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상류 북서쪽, 목을 빼고 엎드려 있는 거북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왕팔발자王八脖子’라고도 불린 중국 통화시의 만발발자 유적. 고조선과 고구려 문화가 상하로 퇴적된 이 대형유적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 관계를 명확히 밝혀줄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 미싱링크가 되어 줄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소장은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소장은 "통화 만발발자 유적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관계를 풀어줄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점, 중국의 포스트 동북공정이 본격화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 [사진=본인 제공]

동북아역사재단(이하 재단)에서 출간한 《길림성 통화 만발발자 유적-고조선과 고구려의 만남》에서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관계와 고구려 문화의 기원을 밝히는 연구결과가 담겨있다.

박선미 소장(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을 비롯해 강인욱 교수(경희대 사학과), 강현숙 교수(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이종수 교수(단국대 사학과), 이후석 연구교수(경희대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 김상민 교수(목포대 고고문화인류학과), 양시은 교수(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등이 집필진으로 참여했다.

이 연구를 기획한 박선미 소장은 “만발발자 유적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해야 한다. 첫째는 ‘포스트 동북공정’이 사실상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를 삭제하는 수순에 들어섰다는 점, 둘째는 서기전 4세기에서 서기 전후에 해당하는 3기와 4기 문화층을 통해 고조선과 고구려의 관계를 풀어줄 열쇠가 된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해 12월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관계와 고구려 문화의 기원을 밝히는 연구총서 '길림성 통화 만발발자 유적- 고조선과 고구려의 만남'을 발간했다. [사진=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해 12월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관계와 고구려 문화의 기원을 밝히는 연구총서 '길림성 통화 만발발자 유적- 고조선과 고구려의 만남'을 발간했다. [사진=동북아역사재단]

먼저, 중국의 ‘포스트 동북공정’ 측면에서 살펴보자. 통화 만발발자 유적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56년이다. 그러나 중국은 60년이 흐른 2019년까지 정식 발굴보고서를 내지 않았다. 80년대와 90년대 몇 차례에 걸쳐 조사와 발굴을 하고도 1988년 발표한 개략 보고가 전부였다. 그런 가운데 발굴 당시 기록 중 일부가 소실되고 유물 일부도 부패하고 없어지기까지 했다.

1999년 중국 10대 발굴로 선정하고, 2001년 국가중점문불보호단위로 지정했음에도 개별적인 주제에 대한 중국학자의 연구물이 간헐적으로 발표된 것뿐이었다. 60여 년 만에 나온 2019년 발굴보고서도 중국사적 시각에서 해석되고, 중국사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그런 가운데 2016년 유적 바로 앞에 통화 장백산민속박물관을 개관해 장백산 일대 조선족과 여진족, 만주족 등의 문화 풍속 관련 전시를 했고, 2017년에는 통화시박물관을 정식 개관했다. 통화지역에서 출토된 선사시대부터 청대까지 유물을 전시했는데 이 유물 가운데 통화 만발발자 유적과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이 있다. 문제는 전시 설명에서 기자를 한민족을 포함한 ‘예맥의 시조’라고 묘사해 역사 왜곡이 상당하다는 점이다. 중국은 은나라의 유민 기자가 이주해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을 정설로 하여 전시하고 있다.

아울러, 2018년 만발발자유적민속공원을 조성해 광장과 민속 풍경 거리, 호수 등을 만주족 문화 일색으로 구성했다. 만발발자 유적이 ‘압록강 중상류 지역의 대표적 유적’이라고 선전하면서 이 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고구려 대신 만주족을 내세우고 있다.

만발발자 유적 앞에 세워진 통화시박물관(2019년 촬영). [사진=동북아역사재단]
만발발자 유적 앞에 세워진 통화시박물관(2019년 촬영). [사진=동북아역사재단]

만발발자 유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신석기시대부터 명대까지 총 6개의 문화층으로 확인되었다. 중국 측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가장 이른 시기부터 ▲ 신석기시대 문화층 ▲ 만상晩商~서주西周 시대 문화층 ▲ 춘추전국시대 문화층 ▲ 서한~양한兩漢시대 문화층 ▲ 위진魏晉시대 문화층 ▲ 명대明代 문화층으로 구분한다.

이에 대해 한국 학계는 △ 신석기시대 △ 청동기시대 조기(상대 만기~서주시기) △ 청동기시대 만기(춘추전국시대) △ 서기전 2세기~기원전후(서한~양한 교체시기) △ 위진시대 △ 명대로 구분한다. 그중 5기 위진시대라는 명칭으로 구분된 문화층은 전형적인 고구려 묘제와 토기 등이 포함된 고구려 문화층에 해당된다는 것에 이견이 없다. 뿐만 아니라 3기와 4기는 고조선 후기와 고구려 초기에 해당되는 묘제와 유물이 발굴되었다.

통화 만발발자 유적의 시대구분에 대한 중국과 한국 학계의 입장. [자료=《길림성 통화 만발발자 유적-고조선과 고구려의 만남》 ]
통화 만발발자 유적의 시대구분에 대한 중국과 한국 학계의 입장. [자료=《길림성 통화 만발발자 유적-고조선과 고구려의 만남》 ]

박선미 소장은 “상황을 종합해보면 중국이 동북지역 소수민족에 대한 이른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선전과 역사 대중화를 본격적으로 구현하고 있다고 판단된다”라며 “현재 중국은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이나 유물 자체를 건들지는 않으면서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라고 했다.

박 소장은 사례로 “중국학자도 5기 문화층이 고구려 유적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 성격을 중국사의 일부라고 규정하고, 시대구분을 ‘위진시대’라고 표기함으로써 고구려를 드러나지 않게 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중국은 자국 영토 내에 만발발자 유적 1기 신석기시대부터 6기 명대까지 층층이 쌓인 문화층 유물 모두를 보유한 입장이다. 그 가운데는 여진족, 만주족 유물도 있고, 고조선, 고구려 유물도 있는데 그중 어느 것을 더 부각하느냐에 따라 그걸 바라보는 일반인의 인식이 달라진다. 그 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정치체인 고구려 대신 만주족 문화 일색으로 공원을 꾸민 것은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박 소장은 “마치 지면 신문 1면에 무엇을 탑 기사로 하느냐에 따라 중요도가 달라지고, 서브기사로 무엇을 배치하느냐에 따라 이미지가 달리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2편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관계 밝혀줄 미싱링크, 만발발자 유적”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