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만이 유별하게 가지는 심리적인 현상으로 '한'(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의 정서를 한 글자로 정리하면 한(恨)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한'은 극한 슬픔과 답답함이 오랫동안 쌓여서 마음에 맺혀 있는 상태를 이르는 감정으로서, 흔히 "한이 맺힌다"라고 하고, 오랜 소원이 달성된 상태는 "한을 풀었다"라고 합니다.

이화영 계산공고 교사
이화영 계산공고 교사

'한'은 극한 슬픔이 쌓이고 쌓여서 맺혀 있는 상태를 말하는 점에서 단순히 슬픔이 얼마 동안의 기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과 다릅니다. '한'은 한 때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말하므로 이 세상에서 풀 수 없는 한처럼 큰 슬픔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은 극복해야 하는 상태가 되기도 하여 이런 감정을 풀지 못하면 화병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한'을 긍정적으로 해석해 보면 '한'은 이루지 못한 소원을 뜻하기도 하므로 '한'은 바람이요 꿈이자 “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恨을 파자해보면 忄 + 艮 이 됩니다. 忄은 마음을 뜻하고 艮은 주역의 원리로 우리나라를 간(艮)방으로 지칭해온 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恨은 간(艮)방의 마음 즉 우리 민족의 마음으로 우리 민족의 염원(念願)을 이루지 못한 마음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 민족의 염원(念願)을 이루지 못한 마음은 무엇일까요? 《부도지(符都誌)》를 보면 우리 민족은 잃어버린 본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복본(複本)의 마음을 이어온 민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복본의 마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홍익인간 이화세계이고 이것을 건국이념으로 한 나라가 고조선입니다.

우리 민족을 이야기하는 중국 문헌 중 《설문해자(說文解字)》 대부(大部) ‘夷(이)’ 의 자해(字解)를 보면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순리(順理)를 따르는 성향이 있으나, 오직 동이(東夷)만이 큰 것을 따르니 대인(大人)이다. 이(夷)의 풍속이 어질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살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곳은 죽지 않는 군자가 있는 나라이다. 살펴보면 그곳은 하늘도 크고 땅도 크며 사람 역시 크다.(葢在坤地頗有順理之性. 惟東夷从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按天大、地大、人亦大.)"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홍익인간 이화세계 이념을 가지고 나라를 경영했기에 중국은 우리를 군자(君子), 대인(大人)으로 불렀습니다.

홍익인간 이화세계 이념을 실현하려고 노력한 고조선이 그러한 염원을 다 이루지 못하고 망함으로 우리 민족은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이루어야 하는 염원을 계속 이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표현한 글자가 '한'(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한’은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바람이요 꿈이자 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이런 복본의 웅대한 꿈을 잃어버린 결과 ‘한’의 의미도 쪼그라들고 변질되어 원통하고 가슴에 맺힌 것을 뜻하는 의미로만 남게 된 것은 아닐까요?

꿈과 이상은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을 이끌어주는 등불의 역할을 합니다. 꿈과 이상은 높아야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습니다. 뱃사람이 길을 잃었을 때 별을 보고 방향을 잡아가듯이 꿈과 이상도 별과 같이 높아야 길을 안내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꿈은 얼마나 높고 위대합니까?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말한 동방의 등불이 바로 이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비전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삶의 의미가 없습니다. 꿈이 없는 민족과 인류는 존재의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우리 민족과 인류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사(밝은) + 라(태양) + ㅁ(명사형)이므로 사람은 “생명을 갖춘 밝은 태양”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밝은 본성을 회복한 존재 또는 본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존재를 사람이라고 했던 겁니다. 부도지를 보면 본성을 잃고 타락한 인간들을 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태가 짐승 모양이 아니라 마음이 짐승의 마음이라는 뜻으로 짐승의 마음은 오감(五感)과 물질에 빠진 탐(貪)·진(嗔)·치(痴)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으로 단군사화에 나오는 곰이 사람이 됐다는 표현을 이해해야합니다.

《격암유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말세에 이르면 십리(十里)에 사람 한둘 만나기 어렵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을 가지고 말세에 천재지변으로 사람이 많이 죽어 십리에 사람 한둘 만나기 어려운 세상이 온다고 해석하곤 합니다. 그러나 다르게 해석해 보면 탐·진·치에 빠지지 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십리 안에 한둘 만나기 어려운 세상이 말세이다. 이렇게 해석도 가능합니다. 지금의 이 시대가 바로 이와 같지 않은지요?

성경(聖經)에서 의인(義人) 10명이 없어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에서 의인이 뜻하는 바도 탐·진·치에 빠지지 않은 사람을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지금 탐·진·치에 빠져 있는 우리의 모습은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스핑크스와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스핑크스가 던지는 질문에 답을 못하면 스핑크스에 잡아 먹힙니다. ‘아침에는 네 발로, 낮에는 두 다리로, 저녁에는 세 다리로 걷는 짐승이 무엇이냐?’ 는 스핑크스 질문에 대한 정답은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에 네 발로 기고, 자라서는 두 발로 걷고, 늙어지면 지팡이를 짚어 세 다리로 걷기 때문입니다. 스핑크스가 던지는 질문에 정답을 맞출 때 스핑크스가 죽었습니다.

스핑크스가 던지는 질문의 정답이 사람임을 상기해 보면 우리가 밝은 본성을 회복한 사람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찾을 때 우리 마음속의 반인반수의 스핑크스도 죽지 않을까요? 우리는 사람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짐승의 길을 가고 있는가? 라는 자기반성과 함께 우리 민족의 '한'(恨)인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이루는 대의(大義)를 가져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