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 이어)

최광식 교수는 공직에 몸담을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에 역사관을 설치한 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받은 과정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분기점으로 문화수입국에서 문화수출국으로 전환한 일 등 매우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다.

특유의 선견지명으로 한류의 새로운 모델을 K-컬쳐로 이름 지은 것은 물론, K-콘텐츠의 무한확장성을 미리 예견한 그의 경험담을 들었다.

최광식 고려대 명예교수는 2003년 중국 동북공정에 대응한 고구려사 왜곡 대책위원장을 비롯해 국립중앙박물관장, 제5대 문화재청장, 제46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공직을 거쳐 역사가의 자리로 돌아왔다. [사진=김경아 기자]
최광식 고려대 명예교수는 2003년 중국 동북공정에 대응한 고구려사 왜곡 대책위원장을 비롯해 국립중앙박물관장, 제5대 문화재청장, 제46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공직을 거쳐 역사가의 자리로 돌아왔다. [사진=김경아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이 2005년 용산으로 확장 이전할 때 연표에 고조선이 빠져있어 국학원, 국학운동시민연합 등 시민단체가 항의 시위를 해서 겨우 표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 교수님은 국립중앙박물관장 시절 단순히 연표 표기가 아니라 아예 고조선실을 포함한 역사관을 설치했습니다.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2008년 관장이 되었을 때, 국립중앙박물관은 고고관, 미술사관, 아시아관으로 구성되어있었는데 1층을 역사관으로 바꿔버린 거죠. 관장이 된 직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역사가 오랜 유럽 국가의 박물관을 쭉 둘러볼 기회가 있었어요.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박물관 등은 전 세계의 유물들이 모여있으니 아이템별, 지역별로 구분해 전시했죠. 그런데 독일은 자국의 역사별로 전시했더군요. 우리나라에는 독일박물관 방식이 맞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마침 2009년이 한국박물관 100주년에 해당하므로 이를 계기로 선사·고대관, 중·근세관을 만들고, 고조선실을 새로 개설하였습니다. 한국 역사의 시작인 고조선실이 없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고조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되죠. 특히 당시에 중국이 고구려를 비롯하여 고조선과 발해를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어서 더욱 고조선과 발해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했기에 발굴 유물을 중심으로 고조선실과 발해실을 새로 신설한 것입니다.

일부에서 반발도 있었죠. 국립중앙박물관에 고고학이나 미술사 전공자가 많은데 다행스럽게도 탄탄한 연구성과를 낸 고대사 전공자가 있어서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도록 맡겨서 잘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고조선에 대한 사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연구하는 데 한계가 많습니다만, 최근에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되면서 관련된 자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를 문헌 사료와 접목시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위한 사전포석, 국립박물관 수장능력과 보존 과학기술 통해

2011년 4월 외규장각 도서 반환 과정이 굉장히 궁금합니다. 물론 시민사회단체의 활약도 있었지만, 정부 간 교섭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을 텐데.

- (하하) 사실 국립중앙박물관장 시절 사전 포석을 둔 게 있었어요. 서울에서 세계도서관장 심포지엄이 열렸을 때 외규장각 도서를 소장 중이던 프랑스 국립도서관장도 왔어요. 그분을 박물관으로 초청해서 식사도 하고, 최고의 보존기술이 집적된 우리 박물관 수장고를 보여줬지요. 프랑스 관장이 입이 딱 벌어져 감탄하더군요.

대부분의 선진국이 유물을 돌려주지 않을 때 앞세우는 논리가 있습니다. “이건 전 세계 인류의 자산이지 너희 나라만의 유물이 아니다. 돌려줘도 너희는 잘 관리할 능력이 없어 유물이 훼손된다. 여기 있어야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다.”라는 것이죠.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의 세계적인 가수 나나 무스꾸리가 문화부 장관 시절 파르테논 신전에 있던 대리석 조각인 엘긴 마블스를 돌려달라고 했을 때, 대영박물관에서 그 논리를 내세웠죠. 그리스에서 국민 성금을 모아 박물관을 만들었어도 아직 돌려받지 못했어요.

우리의 보존 능력을 보여주니 이번엔 “대여해주었다가 만일 돌려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장담하고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앞서 그곳에 보관된 신라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을 빌려왔습니다. 우리 박물관이 개최한 ‘실크로드 문명전’에서 그야말로 소위 ‘죽여 주는’ 콘텐츠(킬러 콘텐츠), 우리식 표현으로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고 하는데 그게 ‘왕오천축국전’이었죠.

‘왕오천축국전’이 국내에 들어올 때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보존 담당이 방한했어요. 그 분이 우리가 보존과학자까지 참여해 전시 준비하는 과정을 다 지켜보고는 감동했습니다.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없어진 거죠. 그 후 제가 문화재청장일 때 외규장각 도서가 반환되어 경북궁에서 행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반환이라고 하면 다른 나라도 다 돌려달라고 한다.”라고 해서 영구대여 형식으로 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반환이라고 봐야겠죠.

최광식 교수는 《삼국유사》연구를 시작으로 역사학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사진=김경아 기자]
최광식 교수는 《삼국유사》연구를 시작으로 역사학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사진=김경아 기자]

문체부 장관 시절 ‘한류’, K-콘텐츠가 불러올 변화에 주목하셨다고.

K-팝에서 K-뷰티, K-푸드, 이제는 K-방역이란 말까지 등장하니 감개무량하네요. 완전히 새로운 국면이라고 봅니다. 재직 당시 한국 드라마의 약진을 ‘한류韓流’, 새롭게 대두된 K-팝을 ‘신한류’라고 부르던 시절이었죠. 원래 한류라는 표현은 80년대 유행한 일류日流 즉, ‘Japanese Wave(재패니즈 웨이브)’에서 파생되었어요. 그 이전 홍콩 스타일은 항류港流라고 했고요.

그래서 K-드라마를 ‘한류 1.0’, K-팝을 ‘한류 2.0’이라 하고, K-Culture(컬처)를 ‘한류 3.0’이라고 명명하여 전통문화와 순수예술을 포함한 한국문화 전반을 세계에 확산시키는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 이후 ‘K-Contents’, ‘K-Beauty’, ‘K-Film’ 등 K를 앞에 부치는 현상들이 나타나더군요. (하하)

장관도 재임시 자신만의 킬러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 전 그걸 ’한류, K-컬처‘로 잡았죠. 주변에서는 “무슨 역사가가 한류에 주목하느냐?”라는 비판도 있었고, “얼마 못 가 금방 꺼지는 거품”이라는 비관론도 있었죠. 하지만 전 조금 다르게 보았어요.

모스크바 광장서 한국 아이돌 축제하는 400~500여 명 청년리더 한국어로 답해, 한류가 가져올 무한한 가능성 확인 

한류, K-콘텐츠의 무한성장 가능성을 직접 확인한 계기가 있었다고.

2011년 아이돌 걸그룹 ’소녀시대‘의 파리 공연 때 미처 입장하지 못한 청년 1만여 명이 공연장 주변에서 K-팝을 부르며 축제를 벌여 르몽드, 로이터통신 등이 세계 유수의 언론사들이 보도한 적이 있었죠. 팝의 본고장에서 주류 방송에서 나가지 않으면 프랑스 젊은이들의 관심이 높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는데, 케이블과 유튜브 등을 통해 MZ세대는 이미 K-팝을 향유하고 있었더군요.

그리고 러시아에 체육관련 장관들의 회의가 있어 모스크바에 갔을 때, 광장에서 400~500여 명 청년이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등 한국 아이들 복장을 하고 나와서 놀더군요. 러시아어 통역가와 함께 리더인 청년에게 다가갔어요. 아마 팬클럽 회장쯤 되겠죠? 제가 “잘 봤다. 참 잘한다. 혹시 내가 도와줄 게 있느냐?”고 물었어요. 당연히 러시아말로 답할 줄 알았는데, 한국말로 “슈퍼주니어를 보내주세요”라고 또박또박 발음해서 깜짝 놀랐어요. K-팝 60곡을 외운다고 하더군요.

또, 관광 분야 행사장에서는 일본에서 온 여성분을 만났는데 그분도 한국어에 능통했습니다.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를 100번 봤다고 하더군요. 그분 이야기가 “매년 네 번 한국을 방문한다. 한국은 사계절이 있으니까 계절마다 와서 봐야 한다.”라고 하더군요. 한류가 불러올 문화 확장 가능성이 놀랍다고 판단했습니다.

최광식 교수는
최광식 교수는 "프랑스와 러시아 청년들의 K-팝 사랑과 함께 놀라운 한국어 실력, 어린 시절 태권도를 배운 코스타리카 대통령의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 에피소드를 통해 문화 소프트파워의 무한확장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사진=김경아 기자]

2012년은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비롯해 한류의 새로운 분기점이 되었다고.

2012년은 굉장히 중요한 해입니다. 5월 싸이가 ’런던올림픽 응원가‘를 불렀는데 그해 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역대 최고인 세계 5위를 차지해서 국내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게다가 7월 싸이가 발표한 ’강남스타일‘이 유튜브에서 2억 뷰인가 해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전 세계가 온통 강남스타일에 빠졌었죠.

그해 싸이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전통문화, 순수예술 분야 70~80대 고령의 문화인에게만 훈장을 수여했기 때문에 전례가 없다며 반대하는 분도 있었지만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싸이 본인이 훈장을 달라는 것도 아니었고, 국위선양을 위해 노래한 건 아니겠지만 ’강남스타일‘의 엄청난 인기를 필두로 한류가 대한민국 문화 산업에 큰 터닝 포인트를 만들었기 때문이죠. 대한민국은 그해부터 문화 분야에서 수입보다 수출이 많은 세계 8번째 국가가 된 것입니다. 그때까지 서구 선진국 6개국과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유일했는데, 우리나라가 문화수출국 반열에 오른 거죠. 또, 그해 한국방문 외국인 관광객이 1,000만 명이 넘은 해이기도 합니다. (하하)

앞서 방탄소년단(BTS), 영화 ‘기생충’ 등 K-콘텐츠가 홍익인간 정신과 일맥상통한다고 하셨는데

맞습니다. BTS의 세계적인 팬덤 현상만 보더라도 자살하려거나 우울증에 빠졌다가도 BTS 노래를 듣고 가사 속 메시지에 힘을 얻고 행복해하며 뭔가 새로 시작하는데 그게 홍익인간이죠.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듣고 춤을 안 추던 사람들도 덩실덩실 신나잖아요. BTS와 싸이 음악이 한국 사람만을 위한 게 아니죠. 그게 진짜 홍익인간이에요.

한류, K-콘텐츠에는 특유의 인간미, 인류애가 담겨 있습니다. 홍익인간의 DNA가 있다고 할 수 있죠. ‘홍익인간’ 만큼 좋은 개념이 어디 있겠어요. 그리스도적으로 이야기하면 ‘사랑’이고, 불교적으로는 ‘자비’이고 유교적으로는 ‘인(仁)이죠. 이걸 다 포괄하는 개념이죠.

BTS 노래 듣고 우울증 극복, 싸이의 '강남스타일'들으며 춤 안 추던 사람이 덩실덩실, 그게 진짜 홍익인간

한류, K-콘텐츠와 홍익정신에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갖고 있다고 하셨죠? 이것을 확인한 일이 있었다고.

한국 문화 자체가 나름대로 보편성과 특수성을 다 갖추고 있어요. 한국적인 어떤 독특함도 있고, 세계인들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도 있는데 어떻게 보면 홍익인간하고도 관련될 수 있죠. 특수성이 지나치면 이질적이어서 공감되지 못하고, 보편성이 지나치면 어디든지 있는 것이 되기 쉬운데 적절한 조화를 갖췄죠.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중남미 코스타리카에서 국제 예술제를 개최할 때 주빈국으로 우리가 초대를 받아서 간 적이 있습니다. 한국 공연에 라우라 친치야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관람했어요. 통상 그런 행사에는 총리나 문화부 장관이 잠깐 참석해 축사만 하고 가는 게 보통인데 친치아 대통령은 공연이 끝나고도 남아 기분 좋게 리셉션까지 참석했죠. 와인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보았어요.

그때 한국은 공연을 3가지를 준비했어요. 첫 공연은 보편적인 것, 서양의 팝 계열이었고, 두 번째 공연은 우리 고유의 사물놀이와 가야금 등 전통악기 중심으로, 그리고 마지막 공연은 전통과 현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전자 첼로와 생황이 서로 어우러진 협연이었죠. 그게 한마디로 소위 ‘먹혔다’고 표현할 수 있어요.

전 그게 답이라고 봤어요. 한국적인 콘텐츠와 서양 콘텐츠의 절묘한 콜라보레이션. 싸이의 말춤이 결국 우리 전통적인 엇박자거든요. 서양음악과 비슷하긴 한데 좀 묘하다고 느끼는 거죠.

재미있는 사실은 친치아 대통령이 어렸을 때 태권도를 배웠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무술만 배우는 게 아니라 구령 등을 통해 한국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또 한국의 문화에도 친근감을 나타내는 걸 보면서 문화의 놀라운 확장가능성을 두 눈으로 확인했죠.

최광식 교수는 장관 시절 가장 집중한 것은 '한글날'을 법정공휴일로 되돌리는 일이었다고 한다. [사진=김경아 기자]
최광식 교수는 장관 시절 가장 집중한 것은 '한글날'을 법정공휴일로 되돌리는 일이었다고 한다. [사진=김경아 기자]

한류를 타고 지금 한글 배우기 열풍이 전 세계에 불고 있습니다. 한글을 가르치는 세종학당을 전 세계에 세우는 ’세종학당재단‘ 발족도 장관 때 추진하셨죠?

세종학당재단 이전에 한국어세계화재단이 있었는데, 특별 예산이 있을 때만 지원하다 보니 한글학교 보급을 제대로 할 수 없었죠. 반면, 당시 중국은 전 세계에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확산하는 ’공자 학당‘을 빠른 속도로 늘려나가고 있었습니다.

한류의 기세를 타고 세계인의 한글에 대한 수요도 예측 가능했고, 전 세계에 나가 있는 이민 3, 4세대만 해도 한국어를 잊으면서 정체성도 잃기 마련이라 양쪽 모두를 대상으로 한 교육 필요성은 모두 인식하고 있었죠. 그래서 우리는 ’세종학당‘이라고 명명하고, 매년 정규 예산을 지원받는 ’세종학당재단‘을 설립해 여러 나라에 세종학당을 신설했습니다. 초기에는 인기가 높진 않았는데 요즘은 거의 경쟁적으로 세종학당을 유치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또, 한글과 관련해서는 한글날의 법정공휴일 복원도 추진하셨다고.

제가 무엇보다도 집중하였던 것은 20여 년간 법정공휴일에서 제외되어 있었던 ‘한글날’을 법정공휴일로 다시 되돌린 일입니다. 1990년에 휴일이 많은 게 산업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하여 10월에 집중된 공휴일 중 ’국군의 날‘과 ’한글날‘이 법정공휴일에서 제외되었어요.

한글은 세계문화유산으로, 그 우수성과 과학성이 입증되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전 세계 글자 중 제작 시기, 제작자가 명확한 유일한 글자라는 점입니다. 그 외에도 분절 문자라서 지금 누리소통망(SNS)를 통해서 우리 문화 나갈 수 있는 수단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한글입니다.

이게 꼭 하루 쉬느냐 안 쉬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우리 스스로가 우리 문화에 대한 자존심이 있어야지 되잖습니까? 한글이 우리나라 글자지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창조된 글자라는 걸 알려야 되잖아요. 역시 그 당시 거센 한류의 바람을 타고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어서 법정공휴일로 되돌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 토착신앙 바탕 위에 불교, 유교, 도교 융화해 화랑도, 앞으로 유·불·선 융화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연구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 역사학자로서 연구할 과제가 무엇인지요?

- 유교와 불교, 토착 신앙의 융화, 즉 유·불·선 융화를 연구하려고 합니다. 한국의 전통 사상은 토착 신앙이 중심이었으나 불교가 전래 되고, 유학이 들어오고, 도교가 도입되어 갈등을 벌이면서도 융화하여 화랑도와 같이 유·불·선 융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신라의 경우, 정치이념은 유교, 종교는 불교, 심신을 다스리는 양생養生은 도교적으로 하였죠. 이러한 전통은 고려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불교가 억압을 받았으나, 백성들은 불교를 믿었고 관리들은 퇴직하고 나서는 산수를 벗 삼아 신선과 같은 생활을 염원하였지요.

한 말에 최재우가 동학을 창도해 유·불·선 융화를 다시 시도하였으나 실패했어요. 그러나 그러한 전통은 이어져 한국은 불교와 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과 개신교 및 신흥종교 등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다종교 사회를 이루었죠. 지금 세계는 종교전쟁으로 몸살을 앓는데 한국은 여러 종교가 공존하며 갈등이 있긴 하지만, 그런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불·선 융화라는 역사적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연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