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서울지방보훈처 후원 2021년 현충시설 활성화 사업 “보고 듣고 가꾸는 현충시설 탐방” 프로그램으로 6월 20일 종로구 인사동 지역에서 만날 수 있는 현충시설을 탐방했다.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안전하게 탐방을 진행했다. 

탐방은 안국역 4번 출구 안에 있는 ‘3.1운동 100주년 독립운동 테마역사’를 관람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테마역사의 상징인 ‘100년 기둥’. 형형색색의 커다란 기둥은 6.7m 높이로 독립운동가 800여 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100초 동안 조명과 함께 빛나는 이분들의 얼굴을 우리 후손이 기억할 수 있도록 설치해 놓은 것으로 그 의미가 크다.

승객의 이동 통로를 따라 벽면에는 ‘100년 강물’이라는 전시가 이어져 있는데 독립운동 100년 역사의 흐름을 간단하게 살펴볼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4번 출구를 나오다 위를 올려다보면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글자와 태극문양이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의 대문을 표현한 ‘하늘문’이다.

밖으로 나오면 북촌과 인사동 가는 길의 거점인 안국역은 3.1운동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인근에 여운형, 손병희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의 집터도 있기 때문에 ‘독립운동테마역사’로서 손색이 없는 곳이다.

이곳으로 오는 많은 사람이 조금만 시간을 내어 우리 독립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3.1운동과 임시정부를 후원한 천도교중앙대교당. [사진제공=(사)우리역사바로알기]
3.1운동과 임시정부를 후원한 천도교중앙대교당. [사진제공=(사)우리역사바로알기]

 운현궁 건너편에 있는 천도교의 총본산 중앙대교당을 들어서기 전 먼저 보이는 것은 ‘세계어린이 운동발상지’ 기념탑이다. 초등학생 시절 일 년 중 가장 좋아하는 날을 꼽으라면 5월 5일 어린이날을 꼽곤했다. 그날을 만들어 주신 고마운 방정환 선생을 생각하며 잠시 설명을 이어갔다.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의 사위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돌리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철학과 아동문학, 아동심리학과 문화학 등을 공부했다. 귀국한 후에는 세계명작 10편을 번역하여 번안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출간했다. “짓밟히고 학대받고 쓸쓸하게 자라는 어린 혼을 구원하자” 구호를 내걸고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은 채 어린이의 인권을 위해 힘쓰셨던 방정환 선생을 잊지 않기로 약속하고 안쪽으로 들어왔다.

민족의 미래를 위해 어린이를 소중히 여겼던 방정환 선생의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 (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학생들과 함께 탐방했다. [사진제공=우리역사바로알기]
민족의 미래를 위해 어린이를 소중히 여겼던 방정환 선생의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 (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학생들과 함께 탐방했다. [사진제공=우리역사바로알기]

소년운동과 어린이 운동의 발상지인 천도교 소년회 사무소 터,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1927년부터 5월 첫 일요일)로 정하고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함으로써 어린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나갔다.

천도교 중앙 대교당은 건축사적 의미도 크지만 민족사적인 측면에서 의미가 큰 건축물이다.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1905년 3대 교주였던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개칭되었다. 천도교가 3.1운동에 많은 자금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중앙대교당 건립 자금 기금을 명목으로 한 성미제 덕분이었다. 성미제는 ‘교인 1인당 식사 때마다 쌀 한 숟갈’을 거두는 방식이다. 광복 후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김구 선생은 “천도교가 없었다면 중앙대교당이 없고, 중앙대교당이 없었다면 상해 임시정부가 없고, 상해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독립도 없었을 것이외다.”라고 연설하였다. 오랜 세월 전쟁을 거치면서도 그때 모습으로 남아 우리 독립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장소이다.

인사동을 가로질러 조계사 앞에는 여러 개의 표지석이 줄지어 서 있다. 민영환 집터, 도화서터, 전의감터, 우정총국 중수 기념비,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동상까지 볼 수 있다. 민영환은 조선말 관료로 민씨 척족 부정부패의 중심인물인 민겸호의 아들이지만,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며 자결하여 향년 45세로 순국했다. 자결 1년 후 그 방 마룻바닥에서 대나무가 돋아나 사람들은 그의 피의 대가로 얻어진 것이라 하여 ‘혈죽’이라 불렀다.

탐방참가자들과 함께 동상 주변과 안내판 등을 닦고 가꾸며 충정공을 기렸다.

민영환 선생 동상 정화활동. [사진 제공=우리역사바로알기]
민영환 선생 동상 정화활동. [사진 제공=우리역사바로알기]

조계사 대웅전 뒤편으로 가면 보성사 터가 나온다. 보성사는 대한제국 궁내부 내장원경 등을 역임하며 고종의 측근으로 국권회복을 위해 활약하던 이용익이 1906년 러시아어학교 자리에 보성중학교를 설립하면서 교재 출판을 위해 학교 구내에 설치한 인쇄소였다. 보성사의 역사적 의미는 1919년 3.1 독립선언서 인쇄에 있다. 일제는 3.1운동 직후 보성사를 폐쇄하고 6월 23일 밤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보성사 터 답사를 끝으로 초록이 짙은 여름날 현충시설탐방을 마무리했다. 햇볕이 내리쬐는 거리를 걸으면서 나라를 위해 힘써주신 선열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으로 이루어졌는지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보고 듣고 가꾸는 현충시설탐방’이라는 제목처럼 직접 보고 들으며 알게 된 지식과 감사한 마음으로 현충시설을 가꾼 체험은 모두의 가슴속에 깊이 기억되리라.  (사)우리역사바로알기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