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10정자 중 유일한 누각인 ‘남극루南極樓’로 가는 여정을 창평 전통시장에서 시작했다. 때마침 열린 오일장의 소박한 부산스러움을 뒤로하고 10여 분 정도 걸었다.

그 길에 한옥이 어루러진 정겨운 돌담이 나타났다. ‘자연과 함께 하는 느림의 미학’을 주제로 조성된 담양군 창평 슬로시티였다. 백제 시대부터 형성된 이 마을은 예부터 곡식이 많이 나서 ‘만석궁’이라 불렸다고 하는데 그만큼 삶에 여유가 깃들어 있다.

자연과 어우러져 여유가 가득한 창평슬로시티. (시계방향으로) 돌담길, 문패 대신 '검나 많은 석류나무집'이라는 명패가 달린 집, 줄이어 낮은 산이 둘러싼 창평, 창평의 한옥마을. [사진=강나리 기자]
자연과 어우러져 여유가 가득한 창평슬로시티. (시계방향으로) 돌담길, 문패 대신 '검나 많은 석류나무집'이라는 명패가 달린 집, 줄이어 낮은 산이 둘러싼 창평, 창평의 한옥마을. [사진=강나리 기자]

어느 집 대문 위 ‘겁나 많은 석류나무집’이라고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로 적힌 명패가 ‘풋’하고 절로 웃음 짓게 한다. 소유주 이름을 적은 문패 대신 각 집의 특성을 담은 명패들이다. 담장 아래 연분홍빛 봉선화도, 담장 너머로 가지를 뻗은 감나무도 길을 걷는 이에게 유유자적함을 선물한다.

돌담길 끝 탁 트인 공간에서 줄을 이어 늘어선 나지막한 산들이 마을을 감싸 안고 그 앞으로 너른 들판에 벼가 익어가고 있었다. 담양 10 정자를 둘러보면 어느 곳이든 산들이 겹겹이 둘러 있지만 답답하지 않고, 폭 안긴 듯해 풍수지리를 알지 못하는 이도 하늘과 땅의 사랑을 받는 살기 좋은 터라는 걸 알게 된다.

(시계방향으로) 벼가 익어가는 너른 벌판 위를 나는 백로, 벌판에 세워진 남극루, 창평현문. [사진=강나리 기자]
(시계방향으로) 벼가 익어가는 너른 벌판 위를 나는 백로, 벌판에 세워진 남극루, 창평현문. [사진=강나리 기자]

마을 끝에서 100여 미터 거리에 남극루가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넓게 벼가 익어가는 논 위로 백로가 흰 날개를 펼치며 하늘을 날아오른다. 남극루는 들판 한가운데 서 있고, 그 왼편에 기와를 얹은 문이 하나 있다. 창평을 다스리던 현감이 출입하던 ‘창평현문昌平縣門’이다.

남극루는 원래 1830년대 인촌 김성수의 장인인 고광일을 비롯해 창평에 집성촌을 이루던 마을 유지 30여 인에 의해 옛 창평동헌(현 창평면사무소)에 지어졌다가 191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마을사람들이 흔히 양로정(養老亭)이라 불렀다고 하니 어르신들을 위한 장소였을텐데 자세한 설명은 없다.

이 정자의 이름과 관련해서 ‘무병장수의 별, 수명壽命을 담당하는 별’이라는 ‘남극성’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남극성은 천구에서 시리우스 다음 두 번째로 밝은 별이며, 서양에서는 ‘카노푸스(Canopus)’, 동양에서는 노인성老人星, 또는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 수성壽城 이라고도 불렸다.

(위) 푸른 가을 하늘 아래 날개를 편 남극루 지붕은 겹지붕으로 화려하고 2층 난간도 장식미가 뛰어나다. (아래) 평화로운 아침 남극루 2층 난간에 앉은 참새. [사진=강나리 기자]
(위) 푸른 가을 하늘 아래 날개를 편 남극루 지붕은 겹지붕으로 화려하고 2층 난간도 장식미가 뛰어나다. (아래) 평화로운 아침 남극루 2층 난간에 앉은 참새. [사진=강나리 기자]

고요한 아침햇살 속에 활짝 날개를 편 남극루 지붕 아래에는 유독 화려한 2층 난간이 있다. 그 난간에 앉은 참새는 사진기를 들이밀자 고개를 갸웃하더니 포로로 날아가 버렸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가팔랐다. 지붕 아래 천정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장치가 있었다. 예전에 여기에 북을 걸어 현감의 등청과 퇴청을 알렸고, 마을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북을 울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다.

‘남극루’라는 현판은 물론 어떠한 현판도 남아있지 않고, 다만 걸려있던 흔적만 남았다. 안내문에도 별다른 설명은 없고,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옮겨졌다는 사실뿐이다.

남극루 2층 천정에는 예전 북을 걸어 현감의 등청, 퇴청과 마을의 중요한 일을 알리는 북이 걸렸었다고 전한다. [사진=강나리 기자]
남극루 2층 천정에는 예전 북을 걸어 현감의 등청, 퇴청과 마을의 중요한 일을 알리는 북이 걸렸었다고 전한다. [사진=강나리 기자]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 형식의 팔작지붕집인 남극루는 잘생긴 누각이다. 지붕은 겹처마로 되어있어 ‘부연婦椽’이라는 짧은 서까래가 장식미를 더한다. 여타 정자보다 규모가 크고, 최근 죽녹원에 봉화루라는 누각이 세워지기 전까지 담양에서도 유일한 누각이었으며 드물게 평지에 세운 정자이다.

유난히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누각을 받치고 있는 외벌대 기단 위에 높이 세운 기둥들이었다. 통나무의 자연스러운 결과 질감을 그대로 살린 기둥들은 중간이 두툼한 배흘림기둥이다. 서양 건축물처럼 같은 크기, 같은 모양으로 다듬지 않아 오히려 정겹다.

칼로 베어낸 듯 매끈한 돌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자연석 주춧돌인 덤벙주초 위에 세워진 나무 기둥은 여름에 부풀고, 겨울에 오그라드는 현상을 수없이 겪어 결국 전혀 다른 재질인 돌과 나무가 한 몸인 듯 어우러져 있었다.

나무의 질감과 형태를 살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그리고 박음질하듯 나무를 짜집기한 모습. [사진=강나리 기자]
나무의 질감과 형태를 살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자연석인 덤벙주초와 나무의 어우러짐, 그리고 박음질하듯 나무를 짜집기한 모습. [사진=강나리 기자]

더욱이 기둥 중에는 마치 짜깁기를 하듯 다른 나무의 조각을 이어붙인 자국들이 많았다. 멋들어지게 자란 통나무만 쓴 것이 아니라 상처 입고 파인 곳을 덧대어 옹골차게 활용했다. 이날 동행한 오소후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나무를 박음질한 것"이다.

이 나무기둥들은 전통 생활사박물관인 ‘비움’(광주광역시)에서 본 바가지들을 떠오르게 한다. 옛 어른들은 바가지에 금이 가거나 구멍이 나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재료로 흠을 메워 알차게 썼다. 그러고도 쓰기가 어려워지면 전등갓 등으로 재활용하며 아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가난, 청승스러움이라기보다 아껴쓰고 고쳐쓰고 새롭게 썼던 선조의 일상이 엿보였다.

남극루 나무기둥에서 자연스러움과 서로 어우러짐, 그리고 한번 만들어진 물건을 아껴 활용했던 옛 선조의 지혜로움이 드러난다.

담양10정자 중 유일한 누각 '남극루'. 누각의 이름에 대해서는 무병장수의 별, 노인의 별이라 불리는 남극성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사진=강나리 기자]
담양10정자 중 유일한 누각 '남극루'. 누각의 이름에 대해서는 무병장수의 별, 노인의 별이라 불리는 남극성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사진=강나리 기자]

남극루는 담양의 걷는 길인 ‘오방길’ 중 4코스 싸목싸목길 위에 있다. 싸목싸목길은 창평면사무소에서 출발해 돌담길, 남극루, 용운저수지, 상월정, 포의사를 거쳐 다시 창평면 사무소로 오는 7.2km(3시간 40분)의 길이다.

도보여행을 좋아한다면 담양터미널에서 농어촌버스(3-1, 4-1, 4-2, 4-3, 4-4) 등을 타고 창평초교 또는 창평훈련장 정류장에서 내려 이 길 위에 올라도 좋겠다. 다음은 이 길을 따라 고려 때부터 있었고, 대한제국 말기 근대교육으로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인재를 양성한 ‘상월정’으로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