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시티 담양군 창평 들판에 서 있는 남극루를 떠나 또 다른 담양 10정자 상월정으로 가는 길은 담양 도보길인 싸목싸목길을 따라 약 1시간 30분 정도 거리이다.

전남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에 있는 상월정은 월봉산 입구에서 숲길로 1킬로미터를 들어가야 나온다. [사진=강나리 기자]
전남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에 있는 상월정은 월봉산 입구에서 숲길로 1킬로미터를 들어가야 나온다. [사진=강나리 기자]

구불구불 농로를 따라 걷다가 도착한 월봉산 입구에서 울창한 숲길로 1킬로미터를 들어가야 했다. 가을 숲속에는 무심히 지나치면 발견하지 못할 만큼 작지만, 관심을 두면 각기 놀랄 만큼 신비한 모양새를 가진 들꽃이 한창이었다.

깨끗한 흰색이 선명한 취꽃, 줄줄이 붉은 꽃이 달린 이삭여뀌, 작은 꽃자루와 꽃대가 달팽이처럼 구부러져 꿀벌을 유혹하는 진한 분홍빛 물봉선까지. 오동통한 고마리꽃은 곧 꽃망울을 터트릴 기세였다.

(맨 위) 상월정 가는 숲에서 발견한 취꽃(왼쪽)과 이삭여뀌. (둘째 줄) 물가에 피는 분홍 물봉선. (맨 아래) 고마리꽃. [사진=강나리 기자]
(맨 위) 상월정 가는 숲에서 발견한 취꽃(왼쪽)과 이삭여뀌. (둘째 줄) 물가에 피는 분홍 물봉선. (맨 아래) 고마리꽃. [사진=강나리 기자]

‘숲속의 보디빌더’라 불리는 서어나무의 군락을 지나니 아직 초록빛인 아기단풍나무가 서 있었다. 아기단풍 또는 단풍은 펼친 손가락이 7개이고, 당단풍은 9개, 섬단풍은 11개라니 숲에 대해 알면 알수록 새롭다.

숲속의 보디빌더라 불리는 근육질의 서어나무(왼쪽)와 아기단풍, [사진=강나리 기자]
숲속의 보디빌더라 불리는 근육질의 서어나무(왼쪽)와 아기단풍, [사진=강나리 기자]

거목으로 자란 모과나무를 지나자 아담한 상월정이 나타났다. 상월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의 한식 기와가 얹혀 있으며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었다. 입구에는 연이은 대나무 통을 타고 맑은 물이 흐르는 약수터가 있고, 빽빽한 대나무숲, 목백일홍이 피는 배롱나무 등이 둘러싸고 있다.

상월정 정면 4칸 중 왼쪽과 오른쪽은 방으로, 가운데 2칸은 마루를 깔아 강당 형식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마루에 앉아 고개를 들면 처마 끝을 따라 양쪽 끝이 부드럽게 말린 걸쇠가 일렬로 배치된 것이 보인다.

상월정은 고려 초 경종때부터 1천 년 역사를 간직한 공부터였다. [사진=강나리 기자]
상월정은 고려 초 경종때부터 1천 년 역사를 간직한 공부터였다. [사진=강나리 기자]

상월정의 방문은 들어열개문(분합문)으로 되어있어 앞으로 당겨 여는 여닫이 방식뿐 아니라 위로 들어 방문 끝의 장치를 걸쇠에 걸 수 있게 되어있다. 방으로 나뉘어 한정되었던 공간을 열어 탁 트인 넓은 숲까지 확장되는 한옥의 또 다른 묘미이다.

상월정은 정면에만 걸쇠가 있어 한 면의 풍경을 확장해서 바라볼 수 있는 대표적인 ‘1경 정자’이다. 담양 10정자 중 ‘소쇄원’에 있는 제월당은 정면과 오른쪽이 열리는 ‘2경 정자’, 광풍각은 좌우와 정면 3면이 열려 주변 풍경을 모두 나의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3경 정자이다.

(왼쪽)상월정 처마에 매달린 걸쇠. (오른쪽) 상월정 방문은 들어 올려 고정할 수 있는 들어열개문(분합문)으로 되어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왼쪽)상월정 처마에 매달린 걸쇠. (오른쪽) 상월정 방문은 들어 올려 고정할 수 있는 들어열개문(분합문)으로 되어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상월정은 예부터 보통 8~9명이 거주하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공부터였다. 고려 초인 경종 1년(976)부터 언양 김씨 일가에서 공부방으로 이용하던 암자인 ‘대자암’을 조선 초인 1457년 언양 김씨인 강원감사 김응교가 ‘상월정’이라 바꿨다. 언양 김씨가 400년, 1500년대 손자사위 이경이 물려받아 함평 이씨가 300년, 이후 대가 끊겨 외손인 고씨 학봉파가 물려받아 활용했다니 무려 1천 년의 역사를 지닌 공부터였다.

구한말 상월정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조국을 되찾을 인재를 키우는 산실의 역할을 했다. 규장각 직각直閣과 왕자에게 경전을 가르치는 황자전독皇子典讀, 의친왕 이강 공의 비서실장을 지낸 춘강 고정주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매국노들의 처벌과 조약의 조인거부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못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창평으로 내려왔다.

고정주는 비록 늦었지만 신학문을 깨우쳐 나라를 구할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집안의 정자인 상월정에 원어민 강사를 초청해 주로 영어를 교육하는 영학숙英學塾을 설립했다. 또한, 지역 유지들과 뜻을 모아 국사, 영어, 일어, 산술 등 당시 신학문 교과목을 가르치는 창의의숙을 설립해 초대 교장에 선출되었다. 창의의숙은 나중에 창평보통학교로 커졌고, 현재 창평초등학교가 되었다.

상월정 앞마당에는 연이은 대나무통을 따라 맑은 물이 흐르는 약수터가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상월정 앞마당에는 연이은 대나무통을 따라 맑은 물이 흐르는 약수터가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그는 상월정에서 아들 고광준과 사위 인촌 김성수를 비롯해 고하 송진우, 가인 김병로 등 많은 인재를 키웠다. 동문수학한 이들이 광복 전후 나라를 이끄는 한국 민족주의 우파로 성장했다. 김성수는 동아일보를 창간했고 제2대 부통령을 지냈으며, 송진우는 중앙학교 교장과 한민당 수석총무를, 김병로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상월정의 주인 고정주는 임진왜란 때 아들 고종후, 고인후와 함께 의병장으로 나서 순국한 제봉 고경명의 후손이다. 구한말 고정주가 교육 운동을 통해 우선 힘을 길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면 그와 같은 집안인 녹천 고광순은 의병장으로서 무장투쟁을 위해 출정했다. 서로 노선은 달랐어도 고정주는 곳간 문을 끌러놓고 의병들이 식량을 가져가도 모른 척함으로써 도왔다고 한다.

담양 10정자 중 상월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진 정자로 소담한 아름다움을 갖직하고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담양 10정자 중 상월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진 정자로 소담한 아름다움을 갖직하고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고광순은 의병을 이끌고 정읍, 순창, 구례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쳤다. 1907년 10월 17일 지리산 연곡사에서 일본군에 둘러싸인 고광순은 부하에게 의병명단과 불원복(不遠復-멀지 않아 국권은 회복된다)이라 쓴 태극기를 가지고 빠져나가 훗날을 기약하라고 이른 후, 의병 13인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그때 고광순의 나이가 60세였으며, 그의 선조 고경명이 순국한 나이와 같았다. 이들 장흥 고씨 집안에서 9명의 의병장이 나왔다고 하니 가히 '대를 잇는 의병 집안'이다.

상월정에서 산길을 따라 50분 거리에 의병장 고광순을 기리는 사당 ‘포의사’가 있으며, 상월정에서 포의사까지 가는 숲길을 ‘항일 구국길’이라 부른다.

상월정으로 가는 대중교통은 담양공용버스터미널에서 농어촌버스 3-1번을 타고 창평훈련장 정류장에서 하차한 후, 농어촌버스 4-8, 8-1을 타고 용수리 정류장에서 내려 1.6km를 걸어가면 된다. 다음은 조선 선조 원년인 1568년부터 10년간 쓴 '미암일기'를 통해 임진왜란 후 소실된 역사복원에 기여한 명신 미암 유희춘의 정자 ’연계정‘으로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