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영정, “완전한 쉼, 그리고 자기 그림자를 경계하는 선비의 마음”
식영정, “완전한 쉼, 그리고 자기 그림자를 경계하는 선비의 마음”
  • 강나리 기자
  • heonjukk@naver.com
  • 승인 2021.11.24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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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간의 사유가 만나는 담양 10정자를 가다] (7)식영정息影亭

우리의 삶에서 완전한 쉼을 경험한 적이 있을까? 담양 10정자 중 ‘식영정息影亭’을 찾아가면 조선의 선비들이 왜 정자를 짓고 주변에 숲을 가꾸게 되었는지 보다 명확하게 알게 된다.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식영정 원림은 10정자 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소쇄원’에서 창계천을 따라 천천히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다. 우리말로 ‘별뫼(星山성산)’라 불리는 산의 둔덕에 자리 잡은 식영정은 울창한 소나무로 둘러싸여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식영정으로 오르는 돌계단 오른쪽으로 서하당이 있다. 식영정을 지은 서하당 김성원이 머물던 곳이다. [사진=강나리 기자]
식영정으로 오르는 돌계단 오른쪽으로 서하당이 있다. 식영정을 지은 서하당 김성원이 머물던 곳이다. [사진=강나리 기자]
서하당 곳곳의 모습. (시계방향으로)서하당 대들보에는 단기 4328(1995)년 복원했음을 기록한 상량문, 서하당의 뒷편, 마루, 조선의 문인들이 남긴 한시 현판들. [사진=강나리 기자]
서하당 곳곳의 모습. (시계방향으로)서하당 대들보에는 단기 4328(1995)년 복원했음을 기록한 상량문, 서하당의 뒷편, 마루, 조선의 문인들이 남긴 한시 현판들. [사진=강나리 기자]

그 아래 연꽃 연못을 품은 아름다운 부용당과 고고한 선비의 공간인 서하당, 그리고 석천 임억령과 서하당 김성원을 배향한 사당인 성산사(星山祠)가 먼저 보이고, 그 앞에서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고 새긴 팔각기둥의 기념탑이 객을 마중하였다.

조선 중기 문인인 서하당 김성원(1525~1597)이 쓴 《서하당유고》에 따르면, 그의 나이 36세인 1560년,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한 식영정과 그 아래 자신이 머물 서하당을 지었다. 부용당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당대에 지은 식영정20영息影亭二十詠 중 19영에 ‘연꽃이 핀 연못’ 부용당芙蓉塘이 있다.

식영정 아래에 있는 부용당. 식영정이 자리한 별뫼(성산) 주변 풍광을 읊은 식영정20영 중 19영에 부용당이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식영정 아래에 있는 부용당. 식영정이 자리한 별뫼(성산) 주변 풍광을 읊은 식영정20영 중 19영에 부용당이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식영정20영은 ‘식영정 4선(四仙)’이라 불리는 스승 석천 임억령과 제자들인 서하당 김성원, 임진왜란 의병장 제봉 고경명, 가사 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이 성산(별뫼)의 경치 좋은 곳 20곳을 택해 20수씩 모두 80수를 지은 것이다. 정철이 26세 때 지은 《성산별곡》이 바로 식영정20영에서 비롯되었다.

임억령은 부용당芙蓉塘에 대해 “넓은 손바닥 같은 연잎에 이슬 내렸는데/ 사향노루 배꼽을 청풍이 스쳐간다./ 하찮은 나의 시야 버려도 괜찮거니와 주렴계의 말에는 아름다움이 넘친다네.”라고 노래했다.

눈을 감으면 부용당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바람에 스치는 향기까지 느껴진다. 혹자는 물을 머금은 부용당은 여성의 누각이고, 서하당은 남성의 정자라 한다. 서하당 대청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창계천의 노을이 숨을 멎게 한다는데, 바쁜 걸음에 그러한 기회를 갖지 못했다.

식영정을 지키는 우람한 소나무. 식영정 20영 중 7영 ‘조대의 두 그루 소나무’ 조대쌍송釣臺雙松 중 하나가 아닐까. [사진=강나리 기자]
식영정을 지키는 우람한 소나무. 식영정 20영 중 7영 ‘조대의 두 그루 소나무’ 조대쌍송釣臺雙松 중 하나가 아닐까. [사진=강나리 기자]

부용당과 서하당에 빼앗긴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입구로 돌아와 부용당 오른편으로 휘돌아 오르는 돌계단을 걷다 보니 유난히 우람한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호위하는 식영정을 만났다.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이다. 팔작집은 건물의 네 귀퉁이에 모두 추녀를 달아 만든 집을 일컫는다. 식영정의 오른쪽은 온돌방, 왼쪽은 대청이 각각 절반씩 차지하고 있다.

별뫼(성산) 둔덕에 자리한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사진=강나리 기자]

이곳 식영정의 대청마루에서 본 정면의 풍광은 멀리 들판이 보일 뿐 감흥이 없었다. 그러다 뒤를 돌아 대청마루 안쪽을 살피니 정자의 북쪽을 나무 벽으로 막고 그 중앙에 쪽문이 나 있었다. 마루에 올라서 쪽문 앞에 서서야 비로소 식영정의 주인이 무엇을 보았을지 알 수 있었다.

쪽문에서 바라본 광주호의 푸른 물결과 유유히 나는 백로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 되고, 쪽문 자체가 그 그림의 족자가 되었다. 그야말로 식영정 20영 중 2영인 ‘푸른 시내 흰 물결’ 창계백파蒼溪白波이다. 다른 정자와 달리 한쪽 벽을 막아 북풍의 추위를 막으면서도 아름다운 풍광을 쪽문 족자를 통해 아껴 보았던 그 마음을 엿본 듯하다.

(위 왼쪽) 대청마루에 난 쪽문 (위 오른쪽) 정자 바깥에서 본 쪽문. (아래)식영정 마루 위에 올라서서 쪽문을 통해 본 광주호. 댐이 생기기 전에는 창계천의 일부였다. [사진=강나리 기자]
(위 왼쪽) 대청마루에 난 쪽문 (위 오른쪽) 정자 바깥에서 본 쪽문. (아래)식영정 마루 위에 올라서서 쪽문을 통해 본 광주호. 댐이 생기기 전에는 창계천의 일부였다. [사진=강나리 기자]

1970년대 담양댐이 만들어지면서 광주호가 되었지만, 그 큰 물줄기는 본래 창계천의 일부였다. 임억령과 서하당이 식영정에 머물던 때 창계천은 배롱나무 꽃 비친 여울을 뜻하는 ‘자미탄紫薇灘’이라고도 불렸다. 붉은 꽃이 백일 간 피고 지는 배롱나무를 창계천 양쪽에 줄지어 심어, 냇가에서 식영정을 바라보면 꽃구름 위에 떠 있는 신선 세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1959년 당시 사진을 보면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식영정은 식영정20영을 읽고 둘러보면 달리 보인다.

1959년 당시 식영정의 모습. 광주호가 조성되기 전이라 창계천의 모습이 자연스러운 여울을 이루고 있고, 식영정 주변은 소나무숲이 무성하다. [사진=문화유산채널]
1959년 당시 식영정의 모습. 광주호가 조성되기 전이라 창계천의 모습이 자연스러운 여울을 이루고 있고, 식영정 주변은 소나무숲이 무성하다. [사진=문화유산채널]

식영정의 주인 임억령은 조선 중기 문인이자 무신이다. 명종 즉위년에 외척 간 권력투쟁으로 일어난 을사사화 때 동생 임백령이 윤원형이 이끄는 소윤小尹에 가담해 대윤大尹의 선비들을 내몰았다. 그는 동생에게 의리와 명분을 좇을 것을 당부했으나 소용없자 동생과 의절한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 해남으로 낙향했다. 이듬해 동생 백령이 위사공신의 녹원과 공신교서를 보내오자 격분해 태워버렸다는 점에서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다.

청렴결백하고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으며 시문을 좋아한 그의 한시에 생활의 실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백성들의 처지를 다루려 한 기풍이 두드러진다. 제자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에서도 그 영향이 드러난다.

식영정 일원의 아름드리 나무들. [사진=강나리 기자]
식영정 일원의 아름드리 나무들. [사진=강나리 기자]

그가 스스로 수양하며 학문을 닦고 제자와 시문을 나눈 식영정. ‘그림자도 쉬어 간다.’라는 뜻의 ‘식영息影’은 장자莊子 어부漁父편에 등장하는 바보 우화에서 유래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이가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자기 발자국을 싫어하여 그것을 떨쳐내려고 달려 도망쳤다. 더 멀리 도망칠수록 발자국은 더 많아지고, 그림자는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데, 그 사람은 자신의 달리기가 더디다 여겨서 쉬지 않고 질주하다 마침내 힘을 다해 죽었다. 그늘에서 그림자를 쉬게 하고 조용히 멈추어 발자국을 쉬게 할 줄 몰랐으니 어리석다.”

그림자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돌이켜 보았을 때 부끄럽고 숨기고 싶다는 뜻이다. 그래서 식영은 세상 속 욕망이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을 성찰하고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 쉬는 것, 바로 완전한 쉼을 의미하는 것이다.

식영정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진 정자이다. (시계방향으로) 식영정 현판, 들어열개문(분합문)을 고정하는 걸쇠가 보인다, 지붕 아래 수많은 한시 현판들, 투박하지만 나무결이 잘 드러나는 서까래. [사진=강나리 기자]
식영정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진 정자이다. (시계방향으로) 식영정 현판, 들어열개문(분합문)을 고정하는 걸쇠가 보인다, 지붕 아래 수많은 한시 현판들, 투박하지만 나무결이 잘 드러나는 서까래. [사진=강나리 기자]

사람들은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고,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자 성공과 권력을 쟁취하려 쉼 없이 달린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진정한 쉼이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멈춰서 나로 인해, 내가 한 일로 인해 생긴 결과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정산하고 책임져야 할 시기가 온다.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 고려의 태조 왕건처럼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한탄할 수도 있고, 끝까지 당시 시대 상황을 탓하며 자신은 정당했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다.

돈과 명예, 권력과 같은 현실 속 잣대에 매몰되지 말고, 한 개인의 역사나 나라의 역사, 인류사에서 어떤 인물로 기록될 것인지 돌아보며 살아가는 것은 어떤가.

식영정을 대중교통으로 가려면 광주광역시에서 출발하는 것이 보다 빠르고 간편하다. 광주 말바우시장 버스 정류장에서 담양 ‘가사문학관 정류장’으로 가는 충효187번 버스나 많은 농어촌버스들을 타면 40분 내외로 도착한다. 다음은 계곡물이 바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구슬 부딪히는 소리처럼 들리는 명옥헌鳴玉軒으로 가자.


* [출처] 식영정20영: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장자, 어부편 식영息影 해설: 사단법인 전통문화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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