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푸른 녹음 속을 잠시 지나는 소나기로 인해 떠도는 공기에서조차 푸른 향이 배어 나오던 늦여름.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산실 전라남도 담양군의 송강정을 올랐다.

‘담양 10 정자’ 중 이웃 면앙정은 중턱에 대나무가 숲을 이루었는데, 송강정은 오르는 계단을 따라서 소나무들이 열을 지어 서서 완만한 아치를 이루었다. 문득 발밑을 살피니 물기 어린 돌계단 틈에 쌀알만큼 작은 쥐꼬리망초꽃이 싱그러운 생명력으로 매력을 뽐냈다.

송강정(전남 담양)을 오르는 돌계단을 감싸듯 늘어선 소나무 숲. [사진=강나리 기자]
송강정(전남 담양)을 오르는 돌계단을 감싸듯 늘어선 소나무 숲. [사진=강나리 기자]

돌계단 끝에서 마주한 정자는 동남향으로 무등산을 바라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중앙에 방이 배치되어 사방으로 마루가 나 있다. 돌계단을 오르면서 먼저 보이는 것은 북쪽을 바라보는 ‘죽록정竹綠亭’ 현판이다. 다시 왼쪽으로 한발 돌아서면 ‘송강정松江亭’이란 현판이 동쪽을 바라보고 달려있다. 하나의 정자에 서로 다른 이름의 현판, 그 연유는 무엇일까.

마당 한 켠 송강정을 소개하는 안내문을 살펴보니 “선조 27년(1594) 동인의 탄핵을 받은 송강 정철이 벼슬을 내려놓고 내려온 곳이 담양 창평이며, 이곳에 초가를 지어 죽록정이라 불렀다. 1770년 후손들이 그를 기려 기와로 정자를 짓고 그의 호를 따 송강정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정자 터 앞을 흐르는 개울이 바로 죽록천이며, 송강이라고도 불렸다.

돌계단 끝에서 처음 마주한 현판은 '죽록정'. 송강 정철이 동인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초가를 지었을 때의 이름은 죽록정이었다. [사진=오소후 시인 제공]
돌계단 끝에서 처음 마주한 현판은 '죽록정'. 송강 정철이 동인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초가를 지었을 때의 이름은 죽록정이었다. [사진=오소후 시인 제공]

정자의 주인 송강 정철은 조선 중기 가사문학의 절정을 만들어낸 시인이다. 위대한 인류 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한글이 세종대왕 창제 이후 사대부들에게 ’언문‘이라며 천대받다가 사대부를 비롯해 백성 누구나 짓고 즐기는 아름다운 시어詩語로 태어난 것이 바로 가사문학이다.

“원앙 비단 베어놓고 오색실 풀어내어/ 금자에 맞추어서 임의 옷 지어내니/ 솜씨는 물론이요, 격식도 갖추었네/ 산호수珊瑚樹 지게 위에 백옥상자 담아두고/ 임에게 보내려고 임 계신 데 바라보니/ 산인가 구름인가 험하기도 험하구나” 《사미인곡》 中

조선 시대 5대 가사로 손꼽히는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면앙정가》 중 송순이 지은 《면앙정가》를 제외한 모두가 정철의 작품이다.

그가 벼슬길에 나가기 전 25세에 《성산별곡》을 지은 곳이 담양군 가사면에 있는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식영정이며,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은 곳이 바로 송강정이다. 강원도 관찰사로 지내며 지은 《관동별곡》을 제외하고, 시인 정철이 그의 문학을 꽃피운 곳이 바로 담양인 셈이다.

정자의 북쪽 면 '죽록정'과 동쪽 면 '송강정' 현판. 이 곳 정자 앞을 흐르는 개울이 죽록천이며, 송강이라고 불렸다. [사진=오소후 시인]
정자의 북쪽 면 '죽록정'과 동쪽 면 '송강정' 현판. 이 곳 정자 앞을 흐르는 개울이 죽록천이며, 송강이라고 불렸다. [사진=오소후 시인]

정철은 한양에서 태어났으나, 송순, 김윤제, 김인후, 기대승과 같은 대학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익힌 곳도 담양이고,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핵으로 밀려나 책을 벗 삼아 마음을 달래며 지낸 곳이 담양이니 그에게 실질적인 고향은 담양이 아닐까.

시인으로서 정철은 칭송을 받았지만, 정치가로서 정철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자신의 원칙과 소신이 목숨보다 중했던 그는 훗날 서인의 영수가 되었고, 정치적 견해가 다른 동인과 격렬하게 대립했다. 율곡 이이가 중재를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동인의 영수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은 일화는 유명하다.

그에게 가장 큰 비난이 쏟아진 사건은 ‘기축옥사’이다. 동인인 정여립이 모반에 연류되었다는 황해 감사 한준의 비밀 장계를 받은 선조는 분노했다. 당시 집권세력이던 동인 측은 이를 모함으로 보았으나, 정철은 철저하게 반역 세력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과거 “호랑이와 독수리의 절개를 지녔다.”고 칭찬했던 선조는 그를 죄인들의 심문을 주관하는 위관委官(오늘날 검사)으로 임명했다.

정철을 따르던 제자들은 ‘누가 맡아도 오명을 남기게 될 자리’라며 말렸으나, 정철은 스스로 나섰다. 이 기축옥사로 인해 조선 4대 사화(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로 희생된 선비의 수보다 배가 많은 1천여 명의 선비가 목숨을 잃었다.

정철은 동인의 영수 이발을 비롯해 동인 계열의 선비들에게 사사로운 원한을 풀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를 옥사의 선봉장으로 내세웠던 선조는 이후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며 정철을 ‘독철毒澈’이라고 칭했다. 정철은 선조가 휘두르는 칼로 쓰이다 내쳐진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감정을 통해 충절을 노래하던 시인의 마음을 가졌으나, 유교적 정치 견해 측면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어 마치 성난 호랑이와 독수리의 심장과도 같았다. 고집스러움 때문에 첨예한 갈등을 주도한 주인공으로 평생 칭송과 비난 사이를 걸어야 했다. 면앙정 송순이 90세까지 존경받는 학자로서 살다간 것과는 대비된다.

송강정 앞에는 소나무와 배롱나무, 대나무가 어우러져 울창한 녹음을 자랑했다. [사진=강나리 기자]
송강정 앞에는 소나무와 배롱나무, 대나무가 어우러져 울창한 녹음을 자랑했다. [사진=강나리 기자]

때마침 소나기가 그치고 시원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송강정 마루에 앉아 하늘을 보니 작은 물방울이 맺힌 거미줄이 보인다. 그 너머에 하늘 높이 자란 장대한 소나무 위로 얼핏 대나무가 흔들렸다. 그 순간의 송강정은 고요했다.

비운의 삶을 살다간 정철. 520여 년 전 이 정자에 머문 때만큼은 그의 삶도 고요하고 풍요로웠던 것 같다. 송강정에서 지은 《사미인곡》, 《속미인곡》에 흐르는 감흥이 이를 대변한다. 그도 자연을 닮아 서로 어우러지는 공생共生의 아름다움을 알았다면 어떠했을까.

(위)소나기가 지난 후 작은 물방울이 맺힌 거미줄. (아래) 하늘 높이 자란 소나무 뒤로 대나무가 키 재기를 하듯 함께 흔들린다. [사진=강나리 기자]
(위)소나기가 지난 후 작은 물방울이 맺힌 거미줄. (아래) 하늘 높이 자란 소나무 뒤로 대나무가 키 재기를 하듯 함께 흔들린다. [사진=강나리 기자]

송강정은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 있으며, 대중교통으로 가려면 담양터미널에서 322-2번을 타고 송강정 종점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다음에는 ‘담양 10정자’ 중 유일하게 누각으로 지어진 ‘남극루’로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