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의 고대 철학, 문화, 종교 분야 연구에서 지난 수백 년 어쩌면 수 천 년 동안 유지되어온 기본적인 인식틀이 아직도 별다른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동북아시아 역사-고고학 분야에서 기존의 인식틀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해야 할 새로운 발굴과 자료 그리고 새로운 시각들이 등장하고 있다.”

우실하 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교수는 최근 《사회사상과 문화》 24권 2호에 게재한 논문에서 이 같이 주장하고 동북아시아의 철학, 종교, 문화 연구의 전통적인 인식틀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새로운 요인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우실하 한국항공대 인문자연학부 교수. [사진제공=우실하]
우실하 한국항공대 인문자연학부 교수. [사진제공=우실하]

 

즉 (1)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요하문명(遼河文明)’의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 (2) 동이족과 화화족의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학설, (3) 익숙한 하-상-주 시대부터 역사시대로 보던 시각을 넘어 요-순 시대부터 역사시대로 보는 새로운 시각의 등장, (4) 요임금과 같은 시대라는 고조선의 실존 가능성을 높이는 새로운 자료의 등장, (5) 동북아시아에서 ‘문명 단계’나 ‘국가 단계’의 시기를 앞당기는 시각 등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요하문명(遼河文明)’의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

먼저 (1)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요하문명(遼河文明)’의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이다.

우 교수는 “이제까지 중원 지역의 황화문명이 중국 고대문명의 발상지이며, 기타 지역은 이 지역에서 전파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방식이었다.”라면서 “이러한 상식은 이제는 더는 중국에서조차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 교수에 따르면 1970년대 말부터 시작해서 1980년대 들어서면서 장성 밖 요하(遼河) 일대에서 황하문명 지역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문화적으로도 발달한’ 신석기문화가 속속 확인되었고, 1995년에 ‘요하문명’으로 명명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하문명의 홍산문화(紅山文化: BC 4500∼3000) 후기(BC 3,500∼3,000)에 속하는 우하량(牛河梁)유지에서 발견된 대규모 적석총(積石冢), 제단(祭壇), 여신묘(女神廟: 여신을 모신 사당) 등을 갖춘 유적의 발견은 중국학계에 큰 충격이었고, 중국의 상고사-고대사를 전면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논문에서 우 교수는 “만주 지역에서 새롭게 발견된 요하문명(遼河文明)에서는 홍산문화(紅山文化: BC 4500-3000) 후기(BC 3500-3000)에는 이미 ‘초기 문명 단계’ 혹은 ‘초기 국가 단계’에 진입했다고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요하문명, 황하문명, 장강문명의 위치. [자료=우실하]
요하문명, 황하문명, 장강문명의 위치. [자료=우실하]

 

요하문명의 새로운 발견은 동북아시아 철학, 종교, 문화 연구와 관련하여 시사점은 우 교수는 이렇게 제시했다.

첫째, 요하문명의 발견으로 ‘동북아시아 문명의 시작’이 요서 지역에서 시작되었다는 새로운 시각을 깊이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요하문명의 존재는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단군고조선이 실재하였을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점이다. 기존의 연구자들은 기원전 2333년경에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요하문명의 발견으로 많은 홍산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1) 홍산문화 후기(BC 3500∼3000)에는 이미 ‘초기 국가 단계’ 혹은 ‘초기 문명 단계’에 진입했다고 보고 있다.

우 교수는 “설지강(薛志强)은 1995년 논문에서, 요서 지역에서는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 ‘하(夏)나라보다 앞서서 문명고국(文明古國)이 건설’되었다고 보는데, 설지강이 이야기하는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의 ‘하나라(BC 2070∼1600)보다 앞선 문명고국’이 고조선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가 말하는 ‘하나라보다 앞선 문명고국’이 바로 앞서 소병기가 이야기하는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의 ‘방국 단계 대국(大國)’이다.”고 말했다.

우 교수는 “중국의 어떤 문헌 기록에도 요서 지역에서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의 ‘하나라보다 앞선 문명고국(설지강)’ 혹은 ‘방국 단계의 대국(소병기)’의 이름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기록에는 이 시기에 ‘(고)조선’이라는 정식 국가명이 있다. 이제라도 요하문명과 고조선의 관계, 더 나아가 한반도와의 관계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이 황제족이라는 중국의 견해가 국제학계에서도 그대로 정설이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을 너머 ‘이하선후설(夷夏先後說)’의 등장

두 번째 (2)‘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을 너머 ‘이하선후설(夷夏先後說)’의 등장이다.

중국에서 새롭게 등장한 ‘이하선후설(夷夏先後說)’은 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인 동쪽의 ‘이(夷)’가 서쪽의 ‘하(夏)’보다도 시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앞선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하선후설’은 기존에 동북아시아의 역사, 문화, 종교, 사상을 보던 시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다음 일곱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이-하’의 관계는 단순히 지역적으로 ‘동-서’로 나뉘어 다투는 세력이 아니라, 이(夷)가 동북아시아에서 시기적으로 먼저 있었던 ‘토착 세력’으로 본다. 이들이 동북아시아의 토착 세력으로 신석기시대의 ‘정착 농업문화’를 일군 주역이라는 것이다.

둘째, 동북아시아의 토착 세력으로 신석기시대 정착 농업문화를 일군 주도 세력이 바로 흥륭와문화, 홍산문화 등으로 이어지는 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발해만 인근과 산동반도 인근으로 남하하면서 후대에 이(夷) 혹은 동이(東夷)로 불리던 집단이라는 것이다.

셋째, 서쪽에서 세력을 키운 하(夏)는 토착 세력이 아니라 서쪽 곧 중앙아시아에서 새롭게 이주하여 온 세력으로, 청동기시대에 동북아시아에 ‘유목문화를 도입한 세력’이라는 것이다.

넷째, 체질인류학적으로, (1) 이(夷)는 몽골인종으로 수만 년 전 구석기시대에 동남아 지역에서 올라온 세력이며, (2) 하(夏) 혹은 융적(戎狄)은 인도-유럽인종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된 세력이라는 것이다.

다섯째, 언어학적으로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는 전형적인 혼합어인데, 이들 언어에서 (1) 이어(夷語) 혹은 화오어(華澳語)가 기층이고, (2) 화어(華語) 혹은 인도유럽어(印歐語)가 표층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소위 말하는 ‘한족(漢族)’의 역사는 ‘이-하 결합의 역사’이며, 한인(漢人) 한어(漢語) 한문화(漢文化) 등은 모두 ‘이-하 혼합의 결과’라는 것이다.

일곱째, 이하선후설의 시각에서 볼 때 동아시아 문명의 본토기원설(本土起源說)과 외래전파설(外來傳播說)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우 교수는 “‘이하선후설’은 아직은 너무 광범위하여 거친 면이 많지만, 동북아시아 상고사-고대사뿐만이 아니라 철학, 종교, 문화를 새롭게 볼 수 있는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하선후설’이 나올 수 있는 배경에는 당연히 요하문명의 새로운 발견이 자리하고 있다.”라면서 “아직은 거칠지만 큰 틀에서는 필자도 동의하고 있다. 이런 시각을 바탕으로 좀 더 세밀하게 다듬어서 동북아시아 철학, 종교, 문화 연구의 새로운 인식틀을 마련하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堯)임금의 도성 도사유지(陶寺遺址)의 발견과 요순시대(堯舜時代)의 역사화

우 교수는 세 번째로 (3) 익숙한 하-상-주 시대부터 역사시대로 보던 시각을 넘어 요-순 시대부터 역사시대로 보는 새로운 시각의 등장을 소개했다.

임분시 위치. [자료제공=우실하]
임분시 위치. [자료제공=우실하]

논문에서 우 교수는 “중국학계는 중화문명의 근원을 탐구한다는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原工程: 2004∼2015)을 마무리하면서 산서성(山西省) 임분시(臨汾市) 양분현(襄汾縣) 도사진(陶寺鎭) 도사향(陶寺鄕) 도사촌(陶寺村)에서 발견된 도사유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도사유지가 바로 (1) 전설 시대로만 알려졌던 요(堯)임금의 도성인 평양(平陽)이며, (2) 이곳이 ‘최초의 중국[最早中國]’ 혹은 ‘화하민족의 첫 도성[華夏第一都]’이라고 정식으로 공표한 것이다.”라며 “도사유지가 발견된 임분시 일대는, (1) 행정 중심은 현재도 요도구(堯都區)이고 수 천 년 전부터 ‘요임금의 도성((堯都)’으로 알려져 있던 곳이며, (2) 현재도 요묘(堯廟), 요능(堯陵), 제요고거(帝堯古居), 고사선동(姑射仙洞) 등 많은 요임금 관련 유적지가 있다. 이런 전설이 도사유지의 발굴을 통해서 정식으로 입증된 것이다.”라고 소개했다.

이어 우 교수는 “결국 도사유지의 발굴을 통해서, 이제까지 ‘하-상-주’로 시작되는 중원 지역 황하문명의 ‘역사시대’를 ‘요순시대’로 끌어올려 ‘당요(唐堯) → 우순(虞舜) → 하우(夏禹) → 상탕(商湯) → 주공(周公)’으로 이어지는 ‘역사시대의 계보’를 새롭게 재정립하고 인정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우 교수는 “중국 고고학계가 공식적으로 요임금의 도성이라고 인정하고 공표한 도사유지의 발견은 고조선 연구에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 시사점을 보면 첫째,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고조선의 건국과 관련하여, 요임금에 대해서 중국학계에서는 통용되는 것은, (1) 요가 천자에 오른 해인 제요원년(帝堯元年)을 ‘갑진년(甲辰年)’이라고 보고 있고, (2) 학자들이 여러 자료를 검토하여 내린 제요원년은 ‘기원전 2357년’으로 보고 있으며, (3) 20세에 천자에 오르니 생몰 연대를 약 BC 2377∼2259년으로 보고 있다. 만일 중국학계의 논의대로 제요원년을 갑진년인 BC 2357년으로 보이 되고, 현재 통용되는 단군조선의 건국연대인 BC 2333년과 불과 26년밖에 차이가 안 나며, (2) ‘요임금과 같은 시기’인 BC 2357년이라면 통용되는 BC 2333년과 불과 24년 정도 이르다.

우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기원전 2333년은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수정한 것처럼 ‘당고 즉위 원년을 갑진년이 아니라 무진년으로 보고, 이로부터 50년후인 정사년’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어떤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운 추론인지는 앞으로의 연구과제이다.”고 말했다.

우 교수는 도사유지의 발굴로 요임금이 전설이나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였음이 밝혀진 이상, 단군조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연구가 필요해졌다고 본다.

둘째, 중원 지역에서 요임금의 도성으로 비정한 도사유지나 황제(黃帝)의 도성으로 비정한 석묘유지(石卯遺址) 등을 중심으로 방국(方國)이 시작될 때, 요서 지역에도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 거대한 방국(方國)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곧 요하문명 지역에서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가점하층문화(BC 2300∼1600) 시기에 (1) 중국 고고학의 대원로인 고(故) 소병기(蘇秉琦: 1909∼1997)가 ‘방국(方國) 단계의 대국(大國)’이라고 부르고, (2) 설지강(薛志强)이 ‘하(夏)나라보다 앞서서 건설된 문명고국(文明古國)’이라고 부르는 대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황하문명 지역에서 ‘요-순’ 시대가 열리는 시기에, 요서 지역에서는 또 다른 고대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 교수는 “(1) 설지강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서요하 지역에서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 ‘하나라(BC 2070∼1600)보다 앞서서 건설된 문명고국’이 있었다면 그것이 바로 고조선일 가능성이 크고, (2) 설지강이 이야기하는 ‘하나라보다 앞서서 건설된 문명고국’이 앞서 소병기가 이야기하는 ‘하가점하층문화 시기 방국 단계 대국(大國)’이라고 할 수 있으며, (3) 홍산문화, 하가점하층문화를 주도한 세력의 일부가 중원으로 남하한 이후에야 황제족이 형성되어 요-순 시대로 이어진다고 보고, (4) 중원 지역에서 요-순시대가 열릴 때 요서 지역에서 ‘방국 단계 대국(소병기)’ 혹은 ‘문명 고국(설지강)’이 존재하였다면 단군조선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라면서 “중국의 권위 있는 학자들도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 서요하 지역에 ‘방국 단계 대국(소병기)’ 혹은 ‘문명 고국(설지강)’이 존재했다고 함에도, 한국학계에서는 요하문명에 대한 각종 연구를 중국학계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우리와는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고 비판하고 이제라도 요하문명과 단군조선의 관계, 더 나아가 한반도와 요하문명과의 관계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 교수는 “그렇지 않다면, (1)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이 황제족이며, (2) 후대에 등장하는 이 일대의 모든 북방 민족들은 황제의 후예라는 중국학계의 견해가 국제학계에서도 그대로 정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며 “요하문명은 고조선문명을 이루는 기본 토대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국학계 각 분야에서 좀 더 많은 학자가 요하문명, 홍산문화에 관심을 두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요임금과 같은 시대라는 고조선의 실존 가능성을 높이는 새로운 자료의 등장

우 교수는 네 번째로 (4) 요임금과 같은 시대라는 고조선의 실존 가능성을 높이는 새로운 자료의 등장과 관련하여 쟝 밥티스트 레지(Jean-Baptiste Régis: 1663-1738) 신부의 고조선 관련 기록에 주목했다.

18세기 당시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쟝 밥티스트 레지(Jean-Baptiste Régis: 1674∼1743) 신부에 의해 중국 황실서고에 보관돼 있던 중국 측 사료를 통해서 고조선 역사가 새롭게 발견돼 국내에서 처음으로 2018년에 유정희 ·정은우의 번역과 해제로 출간되었다.

레지 신부의 책은 1735년에 불어로 처음 출간되었고, 3년 후에는 영어 번역본이 나왔다. 국내에서 출판된 책에는 불어본과 영어본이 모두 실려 있고, 유정희 ·정은우의 상세한 해제가 달려있다.

레지 신부의 기록은 고조선이 하(夏)나라 이전 요(堯)임금 때부터 존재하며 하나라 때까지 속민(屬民)이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레지 신부의 책의 내용에 의하면, 고조선이 하나라의 폭정에 항거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실제 중국 하나라 영토에 침입하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자조선 이전까지만 해도 2814년간 이어져 왔다고 기록하고 있고, 진시황 통치 전까지는 ‘강남과 산동을 점유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 교수는 “놀라운 것은 이런 기록이, 최근 위서 논의에 휩싸여 있는 《환단고기》 등이 세간에 나오기 전 훨씬 전인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 1735년에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프랑스 신부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라는 점이다.”라며 “《환단고기》 계통의 책이 세간에 알려지기 거의 300여 년 이전인 출간된 레지 신부의 기록은 3권의 책을 참고했고, 이를 토대로 고조선, 고구려, 고려의 역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불어로 음사(音寫)하여 기록된 그 3권의 책이 실제로 어떤 책인지는 아직도 불명확하다. 하여간 그가 기록한 것은 분명히 그 당시 전해지던 사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에 기록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소개했다.

논문에서 우 교수는 “레지 신부의 기록은 짧지만 많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관련 학자들이 정밀하게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상-주 시대부터 고조선이 이들과 다툼을 벌이는 실존하는 국가였다는 사실이다. 이제 새로운 시각으로 고조선을 연구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더불어 앞서 살펴본 요하문명의 발견, 이하선후설 등과 연결하여 동북아시아 역사-문화의 판을 다시 짜야 할지도 모른다.”고 강조했다.

‘문명 단계’, ‘국가 단계’ 진입 시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등장

우 교수는 다섯 번째 (5) 동북아시아에서 ‘문명 단계’나 ‘국가 단계’의 시기를 앞당기는 시각 등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먼저 우 교수는 “최근 요하문명의 발견, 도사유지의 발견 등 새로운 고고학적 자료의 등장으로 중국학계에서는 각 지역에서 도대체 어느 시기에 문명 단계, 국가 단계에 도달했는지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경쟁하고 있다.”며 “이들 논의를 시기가 이른 것부터 간략하게 정리하면 대체로, (1) BC 3000년 전후설, (2) BC 2500년 전후설, (3) 기존의 정설이었던 하나라(夏: BC 2070∼1600)를 시점으로 한 BC 2000년 전후설 등 3가지 입장으로 나뉜다.”고 소개했다.

국가 단계에 관해서는 우 교수는 중국학자 허굉(許宏)의 논리가 설득력이 있다고 보고 허굉의 논리를 바탕으로 다른 이들의 논의를 종합해서 국가 단계를 정리했다.

우 교수에 따르면 첫째, 홍산문화 후기, 묘저구문화 2기, 양저문화 조기 등은 고국(古國) 혹은 추방(酋邦=군장사회=Chiefdom) 단계로 볼 수 있다. 둘째, 하가점하층문화, 도사유지, 석묘(石峁)유지 등은 ‘많은 방국(邦國)=방국(方國)’들이 공존하는 단계로 볼 수 있다. 아직은 어느 하나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병립하는 단계이다. 방국의 ‘도성들이 숲을 이루듯이 많은 상태(城址林立)’이다. 셋째, 하-상-주 시기는 ‘왕국(王國) + 주변의 많은 방국(邦國=方國)’의 단계로, 많은 방국을 거느린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한 ‘광역 왕권국가’가 탄생한 단계이다.

우 교수는 “이 문명 단계, 국가 단계 성립 시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동북아시아 철학, 종교, 문화 연구에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수 있다고 본다.”며 “앞서 소개한 중국의 권위 있는 학자들도 하가점하층문화(BC 2300∼1600) 시기에 요서 지역에는 이미 ‘방국 단계의 대국(소병기)’ 혹은 ‘하(夏)나라보다 앞선 문명 고국(설지강)’이 존재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의 국가를 중국학자들은 중국사에서 비정할 국가 명칭이 없기에 ‘방국 단계의 대국(소병기)’ 혹은 ‘문명 고국(설지강)’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신화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단군 시기의 ‘단군조선’이 있었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고 강조했다.

‘A자형 문화대(A字型 文化帶)’: 동북아시아 철학, 종교, 문화 연구의 새로운 인식틀

우 교수는 “지금까지 제시한 요하문명의 발견 등 5가지 요인들로 인해서 동북아시아의 상고사뿐만이 아니라 사상, 종교 문화 연구 분야에서도 새로운 시각으로 재편되어야 한다고 본다. 누구도 몰랐던 거대한 요하문명 발견된 이상 당연한 순서일 수밖에 없다.”며 ‘A자형 문화대(A字型 文化帶)’를 제시한다.

우 교수는 “중국학계는 그들 중심으로 새 판을 짜고 있다. 우리도 우리의 논리를 가지고 새로운 판을 짜지 않는다면 현재 요하문명 발견 이후 중국학계가 끌고 가고 있는 새로운 판짜기에 끌려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며 “중국 학계의 새로운 판이란 만주 일대의 모든 소수민족을 한족의 조상인 황제족의 후예로 만들고, 그 후예들이 만든 모든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무서운 시각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기억해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실하 교수의 'A자형 문화대' . [자료=우실하]
우실하 교수의 'A자형 문화대' . [자료=우실하]

 

우 교수는 “ ‘A자형 문화대’는 요하문명 지역에서 한반도로 연결되는, (1) 세석기문화, (2) 빗살무늬토기, (3) 옥결(玉玦), (4) 골복문화(骨卜文化), (5) 각종 형태의 돌무덤과 적석총, (6) 치(雉)를 갖춘 석성, (7) 비파형동검 등을 통해서 입증될 수 있다.”며 “‘A자형 문화대’는 (1) 요하문명 지역에서 중국의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노선, (2) 요하문명 지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연결되는 노선, (3) 장강 하류 지역에서 해로(海路)로 한반도 남부와 일본으로 연결되는 노선을 의미한다.”고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A자형 문화대’는 (1) 요하문명을 ‘동북아 공통의 시원 문명’으로 삼아서, (2) 미래의 한-중간의 역사, 문화 갈등을 방지할 수 있는 시각이다.

마지막으로 우 교수는 “동북아시아 철학, 종교, 문화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새로운 자료들을 따로따로 볼 때와는 다르게, 5가지 자료들을 연결해서 보면 동북아시아 상고사는 물론 철학, 종교, 문화 연구에 많은 새로운 시사점을 줄 수 있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인식틀을 벗어난 새로운 인식틀이 필요하다고 본다.“며 ”다양한 분야 학자들의 관심과 학문적인 검증을 거쳐서 이를 자료들이 새로운 인식틀을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