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 신동아 전문기자

고구려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하는 동북공정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03년 7월 중국 학술전문기관지인 <광명일보>로부터였다. ‘삼국유사에 1,908세란 단군의 나이는 당연히 신화로 볼 수밖에 없고 한국사람 자신도 신화라 하니 단군조선은 없다. 사서의 조선은 기자조선과 기자를 이은 위만조선이다. 조선에 설치한 한사군 중, 현도군 내에 있던 고구려 현 사람들이 세운 나라가 고구려다. 독립적으로 커진 고구려를 영향권 안으로 만들려 한 수나라의 실패가 1차 통일시도였고 당나라의 2차 통일시도에서 성공시켰다. 다만 송나라 때 거란, 여진 등 북방민족 침입으로 국운이 다급한 상황에서 고려를 고구려의 후손으로 인정한 것이 큰 실책이었고 이성계에게 국호를 내려줄 때 조선을 사용하게 함으로서 고조선을 빼앗겼다.’는 것이 논문의 요지였다.

조선조는 500년간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오랫동안 가까이 지냈지만 중국과는 언어체계가 완전히 다르다. 한민족과 일본족, 만주족(여진족)문화는 홍산문화의 뿌리에서 능하문화-하가점 하층문화를 거쳐 온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국어 일본어, 만주어가 공통으로 어순(語順)이 같고 몽골어와 터키어와도 비슷하다. 문명문화는 어느 날 갑자기 발전하는 것이 아니므로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우리 문화와 중국 문화가 각기 다른 뿌리임을 뜻한다.

1만여 년 전부터 있어 온 신석기 홍산(적봉)문화는 기후 변화로 하가점 하층문화-능하문화(비파형동검문화)를 거쳐 만주와 한반도 일본으로 옮겨와 정주문화를 이뤘다. 또한 하가점 하층문화-하가점 상층문화를 거쳐 몽골 초원을 지나 알타이산맥 서쪽으로 유목문화를 전파했을 것이다. 따라서 홍산문화가 한민족 문화의 원류이자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문화원형이 된다. 이 지역 언어체계가 알타이어족으로 분류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하를 중심으로 가장 먼저 청동기를 형성한 세력, 몽골지역의 홍산문명은 황하문명권의 침범으로 분산되었다. 고조선과 흉노, 고구려와 돌궐 그리고 요, 금, 원, 청의 북방세력이 바로 그들이다. 그 후, 홍산 후예들이 황하의 풍요에 끌려 오히려 중국에 스며들었다.

지금 중국은 55개 소수민족을 가진 거대한 다민족국가가 되었다. 다민족국가를 지탱하기 위해 중국은 소수민족이 오래전부터 중국역사를 구성한 변방의 왕국임을 증명하려고 그들의 역사를 모두 중국사로 편입시킨다. 특히 중국을 지배하다 흡수된 거센 민족인 티베트, 위구르(돌궐)역사를 편입하기 위해 서남공정과 서북공정을, 몽골과 만주족의 역사를 편입하기 위해 그 만주를 지배했던 고조선과 고구려까지 흡수하려는 동북공정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빼앗길 수는 없는 터, 우리는 우리 뿌리를 고고학으로 찾아 정체성을 증명하고 분산된 민족을 통일하여야 한다. 실제로 고고학에서 단군설화에 등장하는 웅녀이야기가 실재역사임을 증명하는 유물이 홍산에서 대량 발굴되었다. 중국 적봉시(홍산)의 우하량 여신묘에서 여신상과 함께 곰 아래턱뼈, 곰발 모양의 토기 조각, 맹금류의 발톱과 진흙으로 만든 새의 날개모양이 출토된 것이다. 여신상 외에 새와 곰을 토템으로 여겼다면, 이들이 바로 환웅족과 결합한 웅녀족일 것이다.

만주족을 보면 고려인 김함보의 후손,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웠고 ‘아이신 기오로’성을 가진 누루하치도 아이신국을 세우고 국명을 한자로 후금(後金)이라 적으며 스스로를 ‘주션족’이라 했다. 만주족은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유민으로 한반도에 살아남은, 우리 문화와 분리된 세력이다. 

우리가 동북공정을 극복하는 길은 통일이 최선이다.  남북통일을 소통일(小統一)로 보면 남북한과 중국조선족 자치주까지의 중통일 그리고 여진족까지의 대통일, 몽골(더 먼저 헤어진 종족)과 합치는 대대통일로 정의할 수 있다.  요즘 세태대로 우리가 북한과의 통일을 포기하는 것은 조선이 명나라와 손잡고 한민족의 한 형제였던 여진족을 토벌했듯, 북한을 제2의 여진족으로 만드는 행위와 같다. 고려 말과 조선 초 이들을 떼어내지 않았다면 오늘날 지도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남북통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학문적으로 북방민족을 연구하고, 정치적으로는 통일을 추구해야 한다.