈墓誌銘’에도 그를 ‘조선인’이라고 기록해 고조선과 고구려의 관계에 대한 당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출간한 《길림성 통화 만발발자 유적-고조선과 고구려의 만남》. [사진=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재단이 출간한 《길림성 통화 만발발자 유적-고조선과 고구려의 만남》. [사진=동북아역사재단]

끝으로, 박선미 소장은 “만발발자 유적이 있는 통화 지역은 고조선의 핵심지역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고구려 초기 유적이 집중되어있는 환인과 집안에 가깝다. 고조선이 연, 진, 한과 각축을 벌이며 점차 세력을 잃는 되는 정치적 격변기에 고조선 외곽에 있던 지역 집단이 독자적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여러 고고학 자료가 고조선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가 고조선 멸망을 기점으로 해서 고구려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강조하며 “만발발자유적과 같은 시기의 고고학 자료를 더 많이 검토해야 한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