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2) "정신적 혼란과 방황을 멈추려면 이제라도 우리의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인터뷰]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2) "정신적 혼란과 방황을 멈추려면 이제라도 우리의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 안진경 기자
  • gnana7720@gmail.com
  • 승인 2021.11.24 14:45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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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혼과 정신이 없으면 가치를 제대로 세울 수 없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도 일본도 나름대로의 국학을 중심으로 국가의 정체성을 세우고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학은 어떻다고 보십니까?

제가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본 건 아니지만, 단군의 정신이라고 해도 좋고 홍익인간의 정신이라고 해도 좋은데. 우리가 이것을 그래도 꽤 오랫동안 지켜왔다고 생각해요.

중간에 중국의 지배를 받은 시기도 있었고, 나중에는 서양 문명이 들어와서 또 영향을 받고, 그러다 보니까 우리 뿌리를 다 놓쳤죠. 제가 알기로 홍익인간도 이승만 대통령은 사실 관심이 없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부인이 또 유럽 분이고 하다 보니까 너무 기독교에 심취를 해서 그런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단절된 역사를 다시 이어서 새로 출발하는데 기초를 놓는 데는 매우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사람이죠.

윤여준 전 장관은 선친과의 기억을 통해 이승만 새 정부 수립 당시 국가의 중심가치 부재로 지금의 정신적 방황이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라고 한다. [사진=김경아 기자]

 

당시 이승만 박사의 비서였고, 참모였던 제 선친(윤석오 선생)이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준비 없이 서둘러서야 되겠느냐. 나라를 새로 세우려면 건국이념이 있어야 된다."라고 말씀을 드려, 그나마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 박사가 홍인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세우게 됐다고 했어요.

어렸을 적 기억이 나요. 선친이 저를 보고 "나라를 세울 때 중심가치를 정확히 세워주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엄청난 혼란이 올 거다. 너희가 이 대가를 두고두고 지불하게 될 거다." 그런데 그대로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아직도 정신적인 방황을 하는 거 아닙니까?

 

"정신적 혼란과 방황을 멈추려면 이제라도 우리의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제가 평소 하는 주장인데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거예요. 안 그러면 안 돼요. 계속 이런 정신적 혼란과 방황이 이어질 거라고요.

유교를 국학이라고 그러는 데도 있다면서요. 조선조 때 국가가 유교를 숭상했으니 그걸 국학이라고 붙인 모양인데 지금 말씀하시는 국학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조선조는 그러다 보니까 정신적으로도 중국에 의존하게 되고, 그걸 숭배하는 과정에서 우리 것은 다 없어지고 공백(空白)만 남은 거였잖아요. 그러다가 일본의 식민지가 돼서 일본 문화의 지배를 받았죠. 거기에는 그래도 우리가 항거를 했으니까 우리가 정신까지 빼앗긴 건 아니었죠.

그다음에 또 미국에 의해서 나라가 해방이 되고 국가를 세우게 되고, 더군다나 6·25를 치르면서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 원조에만 그친 게 아니라 종교를 비롯해서 미국의 문화, '아메리칸 컬쳐'라는 게 노도(怒濤)처럼 들어왔어요. 우리가 그걸 흡수를 했죠. 자발적으로.

그러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우리 것은 다 버려야 되는 것이고, 아주 후진적인 것이고 빈곤의 상징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살았잖아요.

 

"우리의 혼과 정신이 없으면 가치를 제대로 세울 수 없어"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다 뺏겼죠. 누가 빼앗아간 건 아니지만 우리가 스스로 놓친 거예요. 혼을 놓쳤으니까 정신이 있을 수가 없고. 혼과 정신이 없는데, 무슨 가치를 제대로 세우겠어요.

근래에 와서는 거기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이건 잘못했다. 그럴 것이 아닌데. 진정한 의미의 우리 것을 찾자.'라는 생각들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서 저는 굉장히 고무적이라고 생각을 해요. 앞으로 그런 움직임이 특히 지식인 사회에서 많이 일어나면 좋겠다고 개인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쉽지는 않을 것 같은 게 한국 지식인 사회가 대개 미국이나 유럽 또는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학위를 받은 분들이에요. 소위 미국식, 유럽식 서구 문명, 그 방법론을 공부한 분들이고, 그분들이 한국 지식인 사회에 수적으로 질적으로 어떻게 보면 헤게모니(hegemony)를 가지고 있다고 할까요.

이런 여건에서 우리가 국학을 얘기한다는 게 쉬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돼서. 어떤 전기(轉機)나 계기가 생길지 모르겠으나, 지금 같으면 우리 것을 찾자는 움직임이 있어도, 사회의 중심적인 흐름을 만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한국 정치사에서 격동의 시간을 함께 하셨습니다. 돌아보셨을 때에 가장 보람됐던 일은 어떤 것이고 또 아쉬웠던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보람이요? 글쎄요. 저는 일하면서 그렇게 크게 보람을 느꼈던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아쉬웠던 건 있죠. 이회창 총재께서 정치를 시작했을 때 저는 잘 모르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공직을 그만둘 무렵에 이 총재가 저를 좀 보자고 그러셔서 뵀더니, 당신이 정치 경험이 전혀 없으시니까 저를 보고 좀 도와달라고 그러셨어요.

저도 전혀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제가 할 생각도 물론 없었죠. 그래서 잘 모른다고 그랬는데, 제가 당신을 도와주기 싫어서 핑계를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그때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가려고 했어요. 1년 내지 2년 동안 공부를 하고 오면, 서울에 있는 어느 사립대학 총장님이 석좌 교수로 영입할 테니까 와서 젊은 교수들 하고 많은 대화를 통해서 가르쳐 달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이 총재가 하도 그러시니까 그걸 잠시 미루고 도와드리려 했어요. 그분이 당의 총재가 되시고 총선거가 닥쳐오니까 저에게 총선거 국회의원 공천 기획을 하라고 하셨어요. 제가 그때 당의 대표적인 중진(重鎭) 몇 분 공천을 탈락시키는 기획을 했어요.

 

"한국 정당사의 전무후무한 정치 개혁을 기획 주도"

 

총재님이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니까 못하시겠다는 걸 제가 설득해서 결국 그 일로 정치판이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어요. 그 파동을 일으켰으니까 엄청 욕을 먹고 책임을 지고 집으로 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일에 대해 언론계의 평가는 '한국 정당사에 전무후무한 개혁'이라고 했어요. "당의 핵심 세력 보스 둘을 동시에 쳤으니까. 앞으로도 한국 정당사에 다시는 이런 유례가 없을 거다. 그런 정치 개혁을 기획하고 실천했으니까 대단한 일을 한 거 아니냐."라고 평가해주는 분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게 제 개인적으로는 큰 보람이라고 느껴요. 그런데 그 이후에 그 당이 전혀 개혁을 하지 않았고, 다시 옛날로 그냥 돌아가 버려서 결국 결실을 거두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했던 게 결국 당했던 사람에게는 정치적 생명을 끊고, 그분들에게 말 못 할 아픔을 준 거지요.

나중에는 그게 어떤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을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시점에서만 보면 '내가 무엇 때문에 그때 그렇게 해서 남과 원수 지고, 그 많은 욕을 먹고, 그 풍파를 겪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렇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그래도 그건 누구도 하기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데서 보람이라면 보람을 느끼지요. 하지만 함부로 말하기가 어려운 게, 남에게 고통을 준 일이라서 자칫하면 오만으로 비칠 수도 있어서 조심스럽습니다. 제가 신이 아닌 이상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능이 있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별안간 보람이 있는 게 뭐냐고 물어보시니까 달리 생각이 안 나서 말씀드린 겁니다.

 

언론계에서 활동을 하시다가 관료계로 입문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아주 아주 단순한 이유예요. 정치부 기자를 하는데 72년에 10월 유신이 났잖아요. 유신 기간 비상계엄 동안에는 언론 신문이 다 검열을 받아야 되고 출입처, 정당이 다 없어지고. 그래서 저같이 정당과 국회를 출입하던 기자는 하루아침에 일터가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예요. 국회도 해산되고 정당도 없어졌으니까.

시간이 지나도 유신체제 속에서는 워낙 통제가 많아서 신문 기자가 제대로 활동할 수도 없고, 기사를 써도 안 나가는 경우가 많고, 언론사마다 권력의 눈치를 봐야 했어요.

윤 전 장관의 지난 10년간 행보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받은 게 많은 사람으로서 그간 받은 것을 사회에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결행이었다. [사진=김경아 기자]

 

그래서 기자라는 직업을 더 할 무슨 의미가 있냐는 짙은 회의에 빠져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 지내는데, 하루는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이 좀 보자고 하면서 그러는 거예요. "지금 당신 선배 동료가 이미 정부에 들어와서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 당신도 나하고 같이 고생 좀 하지."

당시 박정희 정부가 해외 대사관에 공보관이라는 직제(職制)를 만들어서 언론계에 있던 사람, 기자들을 충원해서 내보낼 때였어요. 해외 언론에 유신 체제에 관한 설명도 해야 되니까. 그런 필요성 때문에 제 선배, 동료들이 해외 공보관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대거 공직에 들어갔어요.

가족들하고 상의를 했죠. 이런 상황 속에서 신문기자를 더 한다는 게 의미가 없으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그래서 해외 공보관으로 나간 거예요. 신문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짙은 회의, 유신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도저히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었고. 국내 같으면 민망스럽겠지만 해외에 나가는 거니까.

해외에 나간다는 것에 매력을 느낀 게 그때는 여행자유화가 안 됐을 때예요. 외국에서 일하면서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좀 익히고, 외국어도 익히고. 그래서 그냥 기자 때려치우고 나간 거예요.

 

그 단순한 계기를 시작으로 후일 정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역할을 하시게 된 거네요.

그 일을 끝마치고 국내에 들어왔는데요. 5공 때죠. 청와대 공보수석인 언론계 선배가 저를 평소에 잘 봤든지 공보비서관으로 오라고 해서 청와대 공보수석실로 가게 됐어요. 대통령 공보비서관이니까 주로 대통령의 경제 분야 연설문 쓰는 일과 각종 회의 때 지시 내용을 다듬는 일을 했어요.

5공이 끝나 6공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5공 청산 작업을 했어요. 저는 대통령을 보좌하는 지위였으니까, 숙청 제1호가 될 수 있잖아요. 나쁜 짓을 했든 안 했든 지위가 그랬으니까 각오를 했죠. 그런데 면직이 아니라 정무비서로 오라고 그러더라고요.

나중에 들어봤더니 비서관들을 다 스크린 했는데, 저 같은 경우는 가까이 있었으니까 여러 가지 청탁이나 이권이나 인사가 많았을 거라고 보았는데, 재조사를 했는데도 전혀 없으니까 사방에 알아봤다는 거죠. 다행스럽게 저에 대해 물어본 사람들의 평이 좋았나 봐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짜 우리가 써야 되는 거 아니냐." 해서 정무비서관을 시켰다는 거예요.

그 바람에 일은 정말 많이 했어요. 집에 못 들어간 날도 많고. 6공이라는 게 민주화가 막 시작된 때라서 수십 년간 눌렸던 모든 분야의 에너지가 막 분출할 때 아니에요. 모든 기업에 노조가 생겨서 극렬한 투쟁이 벌어지고.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런 문제가 다 정치 문제가 되거든요. 모든 문제가 커지면 다 정치 문제가 돼요. 공교롭게도 그 일을 다 제가 처리해야 했어요. 죽을 둥 살 둥 하며 그때는 정말 고생스러웠는데, 그런 고생을 하며 일을 한 것이 결국 저의 능력을 키워준 것이죠.

나중에 문민정부 김영삼 대통령이 저를 공보수석으로 발탁했어요. 그 계기가 남북 정상회담을 하려고 김일성 주석하고 김영삼 대통령 교섭을 위해서 제가 교섭 대표를 하게 된 거였었죠.

판문점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는 과정에서 북한 대표하고 교섭하는 걸 보고 김 대통령이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는 거예요. 이후 장관을 하고 국회의원까지 하게 됐어요.

 

"국가와 사회로부터 받은 게 많은 사람이라 빚을 졌다는 의식으로"

 

제 가까운 어렸을 때 친구들은 저를 보고 그래요. "너는 세상에 좋다는 건 다 해먹은 놈이니 불평하지 마라. 네가 무슨 자격으로 불평하냐."

사실 그럴 만큼 출세도 어느 정도 했죠. 수없이 많은 공직자들이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일했을 텐데, 다 저처럼 받은 게 많지는 않거든요. 그런 면에서 저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굉장히 받은 게 많은 사람이라서 항상 속된 말로 '빚을 졌다'는 그런 의식이 있었죠.

제가 지난 만 10년 동안 '우리나라가 이렇게 가면 안 된다. 대통령이 이렇게 하면 안 된다. 대통령은 이런이런 자리다.' 그런 얘기를 계속 반복해서 떠든 게, 저로서는 제가 받은 것을 사회에 좀 되돌려드려야 된다. 그런 책임감으로 한 거예요. 효과가 있건 없건 간에.

그러다가 나이가 80이 넘으니까. 이제는 '먹고 놀아야지'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한국 정치에 관한 남다르신 통찰력은 결국 현장에서 축적하신 경험의 결과물이신 거군요.

통찰력은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인데요. 저는 그건 없고요. 현실을 뜯어보는 것은 훈련이 좀 된 편이죠. 왜냐하면 공직에 있을 때 높은 분의 참모 노릇을 해야 됐으니까 항상 준비를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현실을 뜯어보고 분석하고 평가하고 전망하는 훈련은 좀 돼 있는 편인데. 그렇다고 제가 미래를 보는 통찰력이 있느냐.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언론이 사람을 미화하는 습성이 있어서, 저를 쓸 때마다 제가 과거에 언론계 출신이니까 동업자 의식이 있어서 그랬다고 저는 얘기를 하는데. 저를 좋게 써주려다 보니까 그렇게 무슨 초인적인 능력이 있는 것처럼 과장돼 가지고 제가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것 때문에 정말 아주 힘들었죠.

 

"정치적 이해관계가 없어 제3자 의식으로 냉정하게 사물을 볼 수 있는"

 

저는 그런 능력이 없는데 자꾸 저한테 기대하는 게 있으니까. 아무리 없다고 그래도. 그러니까 그런 능력 가진 사람이 겸손하기까지 하다고 하니 그것도 못하겠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저한테는 그런 능력이 사실 없습니다. 이런 건 있어요. 제가 정치하는 분을 돕는 일을 했고, 저도 국회의원으로 4년 있었으니까 그때 신분은 정치인이죠. 그러나 제가 정치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국회의원을 한 일은 없어요. 저는 원래 정치를 할 생각이 없던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어떤 사물의 현상을 볼 때 다른 욕심이 있으면 그게 잘 안 보인다고 하는데, 저는 욕심이 없으니까 그런 점에서 남보다 더 냉정하게 봤을 수 있죠. 철저하게 제3자 의식으로 냉정하게 사물을 봤을 수는 있겠다. 그런 점에서는 차이가 약간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제가 무슨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장관님은 젊은 세대와 협업하며 창조적인 시도와 소통을 잘하는 분으로 유명하십니다. 그렇게 유연한 사고를 하실 수 있는 바탕은 무엇인가요?

그게 아주 간단한 이유죠. 저는 평소 무슨 생각을 했냐 하면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세월이 간다는 얘기잖아요. 세월이 그냥 가는 게 아니라 시대가 변한다고요. 그럼 세월이 가면서 시대가 변하니까 그 변하는 시대를 나이 먹은 사람이 앞장서지는 못하죠. 뒤는 따라가야 된다고요.

뒤를 따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첫째는 새로운 흐름, 시대적인 흐름을 알려주는 책이 계속 나와요. 국내외 학자들의 좋은 책, 그걸 사서 읽어보고. 그다음에 젊은 사람들하고 얘기해 보는 게 가장 손쉬운 방법이죠.

윤 전 장관은 젊은 세대와 교류하며 시대적인 감각을 익히고 그들의 사고를 받아들이며 배우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한다. [사진=김경아 기자]

 

젊은 사람 중에서 자기 분야에 조금 능력이 있고 책을 보는 친구들을 만나보면, 보통내기들이 아니에요. 제가 자주 만나는 젊은 친구들이 몇 있는데요. 오히려 제가 잘 안 보일 때 물어봐요. "이 문제를 어떻게 보냐?"

그러면 금방 얘기를 하는데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면까지 다 짚어주는 그런 친구들이 있어요. 제가 배우는 거죠. 시대적인 감각을 익혀야 되고, 젊은 사람 사고를 제가 받아들여야 되고.

그런데 저는 굉장히 재밌어요. 젊은 사람들과 얘기하면 시간 가는 걸 몰라요. 대개 평균 일주일에 한 번 또는 2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밥 먹고 온갖 얘기를 기탄없이 다 하죠. 영화 얘기하다가 정치인 얘기하다가. 젊은 사람들의 의식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왜 그런지.

 

"시대적인 감각을 익히고 젊은 사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큰 즐거움"

 

그게 젊은 사람들은 또 굉장히 가상한가 봐요. '야, 저 80 노인네가 계속 물어보고, 우리가 얘기하면 계속 질문하고, 이런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토론하기 좋아하고.' 그게 신기하대요.

왜냐하면 집에 가면 아버지하고 얘기가 안 되고 장인하고도 얘기가 안 된다. 언쟁을 하게 되고 얘기를 많이 안 하게 되는데, 저보다 그분들이 나이가 20년 가까이 아래라는 거예요.

"우리 부모님은 장관님보다 나이가 20년 넘게 아래인 데도 대화가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장관님은 우리하고 이렇게 기탄없이 소통이 되는지 신기하다는 거죠. 저는 정말 그걸 즐기고 덕분에 공부를 많이 해요.

그 친구들이 가끔 책을 주면서 "이런 책 아세요?" 하는데, 그게 다 아주 똑똑한 젊은 친구들이 나름대로 시대적인 해석을 해서 쓴 책이거든요. "나 몰라." 그러고 달라고 빌려보고. 그렇게 저는 젊은 사람들하고 얘기하는 걸 굉장히 즐기죠. 배우는 게 많습니다.

 

평소 선친(先親)이 주신 여러 가르침을 감사한 마음으로 많이 새기신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아버지의 역할이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선친의 가르침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제가 장남이지만 누님이 세 분이 있었는데 장남이라는 것 때문에 그러셨는지 어린 나이에도 앉혀 놓고 어려운 얘기를 많이 해 주셨어요.

아버지 말씀이니까 열심히 새겨들었는데 나중에 커서 보니까 이런 거였어요. '나는 결국 아버지가 쳐준 울타리 속에서 평생을 산 거네.' 그런데 그 울타리가 워낙 넓어서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는 거죠. 제가 말하는 울타리라는 건 인간의 도덕성을 얘기하는 거죠.

굉장히 많은 가르침을 받았어요. 동서양의 철학에 관한 얘기도 많이 해주셨고,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말씀 해주셨고. 그런 것들이 저한테 새겨져서 결국 저를 만들었더라고요.

나이 40 이전에는 아버지를 원망할 때가 많았어요. '아버지가 나에게 시대에 안 맞는 교육을 해서 내가 이렇게 현실에 적응하기가 힘들다.' 하는 것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했는데, 40 넘어 50 가까이 되면서부터는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내가 아버지한테 정말 좋은 교육을 받았네.' 그런 생각이 절실히 들어서 아들한테도 아버지만큼 물려주지는 못했으나, 아버지한테 받은 것 중에서 제가 핵심이고 정수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넘겨줘야 된다고 해서 열심히 해줬어요.

지금 보면 세계적인 대기업에서 일을 하는데도 아이들이 비교적 정직하고 자기 일에 열심이지만 굉장히 도전적이고, 또 절대로 옳지 않은 것에는 타협을 안 하려고 그래요. 그런 것들이 저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끝으로 인간의 삶에서 정치란 무엇일까요?

그건 정치라는 것을 얼마나 넓게 보느냐 적게 보느냐 하는 차이일 텐데요. 사람이 사는 삶 자체가 모든 게 정치 아닌가요? 가정을 꾸리는 것도 고도의 정치예요. 내외간에 연애해서 만났어요. 연애할 때는 콩깍지가 씌웠으니까 그렇지만 결혼하고 나면 생활이 시작되는 거잖아요.

그럼 의견이 다른 문화 속에서 자라난 두 사람이 결합을 해서 한 가정을 이뤘는데 생각이 다를 수 있잖아요. 이 다른 생각을 어떻게 평화적으로 조정하느냐. 또 자녀가 생겨 어떻게 저항감, 반항심을 갖게 하지 않고 그들에게 옳은 가치를 심어주느냐. 이게 다 쉬운 게 아니에요.

평화롭게 가정을 위한다는 게 저는 기본적인 정치라고 생각하는 거죠. 정치라는 걸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건데. 학문적으로 말하면 '정치란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저는 정치를 너무 그렇게 카테고리에 가두지 말고, 삶 자체가 정치 아닌 게 어디 있냐는 거죠.

국학 운동하는 것도 고도의 정치예요. 사람 마음을 잡아야 되는데, 마음을 잡아야 얘기를 들을 거 아니겠어요. 이게 어떻게 보면 고급 정치인 거죠.

"인간 사회의 모든 게 다 정치다." 옆에서 보면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정치라고 하지만 저는 넓게 보자는 거죠.

 

안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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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11-25 12:34:28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

윤진한 2021-11-25 12:33:34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
http://blog.daum.net/macmaca/3057
@무속은 은.주시대 始原유교의 하늘숭배,산천숭배,조상숭배, 주역(점)등에서 파생된 유교의 지류.
역사적 순서로 보면 황하문명에서 은.주시대의 시원유교[始原유교:공자님 이전 하느님(天)과 여러 神明을 숭배]에서, 한국 고조선의 기자조선으로 始原유교유입, 기자조선(始原유교) 마지막왕 기준의 후손이 삼한건설, 삼한(始原유교)의 영토에서 백제(마한).가야(변한).신라(진한)가 성립됨.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윤진한 2021-11-25 12:32:33
외래종교 형태로 단순 포교되어, 줄곧 정규교육기관도 없이, 주변부 일부 신앙으로 이어지며 유교 밑에서 도교.불교가 혼합되어 이어짐. 단군신화는 고려 후기 중 일연이 국가에서 편찬한 정사인 삼국사기(유교사관)를 모방하여, 개인적으로 불교설화 형식으로 창작한 야사라는게 정설입니다.

유교,공자.은,주시대始原유교때 하느님.조상신숭배.세계사로보면 한나라때 공자님도제사,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성립,수천년전승.한국은殷후손 기자조선 기준왕의 서씨,한씨사용,三韓유교祭天의식. 국사에서 고려는 치국의道유교,수신의道불교.

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이와 함께 한국 유교도 살펴봄.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윤진한 2021-11-25 12:31:52
이런 전통적인 신명 섬기기에 대해서, 공자님도 오래된 관습으로, 논어 "향당(鄕黨)"편에서, 관습을 존중하는 예를 표하셨습니다. 신명(神明:천지의 신령)모시기 전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상을 섬기는 제사는 유교가 공식적이고, 유교 경전에 그 절차와 예법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유교경전 예기에는 상고시대 조상신의 위치에서 그 혼이 하늘로 승천하시어 인간을 창조하신 최고신이신 하느님[天(하느님, 하늘(하느님)]하위신의 형태로 계절을 주관하시는 五帝가 계십니다. 유교는 하느님(天), 五帝, 地神, 山川神, 부엌신(火관련)숭배등 수천년 다신교 전통이 있어왔습니다.

@한국은 세계사의 정설로,한나라때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에 성립된 세계종교 유교국으로 수천년 이어진 나라임.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때,

윤진한 2021-11-25 12:31:17
@동아시아는 수천년 유교사회입니다. 공자님 이전의 始原유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 이전의 구약성서 시대에 해당됩니다. 하느님(天).神明,조상신 숭배가 유교의 큰 뿌리입니다. 유교는 국교로, 주변부 사상으로는 도가나, 음양가, 묵가사상등이 형성되었고, 법가사상은 이와는 다른 현실적인 사상이며, 국가의 통치에 필요한 방법이었습니다(진나라때 강성하고, 유교나 도교와 달리, 한나라때 율령이 반포되어 이후 동아시아에 유교와 별도의 성격으로 국가통치에 활용됨).@일부 지역에서 굿이나 푸닥거리라는 명칭으로 신령숭배 전통이 나타나도, 이를 무속신앙이라 하지는 마십시오. 불교라고도 하지 마십시오. 유교 경전 논어 팔일(八佾)에서는 공자님이전부터 섬겨온 아랫목 신(안방신), 부엌신등을 섬기는 전통도 수록하고 있습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