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피는 꽃이 있다. 동백꽃이다. 그런가 하면 가을에 잎이 떨어지면 꽃눈이 나왔다가 겨우내 추위를 이겨내고 봄이 되면 꽃이 피는 개나리꽃과 진달래꽃이 있다. 나무 중에도 겨울에 시들지 않는 나무가 있다. 소나무와 잣나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나무는 참나무다. 그런데 한국인은 참나무보다는 겨울에 시들지 않는 소나무를 더 선호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온갖 역경과 고난을 극복한 사람들을 우리는 존경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추사 김정희다.

민성욱 박사
민성욱 박사

추사 김정희 선생을 만나기 위하여 과천시 추사박물관으로 향했다. 그의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박물관 외벽에 크게 그려져 있었다. ‘참선과 난초가 둘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말년 4년 동안 과천에 머물면서 그렸다고 추정되는 서화(書畫)이다. 추사하면 생각나는 것이 추사체이다. 추사체를 최고의 글씨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쓴 글씨일까? 또 추사가 그린‘세한도(歲寒圖)’는 깊은 감명을 주는 그림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려진 것일까? 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추사 김정희의 그림과 글씨를 대단하다고 생각할까? 글을 그림처럼, 그림을 글처럼 쓰고 그렸던 추사 김정희의 삶과 정신을 통해 시대정신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과천추사박물관 학예사와의 만남

과천은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4년간 과지초당에서 지내면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운 곳이다. 이에 추사가 꽃피웠던 학문과 예술의 정수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과천시가 추사박물관을 개관한 것이다. 과천추사박물관 학예사가 직접 해설해 주었는데, 그의 말이 걸작이다. 우리말에 구라라는 말이 있는데, 본래 거짓말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이다. 그의 구라는 입 구(口) 비단 라(羅), 입으로 짜는 비단이란다.

추사 김정희는 명동과 동대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충남 예산은 윗대부터 살아온 본향이라고 할 수 있다.  말년 4년 동안 거주한 과천에는 ‘과지초당’이라는 집터가 있고 과천추사박물관 바로 옆에 복원되어 있다고 한다. 그의 추사체는 제주도에서 8년간 유배 생활하면서 완성하였다. '불이선란도'는 말년에 과천에서 그린 그림으로 추정되는데, ‘불이선란도’는 상상 속의 난이라 난이 꺾여 들어간다고 한다.

학예사는  또 박물관의 역할을 강조하였는데, 박물관은 세계시민을 기르는 곳이라고 하였다. 박물관을 의미하는 뮤지엄은 뮤즈가 사는 곳을 의미한다. 뮤즈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학예(學藝)의 여신으로 현재는 일반적으로 시나 음악의 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대에는 널리 역사나 천문학까지도 포함하는 학예 전반의 신으로 간주되었다. 그 수(數)는 일정하지 않았는데, 로마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각각 맡은 일이 따로 있는 아홉 여신이라 하였다. 생각건대 학문과 예술의 영역은 국경이 없으며 그 가치를 함께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세계시민으로 양성할 수 있는 장(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시민이 되고자 한다면 어릴 때부터 박물관을 많이 다녀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추사 김정희는 누구인가?

추사는 1786년(정조 10년) 아버지 김노경과 어머니 기계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추사의 집안은 증조모가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내온 경주김씨 명문가였다. 어린 시절 추사는 짧은 기간이지만 북학파의 대가 박제가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스승 박제가로부터 연경 이야기를 들으며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과 학문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스물네 살 때 그는 아버지를 따라 연경을 가게 되어, 청나라 연경에 도착한 추사는 평생의 스승인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게 된다. 그들과 만나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러한 추사 김정희는 금석학의 대가이자 서예가이며 훌륭한 관료이자 위대한 학자였다. 그의 글과 그림 그리고 삶을 통해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지혜와 참 선비의 정신을 헤아려 볼 수 있다. ‘법고창신’은 ‘온고지신’과 비슷한 뜻이나 옛것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한다는 의미이다. 그의 삶을 통해 역경을 예술혼으로 승화시킨 세한(歲寒)의 정신과 권세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송백(松柏)의 마음을 배우게 된다. 추사 김정희와 관련된 지역은 세 곳이다. 먼저 추사 김정희 집안이 대대로 살았던 곳인 충남 예산이 있고,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맞서다 8년 동안 유배되었던 곳인 제주도, 그리고 말년에 살았던 과천이 그곳이다.

추사의 철학, 학예일치(學藝一致)

김정희는 추사체 때문에 서예가로 알려졌지만 사실 금석고증학의 대가이다. 금석학이란 쇠붙이나 돌에 새겨진 글과 그림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의 철학은 학예일치, 즉 학문과 예술의 일치에 있다. 이러한 학예일치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 이다. 인류사에서 글의 역사는 처음 ‘그리다’(동굴벽화)에서 ‘새기다’(갑골문 등)로, ‘새기다’에서 ‘쓰다’(문자시대)로, ‘쓰다’에서 ‘치다’(타자기 이후)로 발전해 왔다. 붓글씨는 ‘쓰다’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금석고증학의 대가로서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북한산 순수비가 무학대사가 아니라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밝혀낸 것이다. 스승 옹방각과의 만남과 필답을 통해 금석고증학을 완성해 나갔다. 오늘날 우리 역사 속 인물 중 세계화할 수 있는 인물로는 불가에는 원효(화쟁사상)가 있고, 유가에는 추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붓으로 쓰는 예술, 서예

서예는 글자를 소재로 사용한 예술작품이다. 붓으로 쓴 아름다운 글씨체가 곧 서예인 것이다. 서예는 한자문화권에서 탄생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자는 기본적으로 상형문자로 사물의 형태를 본 떠 만든 글씨이다. 그래서 한자는 세상의 모습을 간단하게 요약한 그림이다. 사물을 조형화한 한자는 모양만큼이나 그림으로 표현하기에 매력적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이런 한자의 글씨 모양을 여러 가지로 익히면서 그림처럼 멋진 글씨체로 발전시켰다.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이 서예를 하면서 한자는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이렇게 다섯 가지 모양으로 정리되었다. 추사는 모든 글씨체를 두루두루 잘 쓴 서예가이었지만 이 가운데 특별히 예서를 잘 쓰고 사랑했다.

추사만의 글씨체, 추사체

추사는 기본 5체(해서, 행서 등)를 다 쓴다. ‘추사따라체’는 서풍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추사체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추사체는 추사가 쓴 것만을 의미한다. 추사의 글씨는 일생 동안 여러 번 변화했다. 수많은 연습과 변화를 통해 추사의 글씨는 새로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서예 역사상 어느 사람도 시도하지 못한 추사만의 특징을 갖게 된 것이다. 초년의 글씨는 법도에 맞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글씨체였다. 중년의 글씨는 제주 유배 생활 중에 인간적으로 더욱 성숙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특징을 구사하게 된다. 이때부터 추사체는 글씨의 맛이 다양하고 뛰어난 구성미를 보여주게 된다. 노년의 글씨는 강철처럼 굳세고 힘찬 붓놀림과 각지면서도 굵고 가늘기의 차이가 심한 글씨에서 파격적인 형식을 보여주게 된다.

그렇다면 추사는 원래부터 글씨를 잘 썼을까? 사실 추사는 엄청난 노력파였다. 과천시절, 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글씨에 대한 독실한 노력이 나타나 있다. 추사의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제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 되지만 70년 동안 벼루 열 개를 갈아 구멍을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닳게 했습니다." 글씨 연습에 벼루 열 개와 붓 천 자루를 다 닳게 하는 그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추사체라는 창의적인 서체는 오랜 집념으로 완성한 것이다. 즉 추사체의 독창성은 기교가 배제된 피나는 수련과 연구의 결과였다.

제주도와 북청에 유배를 당하는 등 관직을 얻고서도 My Way를 걸었던 그는 평소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고 하였다. 그의 서체에 그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는데, 같은 일(日)자라도 다 다르다. 비스듬하게 눕힌 일(日)자와 바른 일(日)자, 바른 일(日)자는 5획으로 하나하나 쓰고 좌측의 세로를 굵게 쓴다. 서체에 룰과 체계가 있으며, 미감의 차이를 구현하는 등 공간을 잘 활용한 서체이었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이 추사체를 그렇게 탐을 낸다고 한다.

추사의 정신이 담겨져 있는 그림, ‘세한도’와 ‘불이선란도’

추사는 1844년 여름 제자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주었다. 이상적은 제주 유배 시절 중국 서적을 보내주는 등 추사에게 성심을 다한 역관 제자이다. 추운 겨울 같은 힘든 유배 생활에 처한 추사에게 변치 않는 마음을 보여준 제자 이상적은 변치않는 소나무와 잣나무 같은 존재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런 변치 않는 이상적의 마음에 보답하는 뜻으로 추사가 ‘세한도’를 그려준 것이다. ‘세한’은 《논어》 자한편에 "추운 겨울이 지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데서 나왔다. 그림 속에서 여백을 살린 간명한 구도와 메마른 붓질로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추사가 평생 지향했던 학예일치의 경지를 보여준 ‘불이선란도’는 노년의 추사가 과천 과지초당에서 머무를 때 옆에서 먹을 가는 시동 “달준이”가 있었다. 달준이는 추사 선생이 글을 쓸 때 옆에서 먹을 갈기도 해 ‘먹동이’라고도 불렀다. 그런 달준이가 고마웠던 추사는 그를 위해 ‘난’을 쳤다. 그런데 완성된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 추사 자신도 그림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다만 이런 그림은 하나만 있으면 족하지 둘은 있을 수 없다.”고 스스로 칭찬했을 정도이다.

추사의 학문과 예술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서 두루 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의 이름난 유학자들이 그를 가리켜‘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 미칭(美稱)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졌던 민족 문화의 거성적 존재였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상에 예명(藝名)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이만큼 그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 경우도 드물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도 학문·예술의 분야별로 국내․외 여러 학자 사이에서 일찍부터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그는 단순한 예술가·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였다. 즉,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 왕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문인화는 직업 화가가 그린 그림이 아닌 글을 읽는 문인, 선비들이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문인화는 전문적인 미술기법을 사용하거나 예술적 기교를 부린 그림이 아니라 한 문인의 사상과 생각, 깊은 내면의 감정이 함축적으로 표현된 작품을 말한다. 문인화를 감상할 때는 그 작품의 예술적인 표현 외에도 작품 속에 담겨있는 문인의 심중 의도를 파악해야 된다. ‘세한도’와 ‘불이선란도’ 모두 이러한 문인화에 해당된다.

문자의 향기와 책의 기운

추사는 양반이라고 해서 양반들과만 어울리지 않았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친하게 지냈다. 중인, 승려들과도 기꺼이 친구가 되고 또 제자로 삼기도 하였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행보였다. 추사는 제자들에게 글과 그림에서 ‘문자향 서권기(文子香 書卷氣)’와 ‘입고출신(入古出新)’을 강조했다. 독서를 통해 문자의 향기와 책의 기운이 나타나야 하며, 옛것으로 들어가 새것으로 나와야 한다는 뜻이다.

추사 김정희의 삶과 정신을 통해서 본 시대정신

‘세한도’에서 세한(歲寒)은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의미하고, ‘세한도’에 등장하는 송백(松柏)은 그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존재를 뜻한다. ‘세한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면서 자기 존재가치를 발견하게 된다는 깨달음이다. ‘불이선란도’에서 선(禪)은 수행을 의미하고, 난(蘭)은 생명 또는 생명을 영위하기 위한 삶을 상징한다. 즉 수행과 생활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이다. 이것은 한민족의 고유한 수행문화인 선도문화와 연결된다. 선도(仙道)는 말 뜻 그대로 신선이 되는 길인데, 이것은 한민족과 인류 시원의 역사인 마고성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신인합일이라는 깨달음의 정신문명을 의미한다. 모두가 하나라는 사유체계가 한민족의 고유함이자 특징이다. 한민족의 고유한 정신문화라고 하면 천지인 사상, 홍익인간 정신 등을 말하는데 한민족은 어떤 옷을 입어도 그 정신은 한결 같았다. 서로 다른 옷을 입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하나다. 하나 된 대한민국, 하나 된 인류, 결국 홍익인간의 가치를 품은 지구인으로 하나가 될 수가 있다. 이것이 2022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추사 김정희의 삶과 정신을 통해 생각해 보는 시대정신이다.

우리말에 ‘덕분에’ 라는 말이 있다. ‘덕분에’ 라는 말 속에는 사랑, 은혜, 그리고 감사함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부모, 배우자, 형제, 스승, 선배, 친구 등 많은 사람 덕분에 살아 있을 수 있다.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우리의 길고 험난한 인생길에 누군가의 덕분에 살고 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 보면 인생이 더 따뜻하고 정겨워지지 않을까. 추사 김정희 선생 덕분에 고유한 선비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고, 문화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추사체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 선생, 이름이 비슷해서 ‘대동여지도’의 고산 김정호와 비교되거나 동일 시 되는 인물이다. 대일항쟁 시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제작 과정을 왜곡해서 당시 제대로 된 지도가 없어 김정호가 조선의 전국을 수차례나 답사를 반복하면서 만들었고,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조선 정부보다는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 본 일본이 조선을 지배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그런데 사실은 김정호는 일부 답사가 있었겠지만 당시에 이미 있었던 다른 지도를 활용하여 새로운 지도를 제작한 것이다. 반면에 중국에서조차 서성(書聖)으로 알려진 추사 김정희는 조선인에게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부각하지 않았다. 이렇듯 우리 인물사에도 식민주의 사관의 폐해가 존재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맞이하는 새해, 임인년에는 식민주의 사관을 극복하고 우리 사관으로 역사의 광명을 오롯이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