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소쇄원, “조선의 선비가 꿈꾼 이상세계를 담은 별서정원”에 이어)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1503~1557)는 정암 조광조의 가장 어린 제자였다. 조선 중기 연산군의 동생이던 중종은 반정으로 자신을 왕에 앉힌 후 쥐고 흔드는 훈구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의 영수인 조광조를 발탁했다. 조광조는 신진사림과 함께 권력형 비리를 척결하는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며, 자신이 꿈꾸던 유학의 이상정치를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소쇄원의 정자 '제월당', 제월당은 소쇄원의 주인이 책을 읽고 사색하던 공간이다. [사진=강나리 기자]
소쇄원의 정자 '제월당', 제월당은 소쇄원의 주인이 책을 읽고 사색하던 공간이다. [사진=강나리 기자]

흠잡을 데 없이 바른말과 바른 행동으로 일관한 조광조를 탄핵하기 어려웠던 훈구파는 궁궐 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 走와 肖를 합한 조趙씨가 왕이 된다)’이라고 꿀로 글씨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하는 술수를 동원했다. 중종은 처음 총애했으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앞세우며 끊임없이 질책하는 조광조에 염증을 느껴 훈구파가 제기한 모반 혐의를 받아들였다. 중종은 조광조를 귀양 보낸 후 사약을 내렸다. 이 사건이 기묘사화이다.

담양 창평에서 태어난 양산보는 15세 때 상경해 사림의 우상이던 조광조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는 17세 때 현량과에 합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고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유학자로서 깨끗하고 맑은 성품의 조광조를 무척 따랐던 양산보는 유배지까지 따라가 스승이 사약을 받고 죽는 모습을 목격했다.

큰 충격을 받고 낙향한 양산보의 나이가 18살이었다. 세속적인 정치판에 환멸을 느낀 그는 두 번 다시 출사하지 않고 은둔했다. 1530년경부터 작은 초정을 시작으로 유교적 이상사회의 상징을 담아 소쇄원을 설계했고, 55세에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꾸준히 만들어갔다. 그 과정을 이종사촌인 면앙정 송순(宋純:1493∼1583)과 사돈인 하서 김인후(金麟厚:1510∼1560)가 도왔다.

그는 이곳에서 공부하고 그의 벗들과 학문을 논하며 풍류를 즐겼다. 면앙정의 주인 송순, 김인후 외에도 식영정의 주인인 임억령(林億齡:1496∼1568), 인근 환벽당의 주인이자 일찍 사별한 아내의 동생 김윤제(金允悌) 등과도 어울렸다.

그는 후손에게 “소쇄원은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내 발자국이 남겨지지 않은 곳이 없다”라며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후손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유훈을 남겼다. 유훈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18살 순수한 청년 양산보가 겪은 사건과 그의 삶을 살펴보면, 스스로 호를 소쇄옹瀟灑翁이라 정하고 전각의 이름을 ‘제월당’, ‘광풍각’이라 지으며 맑고 깨끗함에 몰두한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제월당에서 내려다 본 위교. 소쇄원을 찾은 손님은 위교를 지나 버드나무를 대막대기로 치면 제월당에 있던 주인이 마중을 갔다. [사진=강나리 기자]
제월당에서 내려다 본 위교. 소쇄원을 찾은 손님은 위교를 지나 버드나무를 대막대기로 치면 제월당에 있던 주인이 마중을 갔다. [사진=강나리 기자]

이제 ‘소쇄원 48영’과 함께 양산보가 소쇄원 곳곳에 숨겨둔 상징들을 몇 가지 찾아보자. 소쇄원의 입구 왕대숲길은 제29영 ‘오솔길의 왕대숲(夾路脩篁, 협로수황)’에서 “줄기는 눈 속에서도 곧고 의연한데/ 구름 실은 높은 마디는 가늘고도 연해/ 속대 솟고 겉껍질 벗으니/ 새줄기는 푸른 띠 풀고 나온다”라고 노래했다.

왕대숲길 끝, 개울 위에 속세와 소쇄원을 잇는 다리는 제9영 ‘대숲사이에 위태로이 걸친 다리(透竹危橋, 투죽위교)’로 표현된다. 소쇄원을 찾은 손님은 위교를 건너 개울가에 선 버드나무를 대막대기로 두드리면, 그 소리에 정자의 주인은 제월당에서 손님을 맞으러 내려온다. 이 모습은 제39영 ‘버드나무 개울가에서 손님을 맞으니(柳汀迎客, 유정영객)’라는 시로 표현했다.

소쇄원 48영 중 제41영 '못에 흩어진 순채싹'의 이야기를 간직한 큰 연못. 과거 이곳에 연꽃을 심었다고 한다. [사진=강나리; 기자]
소쇄원 48영 중 제41영 '못에 흩어진 순채싹'의 이야기를 간직한 큰 연못. 과거 이곳에 연꽃을 심었다고 한다. [사진=강나리; 기자]

초정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큰 연못에는 물고기와 순채를 길렀다. 제41영 ‘못에 흩어진 순채싹(散池蓴芽, 산지순아)’이라는 시에는 오吳나라 사람 장한이 진陳나라에서 벼슬을 하다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의 순채나물과 농어회가 먹고 싶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 강동으로 돌아갔다는 고사가 담겨있다. 세상에 나가 이름을 드날리고 권세를 얻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에서 벗어나 순채나물을 기르며 사는 풍류를 숭상한 선비의 정신이 드러난다. 제40영 ‘개울 건너 핀 연꽃(隔澗芙蕖, 격간부거)’를 보면 연못에 연꽃도 심어져 있었던 듯하다. 연꽃은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가 ‘애련설’에서 군자의 꽃으로 칭송하며 선비의 절개를 상징했다.

송시열이 쓴 오곡문五曲門과 관련된 시도 있다. 냇물이 흐르는 수구의 담장 안에는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제15영 ‘은행나무 그늘 아래 굽이치는 물(杏陰曲流, 행음곡류)’에서 “지척에 졸졸 흐르는 물/ 분명 다섯 굽이로 흘러내리네/ 그해 물가에서 말씀한 뜻을/ 오늘 은행나무 아래서 찾아보는구나”라고 읊었다. 은행나무는 선비가 공부하는 곳을 뜻한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곳이 은행나무가 서있던 행단杏壇이라 공자사당에는 대개 은행나무를 심었고, 향교나 학교를 행단이라고 불렀다.

우암 송시열이 쓴 오곡문. 냇물 위에서 끊긴 공간이 바로 오곡문이다. [사진=강나리 기자]
우암 송시열이 쓴 오곡문. 냇물 위에서 끊긴 공간이 바로 오곡문이다. [사진=강나리 기자]

또한, 냇물 위 외나무다리에 대해서는 제26영 ‘가로지른 다릿가의 두 소나무(斷橋雙松, 단교쌍송)’이라 하여 주자가 ‘무이도가’에서 세상에 도를 전하고 싶어도 단교가 되어 사람이 찾아들지 않았던 것을 노래했다. 아울러 ‘오곡五曲’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송의 주희(주자)가 무이산에 있는 9굽이 계곡의 경치를 읊었다는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따온 말이라 전한다. 이렇듯 소쇄원 48영을 살펴보면 무심코 지나쳤던 나무 한그루, 꽃 한 송이가 지닌 깊은 뜻에 놀라게 된다.

처음 소쇄원을 방문했을 때는 미처 48영을 알지 못하고 온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스스로 하나하나 찾아 발견하며 소쇄원의 주인이 꿈꾸고 설계했던 마음과 통하는 기쁨을 주었다. 다시 48영을 알고 보면 눈에 담았던 풍광이 더욱 새롭다.

(위) 광풍각에서 바라본 하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광풍光風)이 분다. (아래) 광풍각 안에서 바라본 소쇄원 전경. [사진=강나리 기자]
(위) 광풍각에서 바라본 하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광풍光風)이 분다. (아래) 광풍각 안에서 바라본 소쇄원 전경. [사진=강나리 기자]

처음 담양을 찾았던 경험이 떠오른다. “소쇄원을 꼭 한번 가보라”는 권유를 받고도 관심이 없던 나는 2019년 엉뚱하게도 순천만국가정원에 재현된 ‘선비의 정원’에서 소쇄원 광풍각을 만났다.

광풍의 뜻이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것에 매료되었다. 방금 지나간 비의 습기를 따뜻한 햇볕을 품은 바람이 밀어내는 청량한 느낌이 생생한 단어였다. 그리고 그 느낌을 2020년 8월 태풍 ‘장미’가 지난 직후 모처럼 고요해진 소쇄원 광풍각 마루에 앉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실제 소쇄원의 영역은 어른 걸음으로 15분~20분 정도면 다 둘러볼 만큼 크지 않다. 중국의 자금성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크지 않다고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연의 품에 안겨 평생에 걸쳐 공부하고 실현시키고 싶은 이상세계를 공간 곳곳에 구현한 상징들을 찾으면서 세공이 정교한 명품, 작지만 소중한 보물을 만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 인연이 담양의 10정자를 답사할 계기가 되었다.

소쇄원을 갈 때 담양여객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다면 좌석버스 311, 311-2를 타고 문흥지구 입구(남) 정류장에서 내려 농어촌버스 1-2, 2-1, 2-2를 타고 가면 된다. 하지만 광주광역시 말바우시장에서 출발하면 버스 충효187, 농어촌버스 1-2, 2-1, 2-2를 타고 한 번에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