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다스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음으로 두루 이롭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조상들이 고안해 낸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202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삼 ‘화백(和白)’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한승용 국학연구소 실장
한승용 국학연구소 실장

신라는 국가 중대사를 해결하기 위한 백관회의(百官會議)로 화백제도를 운영했다고 배웠습니다. 이때의 백관(百官)이란 진골(眞骨) 대표로서 흔히 대등(大等)이라 불리며, 그 의장이 상대등(上大等)이었습니다. 화백회의 장소인 4영지(四靈地)가 비공개된 산악이라는 점에서 외부와 격리된 채 회의를 진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관회의라는 의미로 볼 때 비록 통치자인 왕이 있었지만 중요한 의사결정은 백관의 만장일치로 결정했음을 알게 됩니다.

역사서를 보면 《당서(唐書)》 ‘신라전(新羅傳)’에는 “정사는 반드시 중의에 붙였으니 이를 화백이라 하였고, 한 사람이라도 이견이 있으면 결정되지 않았다(事必與衆議 號和白 一人異則罷)”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삼국시대 훨씬 이전에도 이미 화백제도가 있었습니다. 조선 중종 때 찬수관(纂修官)을 지낸 일십당 이맥(李陌, 1455~1528)이 66세(1520년) 때 지은 《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에 "백성의 의견을 모아 하나로 통일하는 화백 제도를 두었다(與衆議一歸 爲和白)", "다스림을 시행함에는 화백보다 앞서는 것이 없었다(發政莫先於和白)"이라는 내용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화백제도’는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의견이 만장일치가 되었을 때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제도입니다. 우리는 지금 한 가족끼리도 의견일치를 보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를 운영하는 데 만장일치 제도를 적용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입니다. 아마도 의사결정의 구성원들이 거의 성인(聖人) 수준에 이르러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화백제도를 운영했을까요?

《태백일사》의 <환국본기(桓國本紀)>에 “그 추구하는 핵심은 오직 구환의 백성이 공익을 위해 대동단결하여 하나로 돌아감에 있나니 또한 마땅히 스스로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비교하여 한 사람도 다름이 없은 연후에 이를 좇으며 모든 무리들이 감히 갑자기 독단적 술수를 써서 처리하지 않았다(其所求鵠惟在九桓爲公大同歸一焉者 則亦當自較得失無一人異然後從之 諸衆亦不敢遽下獨術以處之)"라고 했습니다. 화백제도에서는 기본적으로 독단적인 술수를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대개 무리를 대처하는 법이 갖춤이 없으면 근심이 있고 갖춤이 있으면 근심이 없나니 반드시 갖추어서 미리 자급하고 무리에게 유익함을 안겨주고 다스림을 능히 펴니 온 누리가 한 목소리로 공덕을 칭송하고 말을 하지 않아도 덕화가 이루어졌다(蓋處衆之法無備有患 有備無患 必備豫自給 善群能治萬里同聲 不言化行)"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즉, 만장일치의 화백제도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상할 수 있어야 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낼 수 있는 고차원의 지혜가 필요하며 그리고 이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기 전에 미리 미리 모두가 합의하여 실행할 수 있는 상태로 준비해 놓는 것”을 제시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수천 년의 화백 DNA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자의 목소리도 경청해 들어야만 의사결정을 할 수 있었던 제도가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를 그대로 다시 살릴 수는 없어도 그러한 위대한 정신을 다시 살려내야 하지 않을까요? 누구도, 어떤 세력도 우습게 여기지 않고 모두를 하나로 뭉치게 하자는 그런 정신 말입니다.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화백을 유지한 정신이 그립습니다. 한국인이 한국인다울 때는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에 기반을 둘 때입니다. 세계화 시대에는 한국인이 한국인답게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